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82)

148화

다행히 길은 외길로 되어 있었고, 출구로 추정되는 곳까지는 따로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래도 비밀스러운 시설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운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건 채 출구 쪽을 노려보았다.

‘경비병이 두 명.’

카미엘은 아까부터 품 안에 축 늘어져서 쌕쌕 숨만 내쉬고 있었다. 기절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기력이 쇠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타이밍을 잘 노려야 해.’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경비병들의 발바닥 쪽으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두 사람이 눈치챘을 무렵엔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당했……”

털썩!

경비병들이 그 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출구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올라가자 곧바로 정원으로 추정되는 공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잠깐만, 여긴…….’

눈에 익은 공간이었다.

‘……황가의 별장이잖아?’

거짓말 같았지만, 코끝에 실려 오는 바람결에 바다 냄새가 미약하게 섞여 있었다.

‘우리가 지냈던 그 별장 지하에 아까 그 실험실이 있었다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나를 품 안의 아이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다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든, 일단 여기를 나가서…… 나가서 하도록 하자.

그나마 여기가 황가의 별장이라서 다행인 건, 내가 이곳의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쪽은 후원인 것 같으니까…… 아마 저쪽에 고용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결심하고 내가 걸음을 옮기려 한 순간.

“!”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눈앞에 느껴졌다.

‘뭐, 뭐지?’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개입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Yes’를 선택했다.

과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저항 포인트(defy destiny point)가 필요합니다.

‘여덟 살 카미엘의 탈출’을 돕는 데 필요한 저항 포인트는 99,999P입니다.

“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숫자의 등장이었다.

현재 보유한 저항 포인트: 600P

> 경고! 저항 포인트가 부족하여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럼 여기서 포기해야 한단 말이야?

‘그럴 순 없어.’

나는 무작정 발로 보이지 않는 벽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좀, 비켜!’

하지만 몇 번이고 걷어차 봐도 보이지 않는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덟 살 카미엘의 탈출’을 돕는 데 필요한 저항 포인트는 99,999P입니다.

경고! 저항 포인트가 부족하여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걷어찰 때마다 냉정한 시스템 메시지만이 반복적으로 출력될 뿐이었다.

“……못 나가는 거구나.”

한동안 내가 그러는 걸 지켜보던 카미엘이 말했다.

그 조용한 목소리에 담긴 체념과 절망이 내 마음마저 쿵 떨어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혹시 나는 나가지 못해도 카미엘 혼자라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력이 쇠해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어린 카미엘의 무게를 느끼며 생각했다.

과연 이 아이가 나 없이 여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불가능하겠지.’

한 발짝도 걷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내몰아 봤자, 얼마 가지 못해 붙잡히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번 탈출 시도 때문에 지금까지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전하.”

하지만 어떻게?

이 아이에게 어떻게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희망 고문이란 말인가?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카미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 바다가 있어?”

“네?”

“파도 소리가…… 들려.”

그 말대로였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댔을 때처럼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카미엘이 한숨처럼 말했다.

“다시는…….”

“…….”

“이런 소리……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어.”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게 울컥 치받치는 기분이었다.

어린 카미엘은 마치 그걸로 다 됐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전하, 제가……”

“됐어.”

“…….”

“이걸로 충분해…….”

어린 카미엘의 말끝이 울음에 젖어 있었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충분할 리가 없었다. 이걸로 괜찮을 리가 없었다.

“너, 이름이 뭐야?”

카미엘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미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려면 저항 포인트가 200P 필요합니다. 이름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유리. 유리예요, 전하.”

대답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내가 여기로 오기 전에 카미엘을 좀 더 열심히 정화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정화를 권유하는 메시지가 떠오를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No’를 선택했던 스스로를 떠올리자, 목구멍이 뚜껑 같은 걸로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돼.”

“…….”

“네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날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걸 들키면.”

괜찮을 거라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나보다도 카미엘이 더 험한 꼴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카미엘을 안고 실험실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와중에 얻은 수확이라곤,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카미엘도 내게 안겨 있을 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정도뿐이었다.

‘잘됐어.’

적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어린 카미엘의 옆을 지킬 수는 있게 됐다.

저항할 기력을 잃은 동물원의 맹수처럼, 카미엘은 스스로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카미엘이 물었다.

“안 가?”

어서 썩 꺼지라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안 가도 괜찮냐’는 말에 가까웠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에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 줄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 카미엘은 자그마한 희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카미엘의 자그만 손을 붙잡았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아까는 깊이 생각을 못 했지만, 이것도 걱정이네.’

카미엘을 정화해야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데, 정화를 할 수 없다니.

‘어째서일까?’

생각에 빠진 내 손에 자그마한 온기가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 보니 카미엘이 눈치를 보며 내 손에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내가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여기가 과거라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탈출해서 내가 아는 로엔 대공 카미엘이 되긴 하는 거겠지?

조심스럽게 그런 추측을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쿨럭!”

카미엘이 몸을 옹송그리며 갑자기 기침을 토해 냈다.

“전하!”

재채기 정도가 아니었다. 폐부 깊은 곳을 쥐어짜는 듯한 그런 깊은 기침이었다.

“욱, 우으…….”

“전하, 전하!”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숨을 못 쉬는 사람처럼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지다 못해 보랏빛이 되려는 걸 보고, 나는 급하게 책장에 다시 돌려 둔 열쇠를 찾으러 달려갔다.

“으흑……!”

괴로운 소리와 함께 마침내 카미엘이 핏덩어리 같은 것을 토해 냈다. 그와 함께 입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미엘!”

“괜, 찮…….”

“이게 어딜 봐서 괜찮은 건데요!”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카미엘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피를 쏟아 내는 걸 보니 덜컥 두려워졌다.

‘내가 과거에 개입할 수 있다고 했지.’

혹시 나 때문에 일이 더 안 좋게 흘러가는 건 아닐까?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카미엘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피를…… 마신 날은, 원래 이래…….”

“피를 마셨다고요?”

그 말에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용혈(龍血)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피실험자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으며…….

분명히 용혈, 용의 피를 주입했다고 말했다.

‘생각해야 해.’

굳어 버린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용의 피를 마시면 왜 저렇게 되는 걸까?’

그건 용이 마물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냥 마물의 피도 인간에게는 독이 되는데, 마물의 왕이라는 용의 피를 마셨으니 속이 무사할 리가 없다.

‘마물의 피는…… 분명 정화할 수 있어.’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다시 카미엘의 손을 잡았다. 카미엘이 내 손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몸을 옹송그렸다.

‘부디!’

나는 식은땀에 젖은 카미엘의 이마를 바라보며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력감이 들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카미엘은 여전히 괴로워하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피…… 피를 마셨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마물의 피에 대해서 분명 언젠가 엘리야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명은 피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몸 안을 순환하는 마나가 혈류를 따라 흐르며 심장을 감싸는 것도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는 각 개체의 고유한 마나와 생명력을 담고 있게 마련인 겁니다.”

“마물의 피가 인간에게 위험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피 속에 각 개체의 고유한 마나와 생명력이 담기기 마련이라면.

‘혹시?’

내 피에는 정화력이 담겨 있지 않을까?

‘어쩌면…… 피를 통해 정화력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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