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그냥 알아듣도록 좋게 말할 수도 있는 걸, 꼭 이렇게 나쁜 방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쳐야 하냐고요.”
꼭 뭐든 가르쳐 줄 것처럼 그렇게 달게 굴어 놓고, 이런 식으로 태도를 뒤집어야 해?
속은 것만 같았다. 여태까지 카미엘이 보인 모든 태도에.
‘나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엘레니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실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알게 돼서, 화가 난 거였다.
‘아, 그래.’
내가 착각했구나.
상대방이 아무리 착각할 만하게 군다 해도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멍청하게도, 착각을 해 버려서.
그 사실을 인정하려니 너무 창피했다. 아니, 수치스러웠다.
“……그만 일어나 볼게요.”
“공녀.”
“더 이상 여기 있었다간 대공 전하께 돌이킬 수 없는 실례를 저지르게 될 것 같아요.”
나는 찻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잔을, 이를 악물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며 바라보았다.
“약속,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남은 하루 편안히 보내세요. 그럼.”
카미엘을 설득하는 데 실패합니다.
카미엘의 호감도가 소폭 오릅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도 내 분노를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활활 불타오르는 불같은 상태로, 가차 없이 대공저를 떠나 버렸다.
* * *
불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남자를 믿으려고 했던 내가 미쳤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시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차라리 이 분노를 동력원으로 삼아 무언가를 하는 것.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지.’
나는 더 이상 카미엘 시 로엔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페르가나에 가기 위해 종전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엘리야 경.”
“뭡니까?”
엘리야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기세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있었지만 털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저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
웃고 있긴 하지만 화가 나서 그런지 눈에 좀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긴 했다. 엘리야가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날 바라보는 걸 보니 필시 좀 이상한 표정일 게 분명했다.
“당신 좀 평소랑 다른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나는 단언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는데 왜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는 소리를 합니까?”
“……경,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게으른 학생이었어요?”
페르가나에 가겠다는 열망으로 열심히 공부했건만, 아무래도 천재 마탑주의 눈에 들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 혹시.”
“?”
엘리야의 얼굴에 설핏 마뜩잖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혹시…….” 하고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뭐요?”
“……고 싶은 겁니까?”
“잘 안 들렸어요.”
“나와 꼬인 회로를 그렇게 빨리 풀고 싶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예?”
너무 예상외의 말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야는 아랑곳 않고 빠르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물론 회로가 연결되어 있어 내가 당신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게 좀 찜찜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빨리 떨쳐 내려고까지는 안 해도 될……”
“경, 경. 그게 아니라요.”
엘리야는 사고가 빠른 만큼 오해가 진행되는 속도도 빨랐다.
나는 얼른 그런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제가 언제 회로 얘길 꺼낸 적이 있나요? 그건 다 최적의 때에 경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다고요. 지금 상황에서 딱히 불편한 것도 없고.”
“그렇다면 대체 왜?”
아니, 내가 공부 좀 열심히 하겠다는 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게다가 저번에 하이 마켓에서 꼬인 회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수련에 정진해야 한다고 한 건 그쪽이었으면서.’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반박하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일단 해명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저 사실 말이에요.”
“사실?”
“페르가나에 가는 게 제 꿈이거든요…….”
슬쩍 눈치를 보니 엘리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르가나에? 아카데미를 말하는 겁니까?”
“네.”
“하…….”
“미리 말씀드리는데 경의 가르침이 부족했다거나 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니까요.”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툴툴거리듯 말하며 코웃음을 쳤다. 아닌 척은 하고 있지만, 적잖이 안도한 기색이 엿보였다.
‘이럴 때 보면 좀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본인한테 이런 말 하면 화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럼 대체 왜 페르가나에 가려고 하는 겁니까?”
“그냥…… 꿈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궁색한 변명을 댔다.
“같이 마법 공부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삶?”
“페르가나 아카데미는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미심쩍은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당신이라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긴 하군요.”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그걸 꼭 물어봐야 압니까?”
“역시 욕이었죠!”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엘리야가 흥 하고 웃었다. 도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페르가나라…….”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물었다.
“왜요? 뭐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엘리야가 고개를 짧게 가로젓곤 말했다.
“마침 거기가 지금 축제 기간이라던가, 그렇다는 얘기를 들은 게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예? 축제요?”
“학술제를 겸한 학내 행사인데…… 1년에 딱 한 번 페르가나 아카데미를 외부인들에게 개방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학술제와 축제를 겸한다니, 어쩐지 상상이 잘 안 간다.
“외부 인사를 초청해 학술 발표회 같은 걸 열기도 하고, 학생들이 상연물을 제작하거나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그 모든 과정이 성적에 반영됩니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쩐지 흥미가 생긴다.
‘나도 페르가나에 가면 축제에 참여하게 될까?’
아니다. 나는 교수로 초빙된다고 했으니까, 축제에 직접 참여하는 게 아니라 평가자로 함께하게 되겠구나.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교수가 되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영 요원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게임에서야 당연히 마법 수업을 받고 마력이랑 지력이 올라가니까 그런 줄 알았지만, 실제로 마법 수업을 받는 건 게임에서 스케줄에 마법 수업을 집어넣는 것과는 천지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나마 엘리야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금 이 정도인데.’
평범하게 공작가에서 공녀의 선생으로 구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면, 이 정도 경지는 이루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음, 별건 아니고요.”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냥, 경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갑자기 무슨……!”
엘리야가 눈에 띄게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 보니 귓가가 언뜻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라, 부끄러워하는 건가?
“경, 저는 정말 진심으로……”
“알겠으니까 그만하십시오.”
“아얏.”
엘리야가 눈을 빛내는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스승을 놀리려고 하다니.”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 정말 진심으로……”
“쉿. 그만.”
엘리야 쯧 소리를 내며 나를 저지했다. 나는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엘리야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뭐, 그런 것보다 오늘은……”
“네. 뭘 가르쳐 주실 건데요?”
“페르가나 아카데미에 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잠깐 사고가 멈췄다.
‘페르가나 아카데미에 가자고?’
지금? 당장? 여기서?
“어,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그야 당연히 텔레포트로.”
“아니 아니, 그건 알겠는데요.”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구 손을 내저었다.
“전 제국 귀족이고 페르가나는 다른 나라인데 입국 절차는요?”
“그렇게 따지자면 저도 제국 귀족입니다만.”
“그, 그러게?”
엘리야가 날 보며 귀엽다는 투로 짧게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여담이긴 하지만 저는 따로 페르가나 시민권도 있고.”
“페르가나 시민권이 있었다고요?”
역시 마탑주 프리 패스…….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랍니까?”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죠.”
“이 정도로 놀라면 내가 아카데미 교수란 소릴 들으면 얼마나 놀라려는 건지.”
“……네?”
지금 뭐라고?
“경이 아카데미 교수라고요?”
“명예직이긴 하지만, 대충 그렇습니다.”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하는 엘리야를,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경, 마탑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뭐랄까.”
“뭐랄까?”
“마탑주라는 건 새삼 정말로 대단한 거였네요…….”
“…….”
진심으로 감탄하는 나를 보며 엘리야가 조금 웃었다.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내가 데려가는 거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 뭘?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둥절한 내게, 엘리야가 친절하게 되물어 주었다.
“놀러 가 볼 겁니까, 페르가나?”
“그, 그야 당연하죠!”
입국하는 데 절차상 아무 문제도 없다면 당연히 다녀와야지!
그러면서도 약간 실감이 안 났다.
‘이렇게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니.’
배드 엔딩을 달성하지 못하면 발도 디뎌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 정말 제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당신 스승이 마탑주라는 게 이제 좀 실감이 납니까?”
“그런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진짜 멋있어…….”라고 중얼거리자, 엘리야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뭐, 그렇게 진짜로 멋있을 것까지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깨가 으쓱 올라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럼,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얼른 다녀오도록 하죠. 오늘 안에 돌아보려면 지금도 시간이 빠듯할 겁니다.”
“자, 잠깐만요. 저 옷만 좀 갈아입고요!”
아무리 페르가나가 중립국이라지만, 이렇게 ‘나 제국 귀족이오’라고 외치는 듯한 차림새를 하고 가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재빨리 에나와 헤일리의 도움을 받아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주목을 끌 필요는 없지만, 신분을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폴리모프 반지는 끼지 않았다.
“가요!”
“자.”
엘리야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신이 나서 덥석 그 손을 붙잡았다.
“……남자 손을 이렇게 덥석덥석 잡아도 됩니까?”
“어머나, 남자이기 이전에 스승님이신 거 아니었어요?”
“…….”
그야 그렇지만, 하고 대답할 것 같았던 엘리야가 드물게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지?’
“경?”
“……아니, 아닙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