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182)

142화

* * *

“……남자 손을 이렇게 덥석덥석 잡아도 됩니까?”

“어머나, 남자이기 이전에 스승님이신 거 아니었어요?”

동그랗게 뜬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놀리는 듯이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 말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다.

남자가 아니라, 스승님.

엘리야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찰나의 느낌을 기억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스승님이라고 인정해 주는 말을 들었는데 대체 왜 기분이 나쁜 건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대체 유리 엘로즈의 무엇이 되고 싶은 거지?’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다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고, 따라서 그 질문은 엘리야의 근본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무엇이 되고 싶을 만큼, 그녀는 특별한가?

‘특별하지.’

그조차도 놀랄 만큼 망설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한 번도 누군가를 들여 본 적 없는 엘리야의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사람.

시작은 불유쾌한 사고였다고 하나, 이제 와서는 이런 인연이 없었을 때를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스며든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졌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리 엘로즈를 잃어버린 것이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이 이리저리 제멋대로 낙서해 놓은 것 같은 혼란스러운 현장 속을 거닐다가, 엘리야는 문득 생각했다.

‘목소리가 들려오질 않아.’

조잘조잘 이것저것을 떠들던, 듣기 나쁘지 않은 목소리.

유리는 자신이 마탑주라는 사실에도 그다지 기가 죽지 않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꾸를 하더라도 기분 상하지 않고 맞받아쳐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평생을 혼자 지내 왔고, 혼자라는 사실에 상처받는 일도 없었던 엘리야는 유리와 함께 있을 때면 유독 말이 많아지곤 했다.

오늘도 쓸데없는 이야기 — 제 출신이 어떻다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아 버리지 않았는가?

사실 그 이야기를 뱉어 놓고 엘리야는 움찔했다.

저래 보여도 유리 엘로즈는 귀족이었다. 날 때부터 로잔헤이어라는 요람 속에서 태어난 공주.

자신을 가르치던 사람이 사실은 빈민가의 거렁뱅이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엘리야는 한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유리는 경멸하지도, 함부로 그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의 그들처럼 대화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 사실이, 뭐랄까?

나쁘지 않았다.

음, 정말로.

그런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엘리야는 참으로 오랜만에 등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경험을 했다.

고대의 보호 마법을 비롯하여 여러 대단위 마법이 중첩된 학내에서는 유리의 기척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유리가 자신을 놓친 걸 깨닫는 게 늦었다.

‘제기랄.’

엘리야는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는 페르가나 아카데미였다. 출입하는 사람들도 신분이 검증된 사람들뿐이고, 오늘은 외부인을 들이는 날이니만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경비 활동도 벌이고 있었다.

위험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그 확률이 0%가 아니라는 사실이 엘리야의 걸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마, 마탑주님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학장을 만나러 왔다.”

“예? 아니, 잠깐, 마탑주님!”

엘리야는 자신을 막아서려는 사람을 성큼 지나쳐, 아카데미 학장실의 문을 열었다.

“오? 이런, 마라케시 님께서 오셨군요.”

수염을 하얗게 기른 학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엘리야는 그 표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교활한 능구렁이.’

무엇보다 이 작자는 자신에게 3개월씩이나 인성 교육을 시켰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모교에는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여기 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 만한 일이라.”

학장이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그것 참 궁금하군요.”

“학장, 당신을 찾아온 건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재빠르게 말했다.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죠.”

“교내 탐색 마법 사용 허가를 내려 주기를 원합니다.”

“탐색 마법을?”

학장이 눈썹을 쓱 추켜세웠다. 탐색 마법이라 함은, 엘리야 마라케시가 설마 여기에 누군가를 데려왔단 말인가?

“마탑주, 혹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을 잃어버린 일이 저 대단하신 마탑주의 신경을 갉작갉작 갉아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호오.’

학장은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섣부른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렵겠습니다.”

“뭐?”

엘리야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어째서입니까?”

“오늘은 교내에 외부인이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학장은 차분히 사정을 설명했다.

“신분을 철저히 확인했다고는 하나 어떤 의도를 가진 사람이 섞여 들었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페르가나를 보호하는 마법을 중지할 순 없습니다.”

“학장, 나는……”

“압니다. 마탑주님께서는 페르가나의 보호를 인위적으로 깨고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지요. 그걸 참고 여기까지 와 주신 것만으로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주신 거란 걸 모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순식간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면 잘 좀 생각해 보시죠.”

“페르가나의 보호를 거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마탑주님께서 잃어버린 그분께도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

“차분히 행동해 보도록 하지요. 일단 잃어버린 귀빈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학생 자치 경비단을 통해 소재를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엘리야가 끓어오르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학장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무엇보다 보호를 거둔 사이에 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붙잡고 늘어졌다.

“……좋습니다. 일단은 그걸로 참아 주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단.”

엘리야는 경고해 두었다.

“내 인내심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일러두도록 하지요.”

* * *

정정. 엘리야가 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정신이 팔려 다른 길로 빠진 거였다.

그런데 주변이 복잡해서인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그렇게 한순간에 엘리야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나는 비교적 침착한 상태였다.

‘눈에 띌까 걱정을 좀 하긴 했지만.’

오히려 엘리야가 없다 보니 그저 일반 참관객으로 보였는지, 그제야 학생들이 내게 다가와 홍보물을 나눠 주거나 자기네 부스로 오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뭐, 괜찮지 않을까?’

위험한 곳도 아니고 페르가나 아카데미 학내인 데다가, 나를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원래 자리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봤자 엘리야가 그 자리에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고.’

엘리야가 탐색 마법 사용 허가를 얻을 때까지, 내 좋을 대로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참관객?”

“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키가 크고 준수하게 생긴 남학생이 서 있었다.

“어…….”

“참관객이라면 우리 부스에 놀러 오지 않을래?”

남학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엄지로 자기 뒤쪽을 가리켰다.

‘!’

아까 위쪽에서 보았던 분홍색 연기를 내뿜는 냄비들이 놓인 부스였다.

“우리는 참관객이 원하는 마법약을 제조해 주고 있어. 한 시간 정도 효과가 있는 구름 걸음 약이랑, 약간 위험한 마법 잉크 같은 걸 팔지.”

“약간 위험한……?”

“이런, 놀라진 않아도 돼. 살짝만 바꿔치기해 두면, 머리라는 단어를 머저리로 바꿔 주는 정도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장난용 잉크라는 말이었다.

“어때? 호기심이 생겨?”

쾌활하게 묻는 남학생에게서 다른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 정도라면.”

“좋아. 따라와.”

솜씨 좋게 나를 자기네 부스로 데려가면서,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에단이라고 해.”

“나는 유리.”

비슷한 또래로 보이기도 했고, 상대가 처음부터 반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도 편하게 말을 놓았다.

“유리는 여기 처음이야?”

“응. 오늘이 처음. 너는 몇 학년이야?”

“나는 5학년.”

그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참고로 2년째야.”

“2년째?”

“페르가나의 5학년은 지독하거든. 보통 2년에서 3년 정도는 걸려.”

“그렇구나.”

“한나, 손님 왔어!”

그가 부스를 향해 외치자, 손님 응대를 하고 있던 여학생이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런, 바빠 보이네. 하는 수 없지. 내가 안내해 줘도 괜찮지?”

“그럼.”

“그래…… 그럼 어디 보자. 자, 여기 아까 말한 마법 잉크. 한번 시험해 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단이 건네준 펜촉으로 잉크를 찍었다.

‘뭐라고 하지?’

잠깐 고민하다가 아까 에단이 예시로 들어 준 단어가 생각이 나서, ‘머리를 들다’라는 문장을 적어 보았다.

그러자 종이에는…….

“효과 확실하지?”

“그러게!”

‘머저리가 돌아 버리다’라는 문장을 보고, 나는 에단과 함께 키득거리며 웃었다.

“좋아. 너네 잉크 합격이야. 내 남동생한테 좀 필요할 것 같네.”

“유머가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딱이지.”

에단이 씩 웃으면서 잉크를 포장해 주었다.

“고마워.”

“뭘. 그나저나 리플릿이 없어 보이는데, 하나 줄까?”

“아, 정말? 그래 주면 고맙고.”

“자, 여기.”

에단은 부스 한구석에 있던 리플릿을 가지고 와서,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여기저기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 주었다.

“워낙 부스가 많아서 말이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가 보면 재미있을 만한 곳에 표시를 해 뒀어.”

“이거야말로 진짜 고맙네.”

“고객님을 위한 서비스지. 아 참, 이따가 노을이 질 때 여기로 찾아올래?”

“응?”

“별건 아니고, 사실 우리 메인은 이 부스가 아니라 오늘 저녁 불꽃놀이 행사를 맡은 거라서.”

에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부스 한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과연, 폭죽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쪽으로 오면 같이 불꽃놀이에 불을 붙여 볼 수 있게 해 줄게.”

“정말?”

“그럼.”

에단이 시원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놀이라.’

한번 해 보고 싶긴 했다. 정말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엘리야를 만나고 나서 부탁해 봐도 되겠지.’

“시간 되면 올게. 되도록.”

“그래. 되도록 와 줘. 축제 재미있게 즐기고!”

그렇게 나는 에단과 헤어져, 에단이 준 리플릿을 가지고 행사장을 돌기 시작했다.

과연, 2년째 5학년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 에단이 알려 준 부스는 다 흥미로운 것들을 보여 주었다.

‘중간에 어떤 부스에서는 원한다면 몰래 사랑의 묘약을 보여 주겠다고 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런데…….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렀던 하늘에 분홍빛으로 여름 노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엘리야가 나를 찾아오는 게 늦는데?’

그 시각 엘리야가 아카데미 학장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이제 그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장 허가하라’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뭐…… 괜찮겠지?’

설마 나를 두고 그냥 집에 가 버렸을 리는 없겠지.

‘돌다 보면 언젠가 만날 수도 있고…… 아!’

그러고 보니 에단이 노을이 질 때 찾아오라고 했지!

리플릿을 보니 마침 에단의 부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쇼핑 가방을 챙겨 들고 에단의 부스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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