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82)

149화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워하며 계속해서 핏덩어리를 토해 내는 아이를 앞에 두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뭐라도, 시도라도 해 봐야 해.’

다행히 이곳은 실험실이었고, 책상을 뒤져 보다 서랍 속에서 날카로운 흑요석 나이프를 발견했다.

나는 나이프를 가지고 카미엘에게 다가갔다.

“전하. 전하?”

불러 봤지만 카미엘은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시가 급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나이프를 내 검지 첫마디에 대고 꾸욱 눌렀다. 날카로운 날이 살 속에 스며들며 피가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을 곧바로 카미엘의 입가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카미엘에게 당신의 피를 먹이려면 저항 포인트가 200P 필요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카미엘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윽?”

“삼켜요, 제발.”

손가락을 거의 목구멍 가까이 쑤셔 넣으며 말하자,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카미엘의 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우흑.”

괴롭게 몸부림치는 그를 보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손가락 끝을 쥐어짜며, 카미엘의 상태가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흐, 으윽…….”

새우처럼 구부러졌던 카미엘의 몸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숨을 잔뜩 몰아쉬고 있었으며, 이마며 목덜미가 온통 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심하게 구역질을 하며 피를 토하진 않았다.

‘……성공한 건가?’

나는 일단 피를 쥐어짜는 걸 그만두고, 카미엘의 손을 잡고 배라도 쓸어 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

‘정화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곧장 ‘Yes’를 선택했다. 그리고 곧장 정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8024

7909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기절하지 않을 만큼만 정화력을 남기고, 모든 힘을 카미엘에게 쏟아부었다.

내게서 강하게 피어오른 금빛 기운이 카미엘을 감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욱.”

카미엘이 곧장 다시 허리를 구푸리며 토악질을 했다.

이제까지와 달리 붉은 선혈이 아닌, 타르처럼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후드득 흘러나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게 용의 피구나……!’

“커헉.”

용의 피를 모조리 토해 낸 카미엘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옆으로 쓰러졌다.

“카미엘!”

나는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가 얼굴이며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흐으, 하아…….”

다행히 카미엘은 탈진하기는 했으나, 아까처럼 죽을 것 같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상태가 빠르게 안정되고 있어…….’

카미엘을 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2’ 달성률이 33% 상승합니다!

“넌…….”

카미엘이 힘겹게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대체 뭐야?”

“저는……”

내가 무어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당신은 더 이상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뭐?’

황당한 나머지 입을 벌렸으나, 공기 중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재빨리 내 몸을 내려다보니, 마치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손끝이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안, 안 돼.”

카미엘이 나를 향해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가지 마……!”

아무리 절박하게 손을 뻗어 봐도, 그 힘없는 손짓은 그대로 나를 통과해 버렸다.

“……!”

무어라 말이라도 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시간대를 조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나를 쓸어 가는 거대한 파도 같은 힘에 휩쓸려, 다시 한번 정신을 잃었다.

* * *

“…….”

다시 한번, 정신이 들었다.

몽롱하고 혼곤했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어 여기가 어디인지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었다.

‘일단 침대 위……인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일단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홱, 하고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내 몸에 올라타더니, 푹신한 침대 깊숙이 내 어깨를 찍어 눌렀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언뜻 반짝였다.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카미엘?’

“넌.”

귀 아래 경동맥이 지나가는 위치에 서늘한 날붙이가 와 닿았다.

“누구지?”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바로 ‘Yes’를 골랐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10155

5708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

카미엘이 어떻게 대응할 새도 없이, 내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전에 없던 현상이 일어났다. 내게서 일어난 황금빛 기운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짓을……!”

카미엘이 황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황금빛 기운이 그에게 스며들기 시작한 뒤였으니까.

“!”

‘아.’

황금빛 빛줄기에 드러난 카미엘은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과거구나.’

하긴, 아직 퀘스트를 다 달성하지도 못했는데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흐윽, 이게 무슨……?”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카미엘이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무너뜨렸다.

그 몸을 받쳐 주는 한편, 계속해서 정화력을 운용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뭔가 달라.’

뭔가…… 겉핥기식으로 정화를 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정화력이 좀 더 깊이 파고드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윽…….”

카미엘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시 몸을 떼어 냈다.

혼란스러워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도 어느새 내 정화력이 파고든 건지 표면에 황금빛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전에는 없던 일인데.’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카미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화력이 좀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신호인 걸까?’

황금빛 기운은 그의 동공 주변으로 원을 그리더니, 조금 전 내 주변에 떠올랐던 마법진과 같은 문양을 그의 눈동자 위에 그려내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에 황금빛이 깃드니 마치 용광로 안의 순금 같았다.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만큼 그랬다.

카미엘의 각인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 or No.

각인을 진행하지 않으면 정화를 할 수 없습니다.

‘뭐?’

각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화를 할 수 없다고?

‘정화를 못 하면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

이것도 선택지다운 선택지는 아니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각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Yes’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카미엘의 각인을 받아들입니다.

주의! 각인은 무르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려 주다니, 퍽이나 친절하기도 해라…….

아무튼 내가 ‘각인’이라는 걸 받아들이자마자, 카미엘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황금빛 마법진이 마치 그에게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5708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2’ 달성률이 33% 상승합니다!

나는 다시금 붉은빛으로 돌아온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좀…… 너무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우왓!”

카미엘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귓가에서 그가 물었다.

“……너야, 유리?”

“!”

나를 끌어안은 손이 어느새 벌벌 떨리고 있었다. 카미엘이 가까스로 내 뺨에 자기 얼굴을 부볐다. 애교를 부린다기보다 내 존재를 확인하는 듯한, 그런 절박한 접촉이었다.

“저기, 전하.”

“잠시만…….”

카미엘이 내 귓불 바로 아래, 조금 전 그가 칼을 들이댔던 그 장소에 입술을 붙였다.

“!”

숨결이 닿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이 살짝 튀어 오르고 말았다.

“……안 돼.”

그걸 내가 빠져나가려 하는 거라고 오해한 건지, 카미엘이 내 몸을 끌어안은 팔에 구속하듯 힘을 주었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확인하고 싶을 뿐이니까…….”

“뭐, 뭘요?”

“네가 진짜 산 사람인지 아닌지.”

잠시 그렇게 입술로 내 맥박을 잰 다음에야, 카미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살아 있군.”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카미엘이 갑작스럽게 나를 놓아주었다.

“전하?”

“…….”

밤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그 입술에 가늘게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생겼구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엄청난 희열이 작열하는 태양빛처럼 뜨겁게 끓고 있었다.

그가 내보이고 있는 어마어마한 감정에 압도되어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걱정하지 마. 여긴 그곳이 아니니까.”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끼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여긴 내 성이야.”

따라잡기 힘든 내용들을 연달아 말하면서, 카미엘이 휙 자세를 바꿨다.

‘엥?’

얼렁뚱땅 끌려간 끝에 정신을 차려 보니 그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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