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네.”
유리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과거에 다녀왔어요. 전하 앞에 나타난 건……”
“설명하지 않아도 돼.”
카미엘이 유리의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었다. 확실히 숨을 쉬며 존재하고 있었다.
“나 다 기억나.”
그의 평생을 훔쳐 간 사람이 여기 있었다.
“읍, 전하!”
카미엘이 거세게 유리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가슴이 짓눌릴 만큼 껴안긴 유리가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게 느껴졌지만, 카미엘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줄 수가 없었다.
“네가, 네가…… 나를, 나는, 너를.”
두서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유리는 카미엘을 말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카미엘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세 번이었다. 세 번을 이 손안에서 놓쳤고, 한 번은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유리.”
“저, 전하. 잠시……”
“또 놓치는 바보짓을 할 것 같아?”
카미엘의 입가가 떨리며 미소를 그렸다. 이제야 이 손에 넣었다. 놓칠 수 없는 것, 놔줄 수 없는 것이 이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충족감에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희열이 미친 말처럼 날뛰며 전신을 압도했다.
“으흡.”
카미엘은 그대로 유리의 숨결을 삼켰다.
살아 있는 유리의 감촉이 온통 그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빼앗고 있는 쪽은 그였는데, 혼을 빼앗기고 있는 건 그인 것 같았다.
“잠깐, 아.”
벌어진 입술 사이를 적시고 혀가 뱀처럼 미끄러졌다. 교활함에 자리를 내주고 만 유리가 목을 울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카미엘은 정신이 없었다. 유리는 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그맣게 벌어져서 소극적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잇새도, 얽히는 그의 혀에 수줍게 반응하는 조그만 혀까지도 전부.
뿌리째 삼켜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어떻게 있을 수 있지? 가슴이 빠듯하게 아플 정도였다.
억제제가 그와 고통의 사이를 약간 띄워 놓는 역할을 한다면, 유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건 얼음 가시 같은 고통이 따뜻한 물에 전부 녹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까지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유리가 숨을 쉬기 힘든 것 같아 입술을 살짝 떼 주었다. 유리가 발그레하게 상기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카미엘은 망설임을 읽어 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카미엘을 말렸을 유리가, 망설이고 있었다.
‘아.’
교활한 카미엘은 눈치채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구나.’
유리가 다녀갔던 그의 어린 시절을, 그녀도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심성이 착한 유리였다. 분명 그를 가엾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특히 카미엘은 자존심이 까마득하게 높은 남자였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다시 그런 생각을 못 하도록 직접 머리를 뽀개 줄 의사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동정에 불과할지라도 좋아.’
그건 즉, 유리의 마음이 그를 향해 말랑해진다는 것과 동의어였으니 말이다.
유리가 그를 가엾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입이 찢어지게 웃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지만, 카미엘은 내색하는 대신 좀 더 불쌍해 보이도록 유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유리를 안은 채 침대 쪽으로 이동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보고 싶었어, 유리.”
“…….”
아니나 다를까, 유리는 카미엘이 자기를 침대에 앉히는 것도 모르고 카미엘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유리의 살냄새를 맡으면서, 카미엘은 어리광을 부렸다.
“두 번이나 내 앞에서 사라졌지만, 그래도 기다렸어.”
“미안해요.”
들어야 하는 말을 들어 낸 카미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물었다.
“내가 두 번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
“기억나요.”
유리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미엘, 그건 내가…….”
카미엘은 대답 대신 유리의 어깨를 잡았다.
심상찮은 기운에 말을 멈춘 유리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미엘은 고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유리.”
“네?”
카미엘이 가볍게 유리의 어깨를 밀었다. 유리는 어라, 하면서도 푹신한 침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카, 카미엘?”
그제야 조금 위기감을 느낀 건지, 유리의 목울대가 꿀꺽 오르내렸다.
“나 계속 유리를 기다렸어.”
“그, 그건…….”
“이따금씩은 이렇게 해 버리고 싶기도 했는데.”
카미엘이 엄지를 세워 제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래도 혹시 유리가 왔을 때 내가 죽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참았어.”
“카미엘…….”
“그러니까…….”
여기서부터가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은 이유, 중요한 본론이었다.
카미엘은 빨아들이듯 사람을 가두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인 유리의 위로 날렵하게 타고 올라갔다. 이미 한참 전부터 아플 정도로 안달이 난 몸이 유리의 무릎 사이를 가르고 자리 잡았다.
열기에 압도당한 유리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잠깐, 카, 카미엘. 이건…….”
“안 돼.”
하지만 카미엘은 요만큼도 물러나 주지 않았다.
의식해서 목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기대감 때문인지. 짐승처럼 목소리가 그르렁거리며 긁혀 나왔다.
카미엘은 즐겁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나를 가져 줄 시간이야.”
그리고 유리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갉작거리듯 입을 맞추었다.
“읏…….”
유리의 얼굴이 더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응? 그렇게 해 줄 거지?”
카미엘이 조르면서 유리의 손바닥을 핥았다. 유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옳지.’
카미엘의 눈빛이 여우처럼 가늘어졌다. 그가 말했다.
“착하게 굴게. 응?”
“…….”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로 유리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웅얼거리는 모양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응? 안 들렸어.”
“……진짜냐고요, 착하게 군다는 거.”
카미엘의 가슴이 만족으로 크게 부풀었다.
이대로 한입에 꿀꺽 털어 넣고 싶었지만, 조급하게 굴었다간 일을 망치게 될 터였다.
“응.”
음험한 속내를 아양 떠는 태도와 아름다운 껍데기 안에 감춘 남자가 세상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그러니까…….”
카미엘의 입술이 유리의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타고 내려왔다. 유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끝까지 다 먹어 치워 줘야 해. 할 수 있지?”
손 틈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유리는 카미엘의 입가에 침이 고일 때까지 그를 기다리게 한 끝에…….
“…….”
겨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엘은 망설임 없이 침대가에 늘어진 줄을 잡아당겨 커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