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 *
누군가 내 진명을 훔치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당장 공작저로 텔레포트를 했다.
“괜찮은 겁니까?”
“네,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엘리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 아마도 엘레니겠지만 — 내 진명을 훔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대마법사는 든든한 전력이 되어 줄 터였다.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나와 연결된 마나석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엘리야가 코랄 제도의 하이 마켓에서 내게 선물한 마나석. 현재 이 마법에는 내 진명을 지킬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메커니즘은 간단했다. 이 세상에서 내 진명을 아는 건 나와 내 아버지뿐이다.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답을 헤집어 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 사람의 정신을 조작하는 것.’
이 마나석에는 인식된 사람이 정신 조작 계열 마법에 걸릴 때 그를 방어하는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기능이 첨부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정신이 침투당할 때는 내게, 내 정신이 침투당할 때는 아버지에게 신호가 가는 식이었다.
‘마나석에 아버지를 인식시킬 때만 해도 이게 필요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일단 아버지에게 향해야 할 때였다.
“안 되겠습니다. 이쪽으로 와요.”
“앗.”
엘리야가 비틀거리는 나를 아예 안아 올렸다.
“공녀님!”
우리 둘을 발견한 집사가 혼비백산해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공작저의 2층, 정확히는 이스트 윙 쪽에서 어마어마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엘리야가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나는 말했다.
“아버지의 집무실 쪽이에요. 저쪽!”
그는 내 말에 즉각 반응했다. 다음 순간, 엘리야의 텔레포트 마법이 우리를 집무실 앞으로 옮겨 놓았다.
거대한 마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장소, 아버지의 집무실은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엘레니!”
엘레니가 기절해서 쓰러진 아버지를 향해 번쩍이는 무언가를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단도였다.
그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나는 마법을 발동했다.
“꺄악!”
내게서 인 거센 바람이 엘레니를 밀쳐 냈다. 엘레니의 손에서 단도가 챙그랑, 하고 떨어졌다.
동시에 나를 내려놓은 엘리야가 손가락을 튕기자, 단검이 멀리 튕겨 나갔다.
“유리 엘로즈……!”
엘레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흉악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해 둔 거지!”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이이익, 이것 놔……!”
엘레니가 몸을 비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엘리야가 포박 마법으로 그녀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결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하! 어처구니가 없네.”
엘레니가 바짝 독이 올라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저 기절한 아버지를 발견했을 뿐이야!”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거짓말을 시도하다니.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목을 칼로 겨눈 거고?”
“사람 모함하지 마.”
“내 눈으로 봤어.”
“그래? 그걸 대체 몇 명이나 믿을 것 같은데?”
“나도 있다는 잊지 마십시오, 엘레니 로잔헤이어 공녀.”
엘리야가 나직하게 현실을 일깨웠다. 그제야 엘레니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최소한의 현실을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아버지에게 정신 조작 마법을 시도한 거지?”
“…….”
“보통의 정신 조작 마법이라면 시도한 사람이 나자빠졌을 거야. 아버지에게는 7서클에 해당하는 방어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까.”
“역시 네년이……!”
엘레니가 증오스럽다는 듯 이를 갈았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 내 진명을 알아내려고 한 거지?”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부러 질문을 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뒤에 칼릭스가 도착해 있었으니까.
“누님, 지금 이게 무슨……”
“엘레니 로잔헤이어, 대답해.”
나는 칼릭스를 무시하고 엘레니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 진명을 알아내려고, 아버지에게 정신 조작 마법까지 시도한 거지?”
“!”
내 옆으로 다가온 칼릭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엘레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니는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칼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레니, 너 정말로……”
“그렇게까지 내가 부러웠니?”
나는 일부러 엘레니를 자극할 만한 말을 골랐다.
“내 진명을 알아내서 나를 죽여 버려야 할 정도로?”
“헛소리 마!”
엘레니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누가 네까짓 걸 부러워한다는 거지? 내가? 너를?”
“…….”
“넌 그 자리를 가질 자격이 없어! 모든 건 네가 정화력이라는 힘을 가졌기 때문일 뿐이잖아! 그건 반칙이야!”
엘레니가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그녀가 숨을 씨근거리며 내뱉었다.
“그 정화력이 제대로 나를 찾아왔더라면, 네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유리 엘로즈!”
“…….”
“나는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거야! 너 따위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알아들었어?”
바로 그때였다.
쫘악!
“악!”
거세게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와 함께, 엘레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엘레니, 네가…….”
칼릭스였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넌……”
“내가 미쳤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분노해서 날뛰는 엘레니를 막을 수 없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네가 더러운 배신자인 거겠지, 칼릭스! 그렇게 저년을 경멸하는 척하더니……!”
“엘레니 로잔헤이어!”
“입 닥쳐!”
“유리.”
“네?”
엘리야가 나를 불렀다.
“침착하고 정신을 집중해 봐요.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류가 멈추질 않아.’
분명히 엘레니를 제압했는데, 방 안의 마류는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사납게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엘레니가 비웃음을 지었다.
“깨달아 봤자 늦었어.”
퉤, 하고 엘레니가 피 섞인 침을 뱉어 낸 순간.
키이이잉.
날카로운 이명이 내 귀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한 거대하고 거친 마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감지됩니다!
‘균열’의 흐름이 거세집니다!
‘균열’ 너머에서 미지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설마, 엘레니!’
이 애가 설마 자기 힘으로 균열을 연 건가?
‘말도 안 돼……!’
“엘리야!”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그가 분명 말했는데!
하지만 공간에 거대한 금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침착하십시오.”
“…….”
“우선 벌어지고 있는 일을 수습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판단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늦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기절한 아버지를 둘러업고 이쪽으로 돌아왔다. 다음 순간, 엘레니가 엘리야의 포박술을 부수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괜찮아.”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그녀는 마치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너도, 나도, 여기서 다 죽어 버리면 돼.”
키이이이잉-!
공간이 찢어지면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지금 이곳으로 출몰하려는 마수는…….
‘재앙급.’
등장만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거나, 지형지물을 바꿀 수도 있는 힘을 가진 마물이었다.
“물러서요.”
엘리야가 나를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칼릭스 역시 아버지의 집무실에 걸려 있던 검 중 하나를 챙겨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와자작, 와자작.
공간이 찢어지며 주변을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건물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람들이 나타나 비명을 질렀다.
나는 외쳤다.
“당장 여길 나가서 모두를 대피시켜!”
하지만 대부분은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뿐이었다. 내 지시를 따라 이곳을 벗어난 건 아주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제기랄.’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찢어지려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게 레비아탄 정도 되는 마물이라면?
‘완전히 현신하기 전에 끝장내야 하는데.’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최악. 전력도 충분한지 어떤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레비아탄의 경우를 생각하면 좀 부족할 것 같긴 한데…….’
만약에 저 마물이 완전하게 현신한다면, 수도엔 이제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재앙이 덮치는 셈이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이고, 재수 없으면 그중 하나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약해지면 안 돼.’
지금은 비관적인 상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모든 정화력을 털어 넣어서라도.’
엘레니가 벌이고 있는 이 미친 짓을 멈춰야만 했다.
그렇게 각오하고 내가 태세를 갖춘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와 봤더니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목소리.
나는 곧 균열이 열린 거란 사실도 깜빡 잊고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반파된 천장 위에서 한 사람이 훌쩍 뛰어내렸다.
마치 고양잇과 맹수처럼 소리 없이 이곳에 내려앉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나부꼈다.
“……카미엘?”
“잘 지내고 있었어, 공녀?”
카미엘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잘 지내고 있는 걸로 보이는 건 아니죠……?”
“하하, 좀 그래 보이긴 하네.”
재앙급 마물이 우리 집을 부수고 나타나기 직전인 상황을 ‘좀 그래 보인다’고 퉁 치는 남자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만큼 든든하기도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카미엘은 손에 검을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든 최종 보스가 내 편이라는 것만큼 든든한 게 또 있을까?’
어쨌든, 이제 카미엘까지 포함해서 이쪽의 전력에는 오러 마스터가 포함되었다. 이로서 레비아탄을 상대할 때와 전력에 차이가 없는 상황이 됐다.
‘좋아. 해 볼 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