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어떡하지……?”
고약한 우연의 장난 때문에 나는 세드릭의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엘레니가 거기에 관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흔치 않은 백금발 머리카락을 봤을 때, 최소한 엘레니가 세드릭의 동생을 만난 건 분명한 것 같지만…….’
만약 정말로 엘레니가 테오도어를 만났다면, 이 시간에 굳이 그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생각해 보자.’
나는 일단 아까 엘레니가 칼릭스와 싸울 때의 일을 되살려 보았다.
그때 엘레니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여서, 자기도 모르게 여러 가지 단서를 흘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심쩍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노력하고, 그릇이 되기 위해 모든 일을 겪을 때 오라버니는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했잖아요!”
분명 ‘그릇이 되기 위해 모든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릇이란 게 되려면 일종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이 몹시 힘들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칼릭스가 그 말에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하던 걸로 보아, 칼릭스는 나처럼 그릇이 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 테오도어 에스테반이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지.’
“수여식에서 테오도어, 그놈이 ‘폐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그릇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할 때 폐하께서 대단히 흐뭇해하셨다.”
폐하께서 대단히 흐뭇해하셨다.
그 말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겼다.
‘그저 충성 맹세에 흐뭇해하신 것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카미엘과 엘레니 — 어쩌면 세실리아까지도 — 를 그릇으로 만든 것도, 황제 폐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더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오도어까지도.’
혹시 그릇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 때문에 카미엘이 그렇게 질색하는 반응을 보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인 게 분명해.’
머릿속에 얼굴이 썩어 가는 시체처럼 검게 변색해 검은 물을 토하고 죽은 테오도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어도 테오도어는 절대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테오도어는 그릇이 되는 과정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닐까?’
그리고 카미엘이 그 과정에서 원한을 품고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는 거라면?
‘…….’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그릇은 무엇이며, 황제는 무슨 목적으로 그릇이란 걸 만들어 내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해 떠오르는 건 없었다. 추론을 완성하기에는 단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럴 때는 생각을 계속해 봤자 꼬이기만 할 뿐이야.’
지금은 생각보다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드릭에게 이 일에 대해 털어놓아야 해.’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튿날.
결정을 내린 나는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세드릭의 집으로 향했다.
열쇠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세드릭이 아무 때나 자신을 찾아올 때 사용하라며 준 게 아니었다.
위험할 때 나를 지킬 최후의 수단으로 준 거지.
그 외에도 집안사람들이 말도 없이 사라진 내 부재를 눈치채고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번거롭다는 단점을 감수하고 직접 세드릭의 집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미리 집사에게 부탁해 수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예상대로 테오도어 에스테반의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자업자득이지.’
이름난 도박꾼이 하루 이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종이나 죽음을 연상하긴 어려울 터였다.
어쨌든, 나는 곧 세드릭의 집에 도착했다.
“유리 엘로즈 공녀님!”
세드릭의 집사인 론이 화색을 하며 나를 반겼다.
“안 그래도 공녀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 감사해요.”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대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좋게 받아들였다.
‘이제부터 말할 내용의 여하에 따라 앞으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응접실에서 잠깐 기다리자, 곧 간편한 복장을 차려입은 세드릭이 내려왔다.
“세드릭, 안녕하세요.”
“유리 공녀.”
세드릭이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상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공녀께서 방문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괜찮아요.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도 아닌데요, 뭘.”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지금 중요한 건 세드릭의 옷차림 따위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나를 먼저 앉게 한 다음, 자기도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드릭의 집사 론이 무척이나 흐뭇한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며, 차를 준비한 다음 응접실을 비워 주었다.
“…….”
“…….”
우리 둘은 차 한 잔을 앞에 둔 채 잠시 침묵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도저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였고, 세드릭은 나를 기다려 주고 있는 거였다.
“……저, 세드릭.”
나는 결국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예, 공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드릭의 청혼을 거절할 때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젯밤 경의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세요?”
“아니요.”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합니다. 혹시 그가 또 공녀에게 귀찮게 굴었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나는 말끝을 흐리곤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 말일수록 그냥 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여나 동생이 내게 무슨 짓을 했을까 봐 걱정하는 세드릭에게 최대한 빨리 진실을 알려 주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어젯밤, 죽은 경의 동생을 봤어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세드릭의 미간에 힘이 풀렸다.
“그게 무슨……”
“어젯밤에 제 동생 엘레니가 밤늦게 집을 나가는 바람에, 동생을 찾으러 다니다가 우연히 보고 말았어요.”
“테오도어를 말입니까?”
“네.”
나는 발견 당시 그의 상태를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혹여나 세드릭은 짚이는 게 있나 해서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세드릭은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내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느냐며 당장 내쫓지 않는 것에서 세드릭의 신사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 이야기가 테오도어의 최후의 모습에 이르자, 세드릭도 반문을 참지 못했다.
“녹아내렸다……는 말씀이십니까?”
세드릭이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이에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공녀께서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란 건 잘 압니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그렇게 대답해 주는 세드릭의 모습에 나는 큰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내가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세드릭이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테오도어가…….”
나는 그가 충격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공녀는 괜찮으신 겁니까?”
“……네?”
의외에 말에 내가 눈을 깜빡이자, 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런 험한 모습을 보고 말았는데, 괜찮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네? 저야 당연히 괜찮은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않나?
나는 혼란스러워서 세드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동생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들, 공녀가 그 시간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닌 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저기, 세드릭. 제가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목숨을 잃은 건 경의 동생인데요…….”
“그 녀석은…….”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저를 냉혈한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테오도어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은 착잡하면서도 무거운 얼굴이었다.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물론, 시체가 녹아 버린 데다가 그 목격자가 공녀라는 사실엔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 그건 그렇죠.”
“제 동생이 마지막까지 공녀에게 험한 꼴을 보여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경우만 상상했지, 이렇게 사과를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 괜찮아요, 경.”
나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한동안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잠시간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살짝 세드릭의 눈치를 살폈다. 세드릭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혹시.’
그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게 있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황실을 경계하고 계신 것처럼, 그도 뭔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경.”
“예?”
“혹시…….”
나는 잠시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의 동생의 죽음에 황실이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순간적으로 세드릭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황실이라면,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내가 돌려 말한 사실을 단번에 간파해 냈다. 나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동생은 죽기 직전에 폐하로부터 트란토 자작위를 받았어요. 우리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요.”
“죽어야 할 사람에게 작위를 준다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만.”
세드릭은 정말로 짚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 혹시 ‘충성스러운 그릇이 되겠다’는 맹세에서 뭔가 짚이는 건 없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