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 *
정찬실에서부터 방까지.
엘레니는 아무도 뒤따라와 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길을 혼자서 걸었다.
분노가 이미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일까?
해일처럼 몰아치던 감정조차 얼어붙은 것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유리 엘로즈.’
분명한 건 그녀를 죽여 버려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엘레니는 그동안 열심히 황실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금서 구역까지 발을 디딘 결과 그녀는 한 사람의 마나가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는, 말이지.’
금서 구역에는 엘레니의 예상대로 마나를 훔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한 사람의 서적이 있었고, 그 낡아 빠진 책은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 속한 마나는 마나의 그릇이 되는 사람이 죽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지 않는다.
결국 유리 엘로즈의 마나, 혹은 정화력을 빼앗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죽여 버려야만 했다.
엘레니에게는 그 사실이 어떤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나는 그년을 죽여 버리기 위해 태어난 거야.’
하지만 유리를 아무렇게나 죽여 버리면 그냥 살인자가 될 뿐.
마나를 빼앗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진명(眞名).’
이 세상에 유리 엘로즈의 진명을 아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하나는 유리 엘로즈 본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
엘레니는 차가운 눈빛으로 결심했다.
그녀는 곧장 방으로 가서 한 가지 물건을 챙겼다.
붉은 마나석이 정중앙에서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는 목걸이였다.
‘다만.’
결행은 지금 당장이 아니었다.
이 목걸이를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며칠만 참으면 돼.’
머지않아 엘레니는 유리 엘로즈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녀가 가진 정화력의 마지막 한 방울조차 빨아먹고, 빈껍데기가 된 그 여자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엘레니는 영원히 유리 엘로즈를 이기게 될 것이다.
영원히.
* * *
다음 날 아침.
거울 앞에 앉아 에나와 헤일리의 도움을 받아 외출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묘한 감상에 빠져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청혼을 거절하러 가는 건데.’
청혼을 거절하러 가기 위해 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상대는 두 번이나 자신에게 청혼을 한 남자였다.
어제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는 에스테반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연이은 내 방문에 세드릭의 집사, 론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투로 기쁘게 웃으며 날 맞아들였다.
‘아무래도 내가 청혼을 허락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죄책감이 가중된다.
론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집무를 보고 계십니다. 제가 직접 공녀님게서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드릴 테니, 곧 내려오실 겁니다. 따뜻한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준비해 준다면 고맙겠어요.”
“예, 맡겨만 주십시오. 그럼.”
론은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곧이어 그와 비슷한 정도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이 든 시녀장이 들어와 내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아이고, 차가 부디 공녀님의 입에 맞아야 할 텐데!”
“그, 그럴 거예요.”
세드릭의 청혼을 거절하러 와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환대를 다 받고 있자니, 죄책감을 넘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산드라.”
다행히 그쯤에서 세드릭이 나타났다.
“호호, 오셨군요, 각하. 공녀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으실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산드라는 흘긋 내 표정을 살폈다. 마치 아들 가진 엄마가 아들의 장점을 열심히 어필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산드라가 흐뭇한 얼굴로 물러난 후,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세드릭의 눈치를 흘긋 살폈다.
“…….”
하지만 세드릭은 평소와 같이 반듯한 얼굴로 옷자락을 갈무리하며 내 앞자리에 마주 앉을 따름이었다.
그 표정에서는 일말의 동요조차 읽어 낼 수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경.”
우습게도 긴장을 한 것은 내 쪽이 되었다.
“가, 간밤은 편안하게 보내셨나요……?”
내 입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혼을 거절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첫 번째는 그렇지 않았는데. 두 번째라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세드릭을 쭈뼛쭈뼛 올려다보자, 세드릭이 반듯한 입매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예.”
“…….”
“간밤엔 편안했습니다.”
그 말이 어쩐지 얄밉게 들린다면, 내 성격이 나쁜 걸까?
“다행이네요.”
웅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는 나를, 세드릭이 잠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언뜻 보면 평소와 같이 담백한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눈빛 기저에 깔린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경, 제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알고 계신 거죠?”
“예.”
세드릭이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하…….’
나는 허탈감에 어깨를 쭉 늘어트렸다.
‘밤새 그에게 어떤 식으로 거절을 해야 좋을지 고민했는데.’
처음부터 내 거절을 알고 있었다는 사람에게는,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세드릭이 미미하게나마 웃음을 머금고, 내게 말했다.
“결과를 예상하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제 제멋대로인 결정이었으니, 공녀께서 제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그래요……?”
“정말로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공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니 말입니다.”
“예?”
세드릭이 얌전히, 깔끔한 태도로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그러니까…….”
“예.”
“경, 제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청혼을 하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나는 잠시 아연해서 말을 잃었다.
그런 내게 세드릭이 착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공녀의 뺨에 허락 없이 입을 맞추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죠…….”
그 사실을 이렇게 당당하게 언급할 줄 몰랐다. 나는 당황해서 얼결에 수긍하고 말았다.
세드릭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제 마음을 고백해 버리기까지 해서, 당분간 공녀께서 저를 피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적중이었다.
정곡을 찔려 말을 못 잇는 나를 보며, 세드릭이 침착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그날 일이 공녀에게는 예기치 못한 사고나 다름없었다는 걸 압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기 때문일까, 세드릭이 말했다.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께서 잠시 내보인 틈을 타서 허락 없이 입을 맞춘 건 저니까요.”
“그…….”
‘뺨’이라는 장소를 생략하니까 굉장히 다르게 들리는 말이었다.
세드릭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잠깐 멈칫했다.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다행히 곧, 세드릭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아무튼, 청혼을 거절하시는 것에 대해 제게 미안함을 느끼시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제가 먼저 공녀에게 마음을 고백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공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했을 뿐이니까요.”
그제야 나는 세드릭의 두 번째 청혼을 거절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청혼을 거절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렇구나.’
처음에 청혼을 거절했을 때는, 세드릭이 그저 내게 의리로 청혼한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거절할 때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할 정도로 내게 호의를 품은 사람의 마음을.
쉬울 리가 없었다.
“경, 저는……”
“죄송합니다만.”
세드릭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드문 일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려는 거라면 그러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경의 마음을…….”
“제 마음은 제 마음입니다. 화답해 줄 수 없다고 해서 공녀께서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정론이었다.
“게다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공녀께서 보여 주지 않으시려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같잖은 수작을 부렸을 뿐입니다.”
“…….”
“그런 저를 나무라셔도 되는 상황에,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론이기는 한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경, 적어도…….”
나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제게 청혼한 걸 같잖은 수작이라고 부르지는 말아요.”
“…….”
“경은 진심이었잖아요.”
나를 바라보는 세드릭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제가 이래서 공녀를 좋아하나 봅니다.”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추락을 예견한 사람처럼, 그가 그렇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 * *
집에 돌아가는 길.
마음이 심란했던 나는 곧바로 집에 가는 대신 의상실을 경유해서 산책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급 귀족이나 혹은 그 사촌 정도로 보일 만한 옷차림으로 차려입고, 거리로 나오면 해방감이 들곤 했다.
페르가나로 도망치기 위해 매순간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유리 엘로즈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목적 없는 외출은 처음인 것 같네.’
자유롭긴 하지만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 거닐어 보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려는 순간…….
“……안녕, 공녀.”
“으아아악!”
갑자기 귓가에서 훅 들린 목소리에, 나는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대고 말았다.
“카, 카미엘?”
“그렇게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 지를 건 없잖아.”
샐쭉한 표정을 지은 미남자가 말했다.
“나 상처받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