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82)

146화

18. 카미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끄응…….’

뺨에서 차가운 돌바닥에 짓눌린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감각은 천천히 온몸으로 확장되었다.

전신을 얻어맞은 것 같은 탈진 상태에서, 나는 가늘게 눈을 떴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빛과, 그 빛 아래 놓여 있는 제단이었다.

‘……제단?’

대체 여긴 어디인 거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관절이 곡소리를 냈다.

“윽.”

절로 긴 신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여기는 내가 마음 놓고 아파해도 좋은 공간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굴……?’

아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공간은 결코 아니었다.

겉모습은 얼핏 동굴인 것처럼 보였지만 습기가 전혀 없었고, 게다가 정중앙에 놓여 있는 저 제단과 정확히 제단 위를 비추고 있는 조명까지.

아무리 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공간이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

내가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

“!”

뒤를 돌아보니 이 커다란 공동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그럴싸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저 제단 뒤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어허. 어서 들어가지 못하겠느냐?”

“형님, 제발…….”

“에이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들어가라고.”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거절할 수 없는 위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

마침내 동굴 안으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저는…….”

안경을 쓴 문인 같은 남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으로 떠밀려 오고 있었고.

“쉬이. 이곳에선 조용히 해야 한다. 내가 두말하게 만들지 말거라.”

‘어?’

칼을 빼어 든 두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등장한 사람을 보고, 나는 두 눈을 의심할 뻔했다.

‘황제?’

금발에 금안. 멀끔하니 잘생긴 얼굴. 그 얼굴은 분명 내가 기억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지만…….

‘왠지 좀 더 어려 보이는데.’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형님, 대체 여기는……?”

“제실(祭室)이다.”

두 남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바로 그때.

“잠깐, 이 문양은……!”

공동 안을 둘러보던 안경을 쓴 남자가 갑자기 경악하여 외쳤다.

“형님, 설마 여기는!”

“쉿.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황제 — 턱없이 젊어 보였지만, 일단 목소리며 생김새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으므로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했다 — 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여기는 그분을 모신 곳이다. 정숙하거라.”

“그분이라니, 이건……!”

여태까지 겁에 질려 있던 남자가 벌컥 화를 내려 하였으나, 그 순간 기사들이 그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윽…….”

황제가 여유롭게 손짓하자, 기사들이 검을 도로 내렸다.

황제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제단 위로 올라가라, 에이론.”

“…….”

안경을 쓴 남자, 에이론이 상황을 파악하듯 눈을 굴렸다. 곧 그가 단단히 결심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따를 수 없습니다, 형님.”

“따를 수 없다고?”

“예, 형님. 저는 분명 제 아들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곳에 데려와 제단 위로 올라가라고 하시다니요? 게다가 이곳은……”

“따르지 않겠다니, 별수 없겠구나. 여봐라.”

“……?”

황제가 뒤쪽 통로를 향해 명령했다.

“아이를 데려오라.”

“!”

에이론의 눈동자가 커졌다.

잠시 후, 뒤쪽 통로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을 끌어오는 소리가 덜컹덜컹 들렸다.

‘!’

짐승을 가두는 우리에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 안에는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에이론이 경악해서 외쳤다.

“내 아들!”

그가 철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한 순간, 황제가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 두 명이 그를 여유롭게 막아 냈다.

에이론이 피 맺힌 고함을 질러 댔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형님-!”

“나는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에이론.”

“……!”

에이론의 턱이 덜덜 떨렸다. 겁이 난 것 같기도 했고 무참히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해.’

철장 안의 아이, 그의 아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한 아이의 온몸을 채찍으로 후려갈긴 듯, 갈기갈기 찢어진 옷 틈새로 보이는 살갗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피와 고름에 젖은 옷이 상처에 그대로 달라붙어 있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황제가 여유롭게 물었다.

“아이를 살리고 싶으냐, 에이론?”

“그 무슨……!”

“제단으로 올라가라.”

“…….”

나는 이를 악문 에이론의 눈에 핏발이 터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에이론은 무시무시하게 분노하고 있었지만,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황제는 여유롭기만 했다.

“아이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제단으로 올라가라고, 말했다.”

“큭……!”

결국 압박에 진 에이론이 제 발로 제단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 좋아.’

무릎을 꿇으라는 것도 아니고 제단에 올라가라고?

‘게다가 저 남자, 황제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어.’

황제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남자라면…… 설마……?

나는 철창 안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피에 젖어 있어 금발이 정확히 어떤 색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려웠지만…….

“카미엘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그건 네가 내게 빌어야 할 일이지 명령할 일이 아니란다, 에이론. 내 동생아.”

‘카미엘이라고?’

저 아이가?

나는 우두커니 서서 충격에 잠겼다. 그럼 에이론은…….

‘선대 로엔 대공이구나!’

반쯤 시체가 된 조카와, 새파랗게 질린 동생을 두고 황제는 여유롭기만 했다.

“너도, 이 아이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분을 위한 제물이 되는 일이니 말이다.”

“제물이라니, 설마……!”

황제는 대답 대신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서 칼을 넘겨받았다.

“형님!”

기사들이 달려들어 에이론을 제단 위에 짓눌렀다.

“형님, 설마, 무슨 짓을……!”

“얌전히 있거라, 에이시스 로날드 카시스 로엔. 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큭……!”

황제가 에이론의 목, 경동맥이 뛰고 있는 곳으로 비수를 가져다 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철창 안의 아이가 눈을 떴다.

“카미엘!”

에이론이 소리쳤다.

“형님, 그만두십시오. 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제발, 최소한 아이라도 다른 곳에…… 형님!”

선대 로엔 대공의 절규에, 나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고.

나는 재빨리 몸에서 마나를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개의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윽. 뭐야……!’

그와 동시에 사지에 보이지 않는 추를 매단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그때.

느껴지는구나…… 이질적인 존재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도사리고 있었던 목소리.

여러 종류의 악의와, 오랜 시간이 뒤섞인 광기로 가득 찬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뭐지?’

‘그 존재’가 당신을 발견합니다.

당신은 이 과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시간대를 조정합니다…….

‘뭐야, 대체 뭐냐고!’

아무리 속으로 외쳐 보아도, 절로 감기는 눈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시야가 빠르게 암전되었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흐윽.”

다음 순간, 정신이 들었다.

‘카미엘!’

나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어?’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긴 아까 그 장소도 아니잖아?’

현재 나는 어두운 통로 안에 서 있었다.

점점이 빛이 이어져 있긴 하지만, 바닥과 벽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을 뿐.

창문도, 문도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아 마치 굴처럼 보이는 통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기가 막히고 멍해져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막막해지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2’ 발생!

당신은 갑작스러운 마법 충돌에 의한 사고로 인해 카미엘의 과거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뭐?’

카미엘의 과거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내가 멍하니 있을 시간을 주지 않고 연이어 반짝일 뿐이었다.

카미엘을 찾아 정화에 성공할 시 퀘스트 달성률이 증가합니다.

퀘스트에 성공할 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카미엘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 목표 달성률이 30% 오릅니다.

실패할 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퀘스트에 실패할 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야?

본능적으로 조금 전 장면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퀘스트에 실패하면,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는 과거 속에 남겨지게 되는 건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심지어 시스템은 이제까지와 달리 내 의사를 묻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면서!’

나는 일단 ‘Yes’를 선택했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2’를 수락합니다.

저항 포인트(defy destiny point)를 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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