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했지.’
이 문제만큼은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야.
공녀가 화가 난 거야 시간을 들여서 풀어 주면 되겠지.
카미엘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며, 저택을 나서는 유리를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그 어리석음을 멍청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를 않았다.
폭주의 전조였다.
“대공?”
삐이이이익, 하는 이명이 귀에 울렸다.
유리 공녀님께선? 저택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마물이 나타났어. 무서워. 공작 각하께선 어디 계시지?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아파…….
……듣고 싶지 않은 세상의 소음들이 귓가에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다양한 종류의 고통들이 카미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공, 괜찮은 겁니까?”
“……시끄럽군.”
간신히 대답하고, 카미엘은 왈칵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여기선 안 된다.
유리가 살았던,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카미엘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마법사는 끈질겼다.
“대공, 당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겠지.”
카미엘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마법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법사 역시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역시 유리를 눈앞에서 잃은 충격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공저에 도착한 카미엘은 도저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린 시절 용의 피를 장복한 탓에 그의 체질은 정상적인 인간의 궤도를 벗어난 지 한참이었다.
그로 인한 다양한 부작용 역시 존재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부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폭주 현상이었다.
증상은 다양했다. 이명, 환시, 환청, 두통, 작열감, 사지가 절단되는 것만 같은 느낌, 온몸의 혈관에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굴러다니고, 거인의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평상시에도 고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폭주 시의 고통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10년이 넘게 이 현상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익숙해질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간신히 제 방으로 돌아온 카미엘은 거친 손길로 서랍을 열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쓸어 낸 다음에야 작은 약병이 하나 손에 잡혔다.
그를 이렇게 만든 건 용의 피였건만, 아이러니하게도 폭주할 때 그를 달랠 수 있는 억제제를 만들 수 있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용의 피였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딴 카미엘이 저주받은 마물의 왕의 피가 혼입된 독한 약을 곧바로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흐으으으…….”
독한 약인 만큼 즉각적으로 효과가 돌았다. 카미엘은 눈앞의 세상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푹신한 안락의자가 그의 몸을 삼키듯이 받아 냈다.
선명했던 고통이 흐려졌다. 그만큼 의식도 희미해졌다. 젖은 빨래처럼 의자 위에 널브러진 채로, 카미엘은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토했다.
바닥이 없는 곳을 향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유리의 손길은 이렇지 않았다. 그가 평생 앓아 온 고통을 지워 내는 손길은, 그의 정신을 맑고 뚜렷하게 만들었으며 이제까지 맛본 적 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아주 어릴 적, 포근하고 깨끗한 침구에 몸을 묻을 때 느꼈던 안락함과 행복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고통에 절어 망가지다시피 한 카미엘의 뇌는 그 감각을 쾌락적으로 받아들였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했고, 한없이 중독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지?
“이 손에 쥐고…….”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했는데.
결심이 무색하게 유리는 손 틈새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카미엘에게 남은 건 그를 잘라 낼 듯 화를 내던 유리의 모습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유리를 끌어안고 말하고 싶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해, 공녀.
공녀가 위험한 일에 얽혀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런 식으로라도 공녀가 이 일에 말려들지 못하게 하고 싶었어.
못되게 굴었다는 건 인정해.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다섯 살 이후로 진심으로 뭔가를 참회하거나 뉘우쳐 본 일이 없는 카미엘이었지만, 유리를 상대로 한다고 생각하니 말들이 막힘없이 줄줄 쏟아졌다.
그렇게 말하면 공녀는 어떤 얼굴을 할까?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매달리는 자신을 향해 “알았으니 이 손 좀 놔요!” 하고 말하지 않을까?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그렇게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없어져 버렸다. 아주 사라졌다.
그가 잃어버렸다.
약으로 다스린 고통이 다시금 크기를 키웠다. 카미엘은 몽롱해졌던 정신이 다시 고통에 저는 걸 느끼면서 생각했다.
자업자득이 아닐까?
그토록 소중한 것에게 못되게 군 죄로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유리 엘로즈를 보내 준 신에게 감사하면서, 얼른 그녀를 낚아채서 품 안에 감추고 아무에게도 내주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 건데.’
약과 고통에 취한 카미엘의 눈이 먼 허공을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 위로 투명한 수막이 고였다.
넘칠 듯이 고인 눈물은 이내 눈꼬리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미엘은 제가 울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웃었다.
제 멍청함이 우스워서.
지독하게 속이 쓰리고 고통스러워서…….
* * *
사흘 밤낮이 흘렀다.
대공저의 깊은 곳, 카미엘의 방문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대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어, 아랫사람들은 불안하게 방문을 쳐다보기만 해야 했다.
사흘째에 로잔헤이어 공작가가 공녀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부고를 보냈을 때도, 카미엘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카미엘은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고통을 느끼면 약을 삼키고,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로 유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서…….’
의미가 있나?
전 생애를 바치고 있던 복수조차도 희미해졌다. 유리를 놓쳐 버린 게 전부를 잃은 것과 동일하다는 걸 재차 깨닫고, 또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를 사로잡고, 또 믿을 수 없이 빠르게 그를 떠나간 사람.
그 사람을 쫓아가는 방법은 같은 죽음을 겪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엘의 눈길이 뒹굴고 있는 약병들에 머물렀다. 억제제는 사실 독이나 다름없는 약이었다. 재료 하나하나가 극독이나 다름없는 것들로만 구성된 독약.
……남아 있는 것을 몽땅 마시면, 유리를 따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로 안 되면, 목을 그어 버려도 되고.
그렇게 생각한 카미엘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을 넣어 둔 서랍으로 다가가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게 맞아.
이게 정답이다.
막, 그의 손이 남은 약병들 사이를 헤집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그의 심장에서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바닥에 고인 마나가 순식간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온갖 지독한 일을 겪어 온 그조차도 처음 겪어 보는 현상이었다.
방 안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커튼이 살짝 휘날릴 정도의 옅은 바람이었다.
그 부드러운 바람이 마치 카미엘을 휩싸듯 소용돌이치더니, 카미엘의 바로 앞 허공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바람의 중심에서 금빛 입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카미엘은 그 기이한 광경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희미하게 번지는 향기가 익숙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발을 묶인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마.’
설마, 저 안에.
두근, 두근, 두근.
약으로 느려졌던 심장이 약 기운마저도 이기고 뛰기 시작했다.
금빛 입자는 이제 거의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뺨과 코, 가는 어깨와 팔다리…….
올올이 모여든 빛이 마치 빚어내듯이, 유리 엘로즈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카미엘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팔을 뻗었다. 반쯤 완성된 유리 엘로즈를 끌어안듯 팔을 둥글렸다.
그 팔 안으로, 공중에 떠 있던 유리 엘로즈가 실에서 놓여난 인형처럼 안겼다.
“!”
환각을 보나 생각하던 카미엘이 놀랄 만큼 현실적인 무게감이 느껴졌다.
따뜻한 살갗과 뛰는 맥박을 가진…….
‘진짜야.’
진짜 유리 엘로즈였다.
“으, 으음…….”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굳어 버린 카미엘의 품 안에서, 유리가 신음했다.
깜빡, 깜빡.
긴 은빛 속눈썹이 드리운 눈꺼풀이 열리고, 보석처럼 빛을 품은 청안이 드러났다.
“……카미엘?”
유리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번졌다. 그녀가 카미엘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카미엘! 카미엘 맞죠!”
“우으.”
얼굴을 쥐어 잡힌 채로 카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유리가 두 팔로 카미엘의 목을 껴안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건……”
내가 할 말, 이라고 카미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려던 순간.
금빛 마법진이 부우웅, 소리를 내며 회전하더니, 다시 카미엘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억이라는 씨실에 날실을 섞듯, 이제까지 없었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여덟 살, 3년 동안이나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험을 당하던 그 순간에.
“……유리. 유리예요, 전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름을 알려 주던 유리가 스며들었다.
“……미안해요. 두고 가 버려서.”
사과하는 유리의 기억.
“상관없어요.”
“아닐 거예요.”
“전하,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세요. 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내 손을 잡기만 하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유리…….
카미엘은 전율했다. 어떻게 이때까지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 잠깐의 기억과 그 후의 오래고 지독한 기다림을?
“유리…….”
목이 메었다.
“정말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