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저항 포인트?
‘운명을 거스른다고?’
시스템 메시지는 내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기계적으로 결과값을 출력할 뿐이었다.
여태까지 카미엘 시 로엔을 정화하려 시도한 횟수: 6회
600 저항 포인트가 적립됩니다.
적립된 저항 포인트를 사용하여 과거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
조금 전 여러 차례 떠올랐던 메시지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분명 난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저 저항 포인트라는 걸 소모해서 과거에 개입하는 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일단 숙지해 두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과거에 개입하는 게 아니었다.
‘우선 카미엘을 찾아야 해.’
카미엘을 찾아서 정화에 성공할 시 퀘스트 달성률이 증가한다고 했으니까.
‘근데 여기서 대체 어떻게 카미엘을 찾지?’
분명 여긴 과거일 텐데. 나는 그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물론, 조금 전에 본 그 장면은 기억이 나지만…… 그게 카미엘을 찾을 힌트가 되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응?’
바로 그때.
‘어디서 비린내 같은 게 나는데…….’
생선 비린내와는 다른 종류의 비릿한 냄새였다. 나는 분명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피 냄새야.’
피 냄새를 맡은 순간, 조금 전 보았던 철창 안 카미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엉망’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모습이.
‘설마, 여기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짚이는 데도 없었다. 나는 일단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는 쪽으로 가 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내 모습은 여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일단 서두르자.
나는 걸음을 재촉해서 통로 안쪽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람의 흐름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제대로 사람의 손으로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보게 될 광경에 대해 각오가 좀 필요할 것 같았다.
도착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통로가 꺾어지는 곳을 한 번 돌자, 환하게 빛나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불이 켜져 있는 공간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뎌 보았다. 방 안은 마치 엘리야의 연구실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책상에는 정체 모를 액체를 담은 병들과 실험 도구들로 추정되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고, 두루마리 같은 것들이 여러 개 펼쳐져 있었다.
‘어디…….’
나도 모르게 그 두루마리에 시선이 갔다.
-……용혈(龍血)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피실험자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으며…….
‘용혈이라면, 용의 피?’
그걸 사람한테 주입할 수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릇을 만드는 것은 한 번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적인 시련과 고통만이 그릇을 넓혀 가는 과정이 되어 줄 뿐이다…….
……비명을 지르는 피실험자의 손톱을 뽑았으나, 피실험자는 손톱이 뽑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으며…….
‘…….’
두루마리에는 그 외에도 고문 기록이나 다름없는 내용들이 줄줄이 기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저거 핏자국 맞지?’
갈색으로 말라붙은 얼룩을 꺼림칙하게 바라보았다.
그 뒤로 몇 줄을 더 읽어 봤지만, 잔인한 내용이 반복될 뿐 특별한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정신 나간 두루마리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가까이 있고 싶지조차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카미엘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이 미치광이 마법사의 실험실이 카미엘과 관련이 있다는 건 거의 분명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
테이블 너머 안쪽에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무리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과거라지만, 이런 공간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뭐든 빨리 끝내자. 그리고 돌아가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문 안쪽은…….
‘!’
예의 그 아래쪽에 바퀴가 달린 짐승 우리가 놓여 있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충분한 빛이 있던 실험실과 달리, 이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나는 문을 충분히 열어 둔 다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철컹!
“!”
우리 안쪽에서 피범벅이 된 손이 튀어나와 창살을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실험실의 차가운 흰 빛을 받아 반짝였다.
“……, …….”
그르르르 끓는 소리와 함께 피익피익 새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익숙한 빛으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망연하게 서 있었다.
“……전하?”
그렇게 부른 순간, 창살을 잡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전하!”
핏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지는 손짓이 끔찍했다. 나는 얼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하, 정신 차리세요!”
“날…….”
씨익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드디어 말이라고 할 만한 소리가 샜다.
“날, 여기서…….”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형형한 눈빛을 하고 속삭였다.
“꺼내, 당장…….”
“그, 그럴게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서려고 한 순간…….
덜커덩!
다시금 철창이 흔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완전히 겁에 질린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두고, 가지……”
“안 두고 가요!”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철장 앞으로 다가갔다. 불신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으로 뒤섞인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그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전하, 전 안 도망가요. 일단 여기를 열 열쇠를 찾으러 가려고 했을 뿐이에요.”
“…….”
“잠깐만 여기 계셔야 해요. 문은 열어 두고 갈게요. 괜찮으시겠어요?”
“…….”
마침내 소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게요.”
다행히 열쇠는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나는 실험실 책장에 놓여 있던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돌아와, 정신없이 우리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자 안에서 카미엘이 — 적어도 그로 추정되는 소년이 — 손을 내밀었다.
“내놔……!”
“제가 열게요. 밖에서 여는 게 더 편하잖아요.”
“…….”
카미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잔뜩 노려보았다. 나는 설명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재빨리 열쇠를 잡히는 대로 구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한 두어 번쯤 시도하자, 카미엘의 눈에서 의심이 약간 엷어졌다.
그리고 네 번쯤 시도했을 때.
찰칵.
“됐다!”
나는 서둘러 열쇠를 돌렸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우리가 열렸다.
소리를 듣자마자 카미엘은 문밖으로 손을 더듬거렸지만, 성급한 몸짓 탓에 창살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전하!”
“비, 켜…….”
카미엘이 나를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나는 금방 위화감을 눈치챘다.
카미엘의 눈이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약간 어긋난 곳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설마…… 눈이 안 보이세요?”
“…….”
카미엘의 작은 몸이 움찔했다. 곧이어 그는 기를 쓰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까 빛에 반응했던 걸 보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확하게 사물을 분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비켜, 여길, 나가야 해…….”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체력이 다한 듯, 카미엘이 앞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전하!”
나는 카미엘을 받쳐 안으면서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인기척은 없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
연이어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미엘만은 정화가 가능했는데, 왜 갑자기 정화가 불가능해진 거지?
‘설마 이 애, 카미엘이 아닌 건가?’
나는 재빨리 품에 안기다시피 한 아이를 살펴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금발, 붉은 눈동자. 아무리 봐도 카미엘이 맞았다.
‘큰일인데.’
퀘스트 달성 조건은 분명 ‘카미엘을 정화할 것’이었다. 정화가 되지 않는다는 건 큰 문제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남은 흔적으로 볼 때, 용의 피를 주입받은 실험체라는 건 바로 카미엘을 말하는 것 같아.’
읽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던 실험 기록들을 떠올리며, 나는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황제의 짓일까?’
일단 여기서 카미엘을 빼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계속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카미엘이 나를 볼 수 있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기절하기 직전인 것 같은 카미엘을 조심스럽게 일깨웠다.
“전하, 정신을 좀 차려 보세요.”
“……, …….”
카미엘이 눈에 힘을 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지금부터 여길 벗어날 거예요. 협조해 주실 수 있나요?”
“…….”
카미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협조하시는 걸로 알게요.”라고 대답하고 그에게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무슨!”
갑자기 번쩍 안아 올리자 카미엘이 작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조금만 참으세요.”
카미엘을 안고 실험실 밖으로 나가면서도,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대로 어디로 가야 탈출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카미엘을 정화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과거에 개입하고 있는 거라면, 저항 포인트를 사용하게 될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일단 카미엘을 안고 내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