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182)

151화

“유리, 놀랐어?”

신경질적인 얼굴을 금세 지운 카미엘이 나에게 다가왔다.

“조, 조금…….”

카미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단번에 죽여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저기 전하.”

나는 아무래도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려 물었다.

“배후는 찾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배후?”

카미엘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안 찾아도 돼. 어차피 뻔하거든.”

“…….”

뻔하다면…… 역시 황제 쪽을 말하는 걸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일까, 카미엘이 다시 바로 내 옆에 붙어 앉았다.

“뭐야, 걱정하는 거야?”

카미엘이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주변에 암살자가 들끓는 이런 남자하고는 함께 살기 싫다거나.”

“……이런 일이 잦아요?”

“내가 진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카미엘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의 얼굴엔 가로로 길게 베인 엷은 상처가 나 있었다.

목숨을 잃은 암살자에 비해 하찮은 상처였지만, 나는 그 상처가 몹시 마음에 걸렸다.

“……다치셨어요.”

“어?”

나는 손을 뻗어 상처를 어루만졌다. 내 손끝에 묻어난 피를 보고 카미엘이 어딘지 멍한 얼굴로 “그러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만…….

“읏, 전하?”

“손가락이 더러워졌잖아.”

덥석 내 검지를 입에 넣은 카미엘이 눈웃음을 치면서 피가 묻은 부분을 핥았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외쳤다.

“그렇다고 해서……!”

“어라, 이거…….”

항의하는 나는 아랑곳 않고, 카미엘이 찹찹 입맛을 다시더니 중얼거렸다.

“마물의 피 맛이 나는데.”

“뭐라고요?”

“윽, 잠깐.”

카미엘이 한쪽 눈가를 우그러뜨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지 그의 흉곽이 부풀어 올랐다.

“전하? 괜찮으세요?”

“응…… 괜찮을 거야.”

카미엘이 이미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정반대의 말을 했다.

그가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간 보기 흉할지도 몰라서. 자리를 좀 피해 줄 수…….”

딱, 하고 그의 이가 맞물렸다. 카미엘의 이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전하!”

“크으…… 젠장.”

카미엘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역시 곱게 죽이는 게 아니었다는 둥의 말을 중얼거리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전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사람을 부르는 게……”

“그냥, 내버려 둬……. 잠깐 발작하는 것뿐이니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카미엘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개입하시겠습니까? Yes or No.

“!”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이 메시지에는 안 좋은 추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포인트를 요구하려고…….’

불안했지만 이대로 카미엘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일단 ‘Yes’를 선택했다.

과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저항 포인트(defy destiny point)가 필요합니다.

‘열여덟 살 카미엘의 폭주’를 막는 데 필요한 저항 포인트는 200P입니다.

“!”

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여덟 살 카미엘의 탈출 때처럼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딱 지금 내가 보유한 포인트 잔고와 숫자가 맞았다.

현재 보유한 저항 포인트: 200P

저항 포인트를 소모하여 과거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카미엘에게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비틀린 마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

주변을 시커멓게 물들일 정도로 거대하고, 엄청난 흐름이었다. 나는 재빨리 카미엘에게로 손을 뻗었다.

“전하!”

“손대지 마!”

카미엘이 날카롭게 말하며 나를 쳐 냈다.

“!”

‘거부했어, 나를?’

놀란 내게 카미엘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가, 까이, 오지 마. 나는 지금, 제어가, 제어가 안 돼.”

“상관없어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카미엘의 눈동자는 거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다, 무너뜨릴 거야. 너, 너를, 죽일지도 몰라. 후윽…….”

“아닐 거예요.”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전하,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세요. 네?”

“…….”

카미엘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와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신중하게,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

“내 손을 잡기만 하면 돼요.”

카미엘이 까득,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내 손을 잡았다.

“흡!”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카미엘에게 껴안겼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Yes!’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12650

7619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파앗.

내 몸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빛줄기가 바닥에 복잡한 마법진을 그렸다.

‘제발.’

나는 총량의 반 이상 정화력을 쏟아부어, 카미엘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하고 비틀려 있는 마류의 유속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헉, 흐윽…….”

“아파요, 카미엘?”

“아냐, 아니야, 유리…… 제발.”

카미엘이 흐느끼듯 도리질을 치며 내게 안겼다.

“제발, 유리, 좀 더…… 좀 더 해 줘, 나를…….”

“아, 알았어요.”

정화력을 좀 더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잔량: 5031

4899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내가 추가로 정화력을 투입하자, 카미엘이 헉 하고 무릎을 꿇었다.

덩달아 나도 반쯤 내게로 쓰러진 그를 부축하며 주저앉게 되었다.

“유리, 유리…….”

다급하고 필사적으로 나를 끌어안고 자기 품으로 우겨 넣으려는 손짓.

카미엘은 어떻게든 나를 붙잡았다.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맞닿은 온몸을 통해 내 힘이 전해지기를 빌며, 정화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컨트롤했다.

마침내…….

12518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미엘을 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2’ 달성률이 34% 상승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카미엘의 호감도가 대폭 오릅니다.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 목표 달성률이 30% 상승합니다.

마침내…… 해냈다.

하지만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시간대를 조정합니다…….

‘아.’

또 시작이다.

“유리!”

카미엘이 비명처럼 외쳤다.

‘아, 또.’

내 몸이 다시 말단부터 투명해지고 있었다.

“유리, 안 돼. 안 돼……!”

카미엘이 워낙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통에 나도 무어라고 말을 해 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두 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

“나를 떠나지……”

마, 하는 마지막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야가 다시금 하얗게 물들었다.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

* * *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다.

한때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유리도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여러 가지 마법의 충돌이 일으킨 빛들 사이에서, 마치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처럼 흩어져 버렸다.

한순간에.

유리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님-!”

유리의 동생이 큰 소리로 외쳐 불렀지만, 화답하는 것은 고요한 적막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대마법사가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미엘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발이 차가워졌다. 무언가 말을 해 보려 해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유리 엘로즈가.’

사라졌다.

아니, 이걸 사라졌다고 할 수 있나?

‘죽어 버렸다’고 표현해야 맞는 거 아닐까?

그 생각이 차가운 한기처럼 뇌리를 파고들었다. 카미엘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죽었다고?

누가?

유리 엘로즈가?

죽어?

처음으로 카미엘을 덮친 건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 정도의 배신감이었다.

‘어떻게 죽어 버릴 수가 있는 거지?’

여기, 이렇게 그를 내버려 두고서?

용납할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달궈진 분노가 카미엘을 잠식했다.

“로엔 대공!”

그때, 대마법사가 그를 불렀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 기운에 사람들이 짓눌리지 않습니까!”

그거야말로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제지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비이성적인 분노는 더 이상 카미엘을 지배하지 못했다.

“마법사, 보았나?”

“……봤습니다.”

“공녀가 사라졌어.”

“예. 압니다.”

대마법사 역시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카미엘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분명한 건 그가 혼자 환각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유리 엘로즈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바닥이 끝없는 낭떠러지가 되어 그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그들의 마지막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녀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든지 간에…… 그 답을 찾지 말라는 것뿐이야.”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 건 전하의 자유예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가까이 불러들인 다음, 내쫓다시피 선을 그을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유리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냥 알아듣도록 좋게 말할 수도 있는 걸, 꼭 이렇게 나쁜 방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쳐야 하냐고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화를 내며 돌아서는 유리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생각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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