소설리스트

167화 (167/182)

155화

* * *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카미엘을 데려오라고 명했다면, 그게 가능한 상황을 안배해 두었을 것이다. 황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안은 토를 달지 않고 대공저로 수하 기사단을 이끌고 출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아무리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 하셔도 대공가는 왕부(王府)입니다! 이런 식으로 왕부의 문턱을 넘으실 수는……!”

이안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그자의 턱밑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 카미엘의 수하인 남자는 쉽게 꺾여 주지 않았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그럼 재미없지.”

이안은 검을 겨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거두었다.

“비키지 못하겠다면 나를 카미엘에게로 안내해라. 나 혼자 들어갈 테니.”

“…….”

주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카미엘의 수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황명을 거슬러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 담겨 있는 결정이었다.

이안의 검이 검집 속으로 들어갔다. 카미엘의 수하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태자 전하!”

“그만.”

자신을 말리려는 기사들을 일시에 조용히 시킨 다음,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대공저 안으로 발을 디뎠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흉흉한 속삭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죽여 버려. 그놈을 살려 두지 마. 기회는 오늘뿐이야.

부황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가 카미엘을 제압할 수 있게 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눈앞에서 유리가 죽는 꼴을 지켜본 그 가치 없는 목숨을 거둬 줄 기회 말이다.

“여기입니다.”

“…….”

이안이 턱짓을 하자, 카미엘의 수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황명이시랍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

이대로 무시할 생각인가 본데, 이안은 그렇게 넘어가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켜.”

“태자 전하! 그러실 수는, 여긴 대공 전하의 침실……!”

손쉽게 수하를 밀쳐 내고, 이안은 벌컥 문을 열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가 마주한 광경은 결코.

“……이안?”

단 한순간도 예상해 보지 못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안은 가까스로 이 한마디만을 뱉을 수 있었다.

“……유리?”

유리가 그곳에 있었다.

어디를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유령인 것처럼 몸이 반투명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손끝 하나 탈이 난 곳 없이, 온전하게 살아 있는 유리 엘로즈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진 카미엘 옆에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이게…….”

그는 분명히 부고를 받았는데.

분명히 유리 엘로즈가 죽었다고, 그렇게 들었는데.

한데 어째서 유리는 여기, 카미엘의 침실에 멀쩡히 살아서 있단 말인가?

유리는 누가 봐도 잠옷인 옷 위에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남자와 단둘이 있기에 적합한 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안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흔적이 있어.’

유리의 목에 분별력 없이 남겨진 붉은 흔적들이었다.

……널 속인 거야.

머릿속에서 새까만 속삭임이 피어올랐다.

“이안, 당황스럽겠지만 여기에는 다 사정이…….”

거짓말을 하려는 거야.

“이안?”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유리의 모습에, 이안은 목이 졸릴 것 같았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습니까?”

“그게…….”

“당신은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저도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안?”

유리가 제 앞에 우뚝 그림자를 드리운 이안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거기까지 말한 다음, 유리가 갑자기 휘청하며 쓰러졌다.

“!”

이안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쓰러지는 유리를 받쳐 냈다. 그의 눈에 쓰러진 유리의 뒷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목이 온통 붉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난잡한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잇자국마저 발견하자, 이안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걸 느꼈다.

왜 살아 있는지, 지금은 그걸 궁금해할 계제가 아니었다.

카미엘을 죽여 버리겠다는 소기의 목적도 머릿속에서 달아나 버렸다.

이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리를 안아 올렸다.

“태자 전하!”

카미엘의 수하가 외쳤다.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그분은 대공 전하의 손님……”

이안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태자 전하?”

대공을 끌고 나오려 안으로 들어간 태자가 웬 여성을 안고 나오자, 그의 수하들은 일제히 당황한 눈치였다.

상황이 심상찮음을 눈치챈 대공저의 기사들이 끼어들려고 했다.

“태자 전하, 잠시. 그렇게 가실 순 없습니……”

“네 주인이 쓰러져 있는데도 손님의 거처를 왈가왈부할 셈인가?”

“그게 무슨……!”

이안은 대공저 기사들의 혼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를 추어 안은 다음,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명령할 뿐이었다.

“안가(安家)로 간다. 최소한의 인원만 나를 따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안의 충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태자의 명령에 가부를 따지거나 의문을 제시하는 대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으음…….”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물가물한 시야를 명료하게 만들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부옇게 흐려진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진 채로 꼼짝하질 않았다.

‘대체 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나는 “물…….”이라고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흐릿한 시야 속에서 반짝이는 금발 머리를 한 남자가 움직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카미엘……?”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어렴풋하게 불안해졌다.

‘하지만…….’

손끝은커녕 머릿속에도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묵묵히 다가온 남자가 내 목을 안아 올리는가 싶더니, 내 입가에 물이 담긴 컵을 대 주었다. 입가에 컵이 닿자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말랐다.

남자가 천천히 컵을 기울였다. 나는 아이처럼 꼴깍꼴깍, 입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을 정신없이 마셨다.

내가 물을 마시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일까, 남자가 갑자기 컵을 내 입술에서 떼려 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찔거리며 컵을 쫓으려 하자, 남자가 쉬이, 하고 나를 달랬다.

“그렇게 조르지 말아요.”

다정하게 얼굴 언저리를 쓸어내리는 손길.

“당신이 목마르지 않게 충분히 줄 테니까…….”

어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혼미한 정신으로 생각하려 애쓰는데, 다시 컵 테두리가 입가에 닿았다.

생각할 새는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물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입가며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이런, 유리.”

남자가 웃으면서 내 뺨이며 목덜미의 물방울을 훔쳐 주었다. 손가락이 쇄골에 와 닿아 물 한 방울을 가져가는 느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역시 조금 더 원하죠?”

그랬다.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목이 말랐다.

“의사가 당신한테 물을 많이 먹이라고 했으니까…… 자.”

남자는 섬세한 손길로 내게 물 몇 모금을 더 먹였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마침내 물을 충분히 마신 내가 얕은 기침을 하자, 그가 컵을 치웠다.

“착해요. 잘했어요.”

칭찬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다시금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더 자요.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

“…….”

“내가 당신 곁을 지킬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걱정을 할 정신 같은 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들듯이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빛줄기가 날카롭게 눈꺼풀을 들췄다.

나는 자연스레 미간을 한 번 꾹 찌푸렸다가 눈을 떴다.

‘어…….’

낯선 천장이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머릿속에 가출했던 생각이라는 게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미엘은 괜찮을까?’

수프를 먹자마자 카미엘의 비틀린 마류가 촉발된 걸 보면 수프에 모종의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내가 가진 정화력을 다 퍼붓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카미엘을 정화할 때 평소랑 다른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 정화력을 쓸 때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파고들지 못하고 대충 증상만 무마하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메마른 스펀지처럼 정화력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 홀려서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내 모든 정화력을 쏟아붓고 말았다.

짚이는 거라곤 한 가지뿐이었다.

‘아무래도 그 ‘각인’이라는 걸 해서 그런 것 같아.’

그리고…… 그러고 나서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이안.’

맞다. 정화력을 다 소진하자마자 이안이 찾아왔지.

거기서 기억이 끊긴 걸 보면 정신을 잃은 모양인데…….

‘그래서 여긴 대체 어디인 걸까?’

내가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일어났어요?”

“이안!”

타이밍 좋게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이안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겐 그 얼굴에 묘하게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어서 걱정했어요.”

내 쪽으로 다가온 이안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나는 살짝 움찔하고 말았다.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나?

하지만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안의 표정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뭐라고 하기가 좀 애매했다.

나는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질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안, 여기는 대체 어디예요?”

“제 안가예요. 소재는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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