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심부름꾼이 내민 건 아주 작은 상자였다. 칼릭스는 그 상자가 무슨 폭탄이라도 되는 양 격렬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그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촘촘한 벨벳을 씌운 폭신한 감촉의 상자를 열자…….
“!”
까꿍, 하고 반지가 나를 반겼다.
“이, 이건……!”
칼릭스가 대경해서 외쳤다. 나 역시 너무 놀라 말을 잊고 말았다.
굳어 버린 내 머릿속에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공녀는 뭐가 좋아? 다이아몬드?”
“링은 공녀 머리 색에 맞춰 백금이면 좋겠지? 내 사이즈는 아마 헤일런이 알고 있을 거고, 공녀 것만 재면 되겠군.”
그 말대로 백금으로 만든 링에 페어 컷 다이아몬드를 얹은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심플한 메인 링에 파베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세팅한 가드 링을 아래위로 하나씩 껴서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무슨…… 어떻게 저렇게 큰 거야?’
저 정도면 내 손가락이 아니라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하는 사이즈 아닌가?
엄지손톱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를 보고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심부름꾼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공녀님의 손가락 사이즈에 딱 맞추느라 장인들이 고생을 꽤나 했다고 합니다.”
내 머릿속에 약지를 주물주물하던 카미엘의 모습과 더불어, 손가락에 잇자국을 내고 반지 대신이라며 웃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껴 보지는 않았지만 이 반지는 내 약지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 왔다.
“하아…….”
문득 다시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러다가 페르가나 못 가는 거 아냐……?’
그 생각을 하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받을 수 없어.’
나는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잽싸게 말했다.
“반지를 거절하시면 내일 다른 반지 두 개를 보내겠노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뭐!”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외쳤다.
“그게 무슨 돼먹지 못한 협박이란 말인가!”
“칼릭스.”
나는 지나치게 흥분한 칼릭스를 말렸다. 잘못을 한 쪽이 있다면 그건 카미엘이지 애꿎은 심부름꾼은 아니었다.
움츠러든 심부름꾼이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반지를 돌려주시려거든 대공저로 직접 찾아오시면 생각해 보시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칼릭스, 조용.”
나는 칼릭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를 말리고 생각했다.
‘정말 카미엘답다…….’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응접실 문가에 산산조각 난 화병이 보였다. 그 옆에 엘레니가 서 있었다.
“…….”
창백한 표정으로 이쪽을 말없이 바라보는 엘레니의 큰 눈에는, 뭐랄까,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 뒤섞여 회오리치고 있었다.
“엘레니? 거기 왜 그러고……”
칼릭스가 뭔가를 물으려 했지만, 엘레니가 홱 돌아서서 쫓기는 사슴처럼 이곳을 벗어나는 게 더 빨랐다.
‘망했네.’
카미엘을 향한 엘레니의 특별한 집착을 볼 때, 이 일이 결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웬 난장판이야!’
머리가 다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었다.
* * *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어떻게든 지나간 후, 그날 저녁.
하필이면 오늘은 가족 정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정찬실로 내려가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당연히 세드릭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테니 말이다.
“유리, 어서 오너라.”
정찬실에 도착한 사람은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엘레니를 흘긋 바라본 후, 조심스럽게 그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구나.”
“아버지야말로요.”
우리는 서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기계적으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엘레니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카미엘이 내게 반지를 보낸 것 때문에 이러는 것 같은데…….’
이렇게 충격을 크게 받았다는 건 엘레니가 가진 카미엘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인 걸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내게 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크게 받은 걸까?’
생각해 본 결과, 나는 후자에 조심스럽게 무게를 실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무렵, 시종들이 이제까지 먹은 접시를 치우고 후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버지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유리야.”
“네, 아버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아버지가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에스테반 후작이 너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네, 들었어요.”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끙,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리셨다.
그러더니 입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셨다.
“그놈이 기어이…….”
“네? 아버지?”
……그놈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크흠, 신경 쓰지 말거라.”
헛기침을 하시는 걸 보니 내 귀가 제대로 일을 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말이다.”
“네, 아버지.”
“네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유리.”
아버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야, 너는 이 결혼을 하고 싶은 거냐?”
“…….”
옆에 앉은 엘레니로부터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칼릭스야 말할 것도 없이 아까부터 활활 불타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쩐지 칼릭스의 솔직한 시선보다 엘레니의 조용한 시선이 더 신경이 쓰이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카미엘이 보낸 반지도 그렇지만, 세드릭의 두 번째 청혼 역시 적잖이 엘레니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세드릭의 청혼에 응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두 번이나 거절하게 된 건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배드 엔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카미엘은 날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나는 그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건 물론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카미엘은 싫은 사람에게 굳이 키스까지 불사해 가면서 가식을 떠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틀리면 차라리 죽여 버렸지, 그런 귀찮은 짓은 안 할 사람이야.’
나에 대한 카미엘의 호감은 어느 정도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페르가나에 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마음속에 드리운 일말의 불안마저 깨끗하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카미엘이 나를 조금쯤은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호감의 깊이와 지속 시간을 내가 과연 알 수 있을까?
카미엘은 내게 호감은 표시하면서도 자기의 가장 깊은 비밀, 그가 곧 반역을 저지를 거란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꼭 내게 모든 걸 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기면서 다가오기만 하는 사람을, 과연 내가 믿어도 되는 걸까?
‘게다가 그 반지는 청혼조차 아니었잖아.’
반지를 맞출까? 라고 가볍게 말하고, 정말로 반지를 선물하기도 했지만, 그게 청혼까지는 아닌.
애정이라기엔 미적지근하고, 아니라기엔 온도가 높은 묘한 태도.
그래서일까, 나는 카미엘의 진심이란 게 찾아보기 힘든 신기루처럼 느껴지곤 했다.
‘확신할 수 없는 남의 마음에 미래를 걸기보다는, 확실하게 내가 이뤄 낼 수 있는 쪽에 가능성을 걸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제 의사를 물어봐 주셨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저는 사실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어요.”
쨍그랑!
그 순간, 엘레니의 나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죄송합니다.”
엘레니가 표정 없는 얼굴로 사과했다.
“컨디션이 좀 안 좋네요. 저는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하지만 허락을 구하는 말과 달리, 엘레니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칼릭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버지가 놔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그래, 유리야. 잘 생각했다. 나도 네가 결혼을 하는 건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데뷔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기도 했고 말이다.”
“저도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누님.”
엘레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데다 싸운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지, 칼릭스는 정찬장을 나가는 엘레니를 향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행여나 누님이 이대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신다 해도 로잔헤이어는 누님 한 사람 정도 뒷받침해 드리고 보호해 드릴 능력은 충분합니다. 누님께서 굳이 원치 않는 결정을 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고, 아버지도 저도 생각합니다.”
“음.”
아버지께서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우습게도 그 말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내가 페르가나에 가 버려도 로잔헤이어는, 아버지와 칼릭스는 나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적잖이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감사해요, 아버지.”
“감사할 것까지야. 너는 내 딸이지 않느냐.”
아버지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셨다. 칼릭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님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라.”
“감사해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하나 신경 쓰이는 게 남았다.
‘엘레니…….’
나는 엘레니가 나가면서 소리 없이 닫혀 버린 정찬실 문을 흘긋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평소와 달리 최소한의 가면조차 쓰지 않던 엘레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넌지시 칼릭스에게 ‘엘레니에게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대번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먼저 잘못을 해 놓고서도 반성하지 못하는데, 제가 먼저 다가가서 달래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칼릭스까지 딱 잘라 그렇게 말하는 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