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82)

136화

내 질문에 세드릭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내 질문이 그냥 공연히 해 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드릭이 이렇게 말했다.

“……공녀께서 공연히 황가를 언급했을 것 같진 않군요.”

“…….”

“알겠습니다. 저도 일단 그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의 동생은……”

“대외적으로는 당분간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긴. 도박꾼이 몇 날 며칠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곧바로 수색을 시작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그 부분은 세드릭이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튼, 믿어 줘서 고마워요, 경.”

과연 내가 세드릭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대도 이렇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믿어 줄 수 있었을까?

나조차도 장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런 만큼 세드릭이 고마웠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세드릭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이 천천히 스며들듯이 내 손을 잡았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거란 걸 압니다. 저를 믿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하면서 세드릭이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만 말을 잊고 말았다.

뭔가 아주 귀한 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쉽사리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세드릭이 눈을 내리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고개가 살짝 비틀어지며 내게 가까워지기 시작할 때도 그랬다. 마치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고개가 가까워지고 있긴 하지만, 세드릭이 내게 키스를 할 리가……

“!”

……있었네?

다만 장소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유리.”

귓가에 가까운 뺨에 와 닿은 입술이 달싹였다. 살짝 목이 멘 듯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귓전을 울렸다.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저, 세드릭…….”

“……아.”

다행히 세드릭이 내 곤란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드릭의 얼굴에 작게 경악이 번졌다. 저도 모르게 내 뺨에 입을 맞춘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가 덜컥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하지만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 번진 붉은 기는 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공녀, 이건…….”

그러면서도 세드릭은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워낙 저쪽에서 부끄러워하니 자연히 내 쪽도 수줍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 일단 손을 좀 놓아주시면…….”

“아, 네.”

대답과는 달리 내 손을 잡은 세드릭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는 미련이 가득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그래서 어딘가 슬프게까지 보이는 눈빛을 하고 나를 간신히 놓아주었다.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공녀. 제가…… 참지 못했습니다.”

“그…… 괜찮아요. 뺘, 뺨에 하는 입맞춤 정도야 안부 인사죠.”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아무렇게나 막 내뱉었다. 하지만 세드릭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안부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

“저는 공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참지 못한 겁니다. 죄송합니다.”

“세드릭…….”

“제 마음을 공녀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안부 인사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심을 담은 고백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힘을 갖게 마련이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압도되고 말았다.

‘위, 위험해.’

겪어 본 바대로 평하자면, 이 남자는 카미엘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위험한 남자였다.

* * *

세드릭이 한사코 데려다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히, 힘들었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제가 공녀를 좋아해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던 세드릭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더 같이 있었다간 무슨 일이 날 것 같았단 말이야.’

솔직히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됐으면 관계창 한마디도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관계창이 궁금해졌다. 나는 일단 세드릭만이라도 체크할 생각으로 관계창을 열었다가…….

세드릭: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닿아 버릴 줄은…….”

거기 떠올라 있는 한 줄을 읽자마자 도로 관계창을 꺼 버렸다.

게다가 관계창을 보니 한 가지 더 생각이 나는 게 있었다.

‘……이거 카미엘이 알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카미엘하고 내가 딱히 무슨 사이가 되기로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내 첫 키스 상대였기 때문일까? 그 말고 다른 사람이 내게 접촉했다는 사실에 괜한 죄책감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 성격에 이걸 알면 그냥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을 게 분명한데…….’

아아아, 정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는 방 안이라 다행이었다. 얼굴이 벌게졌다 파래졌다 하는 나를 보면 누구라도 미쳤다고 생각할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내 루트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최종 보스와는 키스를 해 버렸고, 세드릭은 나를 좋아한다.

노선이 틀어져도 제대로 틀어져 버린 게 틀림없었다.

혼자 방에서 우두커니, 나는 생각했다.

‘……나 이러다가 페르가나 갈 수 있긴 한 거야?’

* * *

그런 고민으로 밤을 꼬박 새운 뒤.

기절하듯이 잠이 든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다음과 같았다.

‘도저히 방 안에서 혼자는 못 있겠어.’

출구 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도저히 못 견딜 노릇이었다.

바깥에서 산책을 하면 머리를 좀 식힐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메인 로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누님!”

칼릭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피로가 해소되지 않아서일까,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내 반응을 칼릭스가 미심쩍게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

수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아, 맞다!”

칼릭스가 대번 표정을 바꾸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누님, 혹시 에스테반 후작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어?”

한순간 내가 멈칫하는 반응을 보이자, 칼릭스가 대번에 쌍심지를 돋웠다.

“누님!”

“가, 갑자기 물어서 놀라서 그래!”

내 부정에 칼릭스가 잠시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사실을 털어놓을 일은 없었다.

결국 수확을 거두지 못한 칼릭스는 일단 의심을 접어놓기로 결정한 듯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그가 잔뜩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셔야 합니다, 누님.”

“응, 그럴게.”

“에스테반 후작이 누님께 청혼서를 보냈습니다.”

“……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에스테반 후작이?”

“세드릭, 그 작자 말입니다.”

제국의 후작이자 기사단장, 존경받는 오러 마스터는 어느새 내 동생의 입에서 ‘그 작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세드릭이 나한테 청혼서를 보냈다고?

‘청혼서가 그거 맞지? 우리 결혼하게 해 주세요, 하고 요청하는 문서…….’

멍해진 내 표정을 보며 칼릭스가 이를 갈았다.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에스테반 후작 그 작자, 한 번 거절당하기까지 한 주제에 또 대뜸 청혼서부터 보내다니……!”

제국 귀족들의 결혼에는 본인의 의사보다 부모님의 의사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굳이 절차를 따지자면 청혼서부터 보낸 게 틀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칼릭스는 옳은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냐.’

그렇게 판단한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닙니다!”

분통을 터트리는 칼릭스를 보아하니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 내 생각이 새삼 현명하게 느껴졌다.

“그럼 뭐가 더 있는데……?”

“지금 응접실에 로엔 대공이 보낸 심부름꾼이 버티고 있습니다.”

“로, 로엔 대공까지?”

이 사람들이 작정을 했나?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뭐, 뭘까……? 난 잘 모르겠는데.”

“로엔 대공이 꼭, 꼭 누님을 직접 뵙고 전하라고 명령한 선물이 있다는 겁니다!”

“선물……?”

설마 또 마물 사체……?

내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자, 칼릭스가 “역시, 누님도 그런 짓은 딱 질색이신 거로군요!” 하고 제 좋을 대로 해석을 했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주겠다는 선물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는 주의지만…….

‘그래 뭐, 또 마물 사체면 스승님 드리면 그만이니까.’

일단 청혼서보다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선물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내가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누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칼릭스가 생각보다 유연하게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

나는 칼릭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카미엘이 보낸 심부름꾼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 근데…….’

마물의 사체를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상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이번 선물은 마물이 아닌 건가?’

의문을 해소할 틈은 없었다.

“유리 엘로즈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부름꾼이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일단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대공 전하께서 내게 전하는 물건이 있다고 들었네만.”

“예, 그렇습니다. 제게 꼭 공녀님을 뵙고 전하라고 명령을 하신 터라…….”

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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