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182)

154화

간밤을 통해 서로 간의 합을 찾아낸 입술이 순식간에 깊게 맞물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그의 입술을 떨쳐 냈다. 그리고 말했다.

“착, 착하게 군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으응?”

“어제도 약속 어겨 놓고서!”

내 항변에 카미엘은 눈빛을 즐겁게 휘며 입을 쪽 맞출 따름이었다.

“그럼 오늘은 지킬게.”

“그런 게……!”

어디 있어, 라고 말할 틈은 없었다.

카미엘은 사람 휘두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어젯밤처럼 또다시 속절없이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 * *

예상한 대로, 카미엘은 전혀 착하게 굴지 않았다.

‘모자란 것도 조금 모자란 게 아니었고!’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운 채 카미엘을 노려보았다.

카미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벌어진 가운을 마저 여몄다. 그리고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카트 쪽으로 다가갔다.

“아침은 먹어야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아침인데요?”

중천에 떠오른 해를 가리키며 묻자, 카미엘이 대답 대신 눈웃음을 쳤다. 자기 잘생긴 줄 알고 저러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효과가 없지 않아서 분통이 터졌다.

“식사를 안 하면 안 되지. 응? 조금만 먹자.”

“…….”

곱지 않게 노려봐도 카미엘은 아무렇지 않게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더니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어제부터 계속 무리했는데, 뭐라도 먹어야지.”

“누구 때문인데요, 누구!”

“그래서 이렇게 책임지려고 하잖아.”

카미엘이 달콤하게 나를 꼬시면서 수프를 떠서 호호 불었다. 그리고 수저를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금만이라도 먹자, 응?”

“…….”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안 먹을 거야? 먹기 싫어?”

“…….”

먹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 이렇게 수발을 받아야 할 만큼 겪었던 일이 절로 생각이 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간 오기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말없이 고집을 피우자, 카미엘이 초조한 듯 물었다.

“정말 안 먹어?”

“네.”

“어쩌지……?”

카미엘이 정말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누가 식사를 안 한다고 해서 이렇게 당황한 적은 처음이야.”

“뭐라고요?”

뜬금없이 뭔 소린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카미엘이 순순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네 입에 한 숟갈이라도 물리고 싶은데, 강제로 그렇게 하긴 절대로 싫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언제부터 제가 먹는 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신 건데요?”

“어제도 체력이 없어서 중간에 잠들어 버렸는데. 이렇게까지 안 먹어도 괜찮을까, 싶어서 걱정이…….”

“……조용히 하고 당신이나 먹어요.”

내 입가에 들이민 스푼을 카미엘의 입가 쪽으로 밀어내자, 카미엘이 응? 하더니 합, 하고 한입에 스푼을 물었다.

“나쁘지 않은데.”

맛을 본 카미엘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수프를 한 숟갈 더 떠서 내 입가로 가져왔다.

“정말이야. 우리 요리사 솜씨가 나쁜 편이 아니거든. 한 입이라도 먹어 보자. 응?”

“…….”

자존심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애원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작게 입술을 열었다.

“옳지.”

카미엘이 벌어진 내 입속으로 스푼을 밀어 넣었다.

그의 장담대로 고소하고, 농후한 맛이 일품인 수프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윽…….”

“카미엘?”

카미엘이 돌연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구푸렸다. 화들짝 놀라 다가가 보니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갑자기 왜…… 이거 혹시 독?”

“음…… 말하자면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정말이에요?”

“걱정하지 마, 아마 나한테만 영향이 있는 걸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나는 다급하게 카미엘을 부축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카미엘에게 정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비틀린 마류의 조짐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 * *

시간을 조금 돌려,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공식적으로 유리 엘로즈의 부고가 황성에 도착한 시각.

“…….”

답답하게 목을 옥죄어 오는 옷깃을 풀어내며, 이안은 부고를 알리는 새까만 편지를 말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유리와의 마지막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날, 도서관. 폐하께서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어딘지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유리를.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맹세컨대 유리를 그런 식으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떠나지 않다 뿐인가?

이런 미래를 알았더라면 그날, 이안은 무슨 미친 짓을 해서라도 유리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조성한 새장, 조용한 정원과 포근한 잠자리와 그 외 유리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춘 안락한 새장에…… 영원히.

그랬어야만 했다.

그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이토록 허망하게 유리를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했던가?

유리는 떠나 버렸고, 이제 그가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이안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의 심정으로 빌었다.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준다면.

그때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텐데…….

반쯤 어둠에 잠겨, 초췌해진 꼴로 허공을 노려보다시피 하는 이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태자 전하?”

보좌관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보좌관은 안달이 나서 말했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한 시간 전부터 전하를 찾고 계십니다. 어서 가 보셔야…….”

“…….”

그랬다.

견딜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유리가 죽었다고 해서 이안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여전히 끝없이 그를 요구했다.

그것이 오늘따라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후계자를 정치적인 적으로 보는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이안의 삶은 외줄 타기나 다름없었다.

버텨야 하는 것.

떨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

어떻게든 이어 나가야만 하는 것.

하지만 유리를 잃어버린 지금에서야, 이안은 마치 동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침잠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대체 무엇을 동력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거지……?’

“태자 전하.”

걱정스럽게 재차 부르는 보좌관의 목소리는 이안의 귓전에조차 닿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다…….’

끝내 버릴까?

밀물이 차오르듯 턱 끝까지 차오른 생각에, 이안은 한순간 깊이 매혹되었다.

무언가가 스산하게 마음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끝내 버려. 대체 이 모든 발악에 무슨 의미가 있지? 네 손으로 끝장내는 거야. 그토록 내몰았던 후계자가 없어지면 네 아버지도 조금쯤은 곤란해지지 않겠어?

중간까지는 몹시도 유혹적인 속삭임이었지만, 이안은 마지막 말에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란 말인가?

한순간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서 죽음을 자처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멍청한.’

이안은 생각했다. 그 자신조차 이렇게 깊이 유리를 생각하는 줄은 몰랐지만, 유리를 잃어버림으로써 증명되었다. 지금의 이안은 유리 없는 세상에 그다지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지금 이 시점에서 목숨을 끊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는 그보다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 많았다.

가령, 그와 달리 유리를 지킬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눈앞에서 잃어버리고 만 인간들이라든가.

그야말로 무가치한 삶이 아닌가?

아직도 그 목숨을 이어 가고 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마음속에서 이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여 버려.

그럴 생각이었다.

한 사람도 이 땅에 남겨 두지 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너 자신조차도.

마땅히 그렇게 할 것이다.

제단 위에 바쳐야 할 제물을 헤아리듯이, 이안은 유리의 무덤에 목숨으로 헌화할 자들의 명단을 추렸다.

“태자 전하! 정신을 좀 차리시고……”

“조용히 해라, 엘런.”

다짐을 마치자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이안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부르신다고 했지. 가 볼 테니까 그만 불러도 된다.”

“전하…….”

보좌관, 엘런은 처음으로 제 주인에게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항상 어쩔 수 없다는 듯 폐하의 명령에 따르던 분이셨는데…….’

속내야 어떻든 태도만은 늘 온유하던 이안에게서 느껴지는 흉흉함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무어라 말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수하가 불안해하거나 말거나, 이안은 깔끔한 태도로 부고장을 내려놓고 옷차림을 다시 반듯하게 고쳤다. 그리고 말했다.

“가지.”

“아, 예. 전하.”

엘런은 불길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의 주군은 한평생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늘이라고 참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겠지?’

흘긋 눈치를 살폈지만, 이안은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말끔한 무표정으로 길을 앞설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시종이 알렸다.

“폐하,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내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

이안은 반듯한 자세로 서서 딱 제가 황제를 기다리게 한 시간의 두 배를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야 명령이 떨어졌다.

“들라 해라.”

“저, 전하. 어서 드시지요.”

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냉큼 문을 열어 주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집무실에 들었다.

“폐하.”

“그래. 어서 오너라.”

황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아들을 맞았다. 그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던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네게 명령할 것이 있다, 에이드리언.”

“말씀하십시오.”

“카미엘을 궁으로 데리고 와라.”

“…….”

갑작스럽게 나온 카미엘의 이름에 이안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에이드리언 카시스?”

황제가 그런 기색을 놓치지 않고 그를 불렀다. 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말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