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182)

150화

‘뭐, 뭐지?’

“하아…….”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확연히 마른 팔로 — 그렇지만 여전히 웬만한 성인 남성은 찜 쪄 먹을 만큼 단단하긴 했다 — 나를 꽉 끌어안은 다음, 카미엘이 내 어깻죽지에 고개를 푹 묻었다.

“정말, 너는, 내가 너를…….”

“저, 전하. 이거 좀 간지러운 것 같은데.”

“처음엔 딱 5년만 기다리자고 생각했어.”

“…….”

“5년이 지나면, 그래. 내가 꿈을 꾼 거라고, 거기서 겪었던 일이 너무 엿 같은 나머지 환상을 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스읍, 카미엘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10년이 지났어.”

그 호흡이 마치 생명 줄인 것처럼, 그는 폐부를 크게 부풀리며 숨을 쉬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어, 유리…….”

그 말 속에서, 이렇게 되기까지 그가 겪은 수많은 절망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약간 어색하게 카미엘의 품에 안겨 있기만 했다. 카미엘은 그것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흥분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랑 여기 이렇게 있어 줘. 내일은 같이 네 방을 보러 가자.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꾸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할 거야.”

“저, 저기……”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네 방은 아직 사용할 준비가 안 됐거든.”

거기까지 말한 소년이 하아, 하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기다리면서 네 방을 만들어 두긴 했는데…… 지금은 왠지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야. 네 방이 없다면 나랑 계속 같이 지낼 수도 있는 건데.”

“!”

“하하, 놀라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움찔하자, 카미엘이 웃으면서 나를 달랬다.

그리고 잔뜩 황홀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귀여워…….”

“네에?”

“유리, 넌 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귀엽기까지 한 거야!”

카미엘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쪽쪽 맞추면서 얼굴을 부벼 댔다. 나는 “자, 잠깐!” 하고 말려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계속, 계속 알고 싶었어.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카미엘이 내 목덜미에 이를 세워 입질까지 하면서 말했다.

“유리, 얼굴 좀 다시 보여 줘. 응?”

“그, 그렇게 깨물지 마세요.”

“싫어.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걸……. 10년씩이나 걸려 놓고 쩨쩨하게 굴지 마.”

“쩨, 쩨쩨해요? 대체 누가요!”

“얼굴 좀 다시 보자, 응?”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카미엘이 또 힘을 써서 휘릭 나를 돌려 안았다. 무슨 애들이 안고 다니는 솜 인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카미엘.”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밀어내려는데, 카미엘이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보고 싶었어.”

“…….”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욱씬.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이 들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의도하거나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장소에 어린 카미엘만 내버려 두고 떠나오게 된 건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거대한 죄책감으로 남아 버렸다.

이름을 가르쳐 주고, 정화를 해 주는 것보다 더 상황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 내게, 카미엘이 원망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약속했잖아. 안 간다고.”

그래, 내가 그랬다.

그때는 카미엘을 정화할 수 있을 때까지 다만 얼마간이라도 함께 머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0분도 안 지나 약속을 어기게 될 줄도 모르고.’

탈출을 시켜 준 것도 아니고, 그저 희망 고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엘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바닷소리를 들려주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에 만족해서 가만히 눈을 빛내던 아이.

눈치를 보며 잡은 손에 살그머니 이마를 기대던 그 아이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미안해요. 두고 가 버려서.”

“응, 많이 미안해해 줘.”

카미엘이 나긋하게 말하며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미안한 만큼 내 옆에 있어 줘.”

교활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소년이 독점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대답을 해 주지 않아?”

“그건…….”

섣부르게 약속할 수는 없었다. 나도 내가 언제 어느 시간대로 돌아가게 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니 말이다.

“왜? 또 날 버릴 거야? 그때처럼?”

나를 껴안은 카미엘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전하, 아파요…….”

“두 번은 안 돼.”

“?”

카미엘이 끌어안았던 나를 다시 놔주는가 싶더니, 놓여난 나를 툭 밀었다.

‘어어……?’

밀려난 몸이 도로 침대에 푹 파묻혔다.

카미엘이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타 지그시 어깨를 눌렀다.

“전하……?”

꿀꺽,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내가 알고 있던 카미엘보다 작고 여렸는데도,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다.

무표정하게 붉은 눈을 빛내며 카미엘이 말했다.

“난 두 번은 안 된다고 말했어.”

“…….”

“약속 한 번 깼잖아.”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힘주어 그러쥐었다. 아마 손을 떼면 손자국이 남아 버릴 것이다.

“두 번째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니…….”

베일 듯이 서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미엘을 보니, 조금 억울해졌다. 이건 나도 내 자의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그가 용서하지 않으면 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용서 안 하시면 뭘 어떻게 할 건데요?”

카미엘의 입가에 비수 같은 미소가 스쳤다.

“……알고 싶어? 굳이?”

“……그, 생각해 보니까 굳이 안 알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잽싸게 말을 바꿨다. 그런 나를 보며 카미엘이 후후 웃었다.

“그래, 약속하지 마. 안 해도 상관없어.”

“갑자기 왜 관대해지신 건데요?”

“유리가 약속할 필요는 없어. 내가 손에 쥐고 놓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네에?”

“으응, 그러면 되는걸. 내가 괜히 유리를 겁먹게 했네. 그렇지?”

“뭘 그러면 돼요?”

나는 경악해서 카미엘의 어깨를 손으로 찰싹, 내려쳤다.

“납치 감금은 범죄예요!”

“납치라니.”

얻어맞고도 카미엘은 좋다고 실실 웃었다.

“내가 유리를 납치한 게 아니라, 유리가 고맙게도 내게 와 준 거잖아.”

“윽, 그건…….”

“아니지, 오히려 내가 유리를 주거 침입죄로 처벌해야 하는 거 아닐까?”

“처, 처벌이요?”

“응, 좋아. 처벌은 평생 여기서 못 나가는 걸로 하자.”

“좋긴 뭐가 좋아요!”

“유리, 정말 보고 싶었어. 너무 좋아.”

카미엘은 대답 없이 환장하려는 나를 끌어안고 강아지처럼 치댈 뿐이었다. 아마 그에게 꼬리가 달렸다면 지금쯤 프로펠러처럼 붕붕 돌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역시, 어려도 카미엘은 카미엘…….’

정말이지 한 치도 방심할 수가 없는 그런 남자였다.

* * *

그런 카미엘의 바람 덕분인지, 나는 처음으로 과거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몸이 찌뿌둥해…….’

밤새 카미엘이 원하는 대로 바디 필로 노릇을 해 줬더니, 몸이 안 결리는 데가 없었다.

그런 내 옆에서 카미엘은 방글방글 웃으며 신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컨디션도 최상인지 피부가 마치 유약을 바른 백자처럼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얄밉다, 얄미워…….’

“덕분에 잘 잤어, 유리.”

“예, 물론 그러셨겠죠…….”

“하아아. 이렇게 자 본 적은 정말 처음이야…….”

카미엘이 나를 끌어안고 비비적대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될 뿐이었다.

그런 나를 약간 가늘어진 눈초리로 바라보던 카미엘이…….

“!”

내 뺨에 입을 촉 맞췄다.

“대, 대대대대, 대체 무슨 짓을!”

“하하, 놀란 얼굴.”

그제야 카미엘의 얼굴에 다시 싱글벙글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하, 숨을 토했다.

“그렇게 절 놀리고 싶으세요?”

“유리가 옆에 있다는 게 좋아. 좋아서 미친 것 같아.”

“…….”

불시에 나온 진심에 말을 잃은 내 손목을 카미엘이 잡아끌어, 손바닥에 얌전히 입을 맞추었다.

그 상태로 그가 속삭였다.

“……이게 꿈이라면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당신 미래가 걱정돼요…….”

“걱정돼? 걱정되면 계속 나랑 함께해 줘.”

대답해 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나를 대할 때와는 영 딴판인 목소리로 카미엘이 명령하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전하, 아침 식사입니다.”

눈을 내리깐 시녀가 아침을 담은 카트를 밀고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카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밥이 나왔으니까 내 옆자리에서 맞은편으로 이동하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챙!

“!”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아 든 시녀와 카미엘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내 유리 앞에서 이런 장면을 보여 주게 만들다니.”

카미엘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그는 별로 힘을 들이고 있지 않은데, 시녀 쪽은 이까지 악물고 전력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용기가 가상해.”

“윽!”

카미엘이 가볍게 시녀의 검을 떨쳐 냈다. 두어 합 정도 공방이 오갔지만, 결국 카미엘에 의해 시녀의 무기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상태로 카미엘은 봐주지 않고 가볍게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단 한 번의, 우아한 날갯짓과도 같은 동작.

“크헉……!”

그 한 번에 시녀가 배가 꿰뚫려 절명해 버렸다.

아무리 암살자라고 해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사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카미엘은 심드렁하게 제 얼굴에 튄 피를 훔쳤다.

“카펫을 또 바꾸겠군.”

“전하!”

뒤늦게 소리를 들었는지 뛰어들어 오는 사람들에게, 카미엘은 간단히 명령했다.

“치워.”

“아, 알겠습니다. 한데 저 여자는……?”

“!”

아무래도 이번엔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뭐야.”

카미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 내 유리가 보여?”

“예, 예에?”

“유리가 보이냐고.”

무표정으로 카미엘이 되묻자, 기사는 뒤늦게 그의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가 봐.”

“예!”

기사들이 피 얼룩이 지고 있는 카펫째로 암살자의 시체를 둘둘 말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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