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82)

145화

“대공 전하……!”

균열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아래에서, 엘레니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당신이 여길!”

“글쎄, 어떻게일까?”

카미엘이 여유롭게 중얼거리며 내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곧 얕게 혀를 차며 말했다.

“어지간한 놈이 나올 것 같진 않은데. 공녀.”

“네?”

“혹시 정화력을 사용해서 균열을 줄여 볼 수는 없나?”

“균열을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카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이 충분히 벌어지지 않으면 이쪽으로 완전히 현신할 수 없으니까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할진 모르겠는데…… 한번 시도는 해 볼게요.”

“뭐, 실패해도 괜찮긴 해.”

카미엘이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엘레니를 검 끝으로 휙 겨누며 말했다.

“비록 공녀네 집이 좀 심하게 무너지긴 하겠지만, 죽여 버리면 그만이잖아.”

“반드시 성공해 볼게요.”

우리 집이 이 이상 무너진다니, 안 돼!

나는 마물의 형상이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벌어지고 있는 균열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일단 메시지가 뜨긴 떴는데, 이게 과연 균열에 영향을 줄까……?

반신반의하면서 나는 균열을 향해 정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

균열이 벌어지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마침내 확장을 멈추었다.

‘이게 되네?’

얼떨떨한 내게 카미엘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잘하는데!”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엘레니가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지만, 카미엘은 무심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균열은 균열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성찬들이로구나.

마물의 목소리가 이쪽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리려는 힘도 더 거세져서, 나는 부득이하게 투입하는 정화력의 양을 늘려야 했다.

균열 너머에서 마물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성가신 인간이 있군…….

휘리릭!

균열 안쪽에서 채찍 같은 촉수들이 이쪽을 향해 뻗어 오기 시작했다!

“읏……!”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꾸나, 작은 인간아.

내가 안간힘을 써서 틀어막고 있는 균열을 벌리며 넘어온 촉수 다발들이 이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릭스가 옆으로 산개하며 오러를 내뿜기 시작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를 내며 촉수들이 잘려 나갔다. 반대편에서는 엘리야의 빙결 마법에 당한 촉수가 얼어붙어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촉수 두세 가닥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안 되지.”

카미엘이 오러를 내뿜는 검을 마치 방패처럼 앞에 쿵, 내리꽂았다!

그와 동시에 오러가 검뿐만이 아니라 카미엘의 온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게 가능한 건가?

크으으윽.

결국 마물의 촉수 다발은 이쪽에 닿지 못하고 카미엘의 오러에 밀려 믹서기에 갈리듯이 갈가리 찢어져 나갔다.

‘으왁……!’

검은 핏방울과 살점이 비산했다. 카미엘이 막아 준 덕분에 나는 괜찮았고, 엘리야도 마법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칼릭스는 어쩔 수 없이 피를 조금 뒤집어쓰고 말았다.

“으, 로엔 대공!”

칼릭스가 질색을 했다. 하지만 카미엘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보자꾸나!

잘린 촉수는 극히 일부분인 듯, 다시 균열에서 촉수 다발이 꾸물꾸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무언가 거무튀튀한 액체를 쏘아 보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

직감적으로 저기에 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나는 균열을 막는 데 쏟아붓던 정화력을 재빨리 흩었다.

정화력을 사용하여 결계(中)를 칩니다.

???의 산성 독액을 막아 냅니다!

촤아아악!

결계에 막혀 우리에게 닿지 못한 독액이 안 그래도 부서진 집 안을 녹여 버리기 시작했다.

“유리 엘로즈……!”

엘레니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칼릭스가 외쳤다.

“정신 차려, 엘레니 로잔헤이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입 닥쳐!”

엘레니가 소리친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결계를 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균열이 조금 더 벌어졌다.

마물이 이제까지보다 더욱 많은 촉수 다발과 함께 제 머리를 빼내며 다물린 틈새를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어딜!”

엘리야와 칼릭스, 카미엘이 촉수 다발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다시금 결계를 거두고 균열을 막는 데 집중했다.

찢어지던 균열이 다시금 좁아지기 시작하자, 반쯤 빠져나온 마물이 균열 안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안 되겠구나.

“?”

“꺄아악!”

마물의 촉수 한 가닥이, 균열 바로 앞에 서 있던 엘레니를 휘감았다.

“무, 무슨 짓이야……! 나는, 널 부른……!”

알고 있다.

마물의 하나뿐인 붉은 눈이 웃듯이 가늘어졌다.

네가 나를 부른 목적을 이루어 줄 테니…….

나는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외쳤다.

“안 돼! 막아요!”

가장 먼저 끈질기게 구는 촉수를 베어 내는 데 성공한 카미엘이 엘레니를 잡고 있는 촉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엘레니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가 잘린 촉수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어느새 균열을 넘어온 촉수 두 개가 카미엘을 공격하는 바람에, 그는 공격을 포기하고 재빨리 몸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제물이 되어라, 인간.

“안, 안 돼……! 나를 놔 줘!”

엘레니가 비명을 질렀지만, 마물은 뾰족한 촉수 끝으로 그녀의 몸을 푹, 꿰뚫었다.

“아, 아악…….”

“엘레니-!”

칼릭스가 외쳤다.

달고 맛있구나. 역시 타락한 인간이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엘레니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허망한 최후였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은 듯 굼실거리면서, 촉수가 몸을 일으켰다.

“이, 마물이……!”

눈앞에서 동생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칼릭스가 몸에서 엄청난 살기와 함께 대량의 오러를 발산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공녀.”

카미엘이 말했다.

“내가 저 촉수를 한 번에 다 잘라 낼 테니까, 바로 그때 균열을 닫아 버릴 수 있겠어?”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해 볼게요.”

“좋아.”

마구잡이로 촉수에게 덤벼든 칼릭스가 한 번에 세 개의 촉수를 잘라 내는 기염을 토했다.

엘리야가 그런 칼릭스를 향해 쇄도하는 촉수 두 개를 격파하면서, 남은 촉수는 대여섯 개 남짓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잘라 버린 단면에서 촉수가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막을 수 없을 거다, 인간.

즐거운 듯이 촉수를 뻗치려는 마물을 향해, 카미엘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그건 해 봐야 알 일이지.”

그와 동시에, 카미엘의 전신에서 세찬 기세로 오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뭐, 뭐지?’

예전에도 무위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크윽!

공기 중을 짓누르는 엄청난 힘의 파동에 놀란 듯, 마물이 멈칫한 순간.

카미엘이 웃었다.

“잘 가.”

일격(一擊).

단 한 번의 공격이 이쪽으로 넘어온 모든 촉수를 끊어 냈다.

크아아아악……!

아무리 마물이라도 단번에 열 개 이상의 촉수가 끊어지는 건 고통스러웠는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카미엘이 외쳤다.

“지금이야, 공녀!”

“하고 있어요!”

나는 남은 정화력을 모두 쏟아부어, 균열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가만둘까 보냐……!

‘정화력을 무식하게 퍼붓기만 해선 안 돼!’

대량의 힘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정신을 차리기란 힘든 일이었지만, 해내야 했다. 카미엘이 만들어 준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었다.

나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균열의 양 끝을 마치 실로 봉합하듯이 정화력을 컨트롤했다.

놀랍구나, 이 힘은……!

정답이었던 건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로 균열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사라져 가는 균열 안쪽에서, 마물이 기괴하게 웃는 소리가 울렸다.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

그와 동시에, 균열이 다시 크기를 벌리기 시작했다.

“젠장, 제발 좀……!”

내가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 같은 인간을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마나의 흐름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눈앞이 새하얗게 물든 뒤였으니까.

“공녀!”

“누님!”

“유리!”

세 사람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가자꾸나.

마물이 일으킨 힘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순순히 딸려 갈 줄 알아……?”

나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화력과 마력을 동시에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반 이상 마물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에 휘말린 뒤였다.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나는 최대한 적은 힘을 지렛대처럼 사용해서, 마물의 마법을 비틀기 시작했다.

재기가 뛰어나구나. 좋다. 이쪽으로 데려올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지.

“공녀!”

불길한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카미엘이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닿지 않을 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

찰나의 순간, 손끝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치챘다.

카미엘이 발산한 마력이 이쪽의 흐름에 섞여 들고 있었다.

마치 마법사가 하는 것처럼, 카미엘의 마력이 마물의 마법에 스며들고 있었다.

뒤늦게 엘리야도 무언가 마법을 전개하는지 마법진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때가 너무 늦었다. 마물의 마법은 이미 완성된 후였으니까.

잘 가거라.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거대한 흐름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의식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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