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182)

134화

그 남자가 얌전히 그녀의 지시에 따라 주기만 했다면, 사교계에서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리 엘로즈의 입지를 완전히 망쳐 놓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엘레니는 유리를 마법사로서도, 사회적으로도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계획을 감히 제멋대로 망치고 유리를 불러낸 주제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굴기까지 하던 남자를 떠올리자 다시금 속에서 천불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그 남자를 그릇으로 선택한 이상, 엘레니는 그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남자에게는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 있었다.

“저, 엘레니 공녀님…….”

대충 말다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엘레니의 시녀인 로아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엘레니는 로아나의 걱정을 해소해 주는 대신, 차갑게 내뱉을 뿐이었다.

“외출을 할 거야. 준비를 해 줘.”

“네? 또요?”

“…….”

엘레니는 감히 자신의 말에 의문을 제기한 시녀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엘레니의 표정에 로아나는 재빨리 “아,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

엘레니가 말없이 로아나를 지나쳤다. 로아나까지 그런 주인을 따라 자리를 비운 후에야,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리는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체 뭐지?”

허공을 향해 물어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나는 폴리모프 반지를 낀 채, 저택 문 앞을 급하게 떠나는 엘레니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엘레니를 미행하는 것.’

성공할 확률이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엘레니가 그녀답지 않게, 칼릭스와의 다툼을 감수하고서라도 늦은 시간의 외출을 감행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 엘레니가 남긴 불길한 수수께끼 같던 말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길 끝으로 사라지는 엘레니의 마차를 주시하다가, 지나가던 삯마차를 붙잡았다.

“어디로 가 드릴까요?”

“칼라일 3가요.”

꼬리를 밟힐 수도 있기에, 나는 엘레니의 마차를 따라가 달라는 둥의 부탁은 하지 않았다.

엘레니의 수상한 외출의 동기를 확인할 확률이 다소 낮아지더라도, 안전하게 일을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아까 세드릭의 동생을 발견했던 근방의 위치를 댔다.

“될 수 있으면 지름길을 이용해서 가 주시겠어요?”

두 배의 요금을 제시하자 마부는 시원하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마차가 길을 달려 그 근방에 도착했을 때.

“!”

나는 거리를 돌고 있는 로잔헤이어의 마차를 발견했다.

옆을 지나치는 마차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즉.’

엘레니가 이 어딘가에 내렸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두 배의 삯을 지불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막상 마차에서 내리고 나니 막막하긴 했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일단 챙겨 온 물건들을 점검했다.

‘폴리모프 반지 끼고 있고, 텔레포트 스크롤 있고, 정령의 친구 마나석 있고, 혹시나 해서 가져온 세드릭네 집 열쇠도 있고!’

이 정도면 미행을 할 준비는 거의 완벽히 된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정령의 친구 마법을 발동한 다음, 골목길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아까 테오도어가 사라진 쪽이 이쪽 골목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얼마간 상점가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을까?

‘여기…… 이제 칼라일 3가랑은 꽤 멀어진 것 같은데.’

귀족들을 위한 상점가의 단정하고 깨끗한 분위기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모습과 기척을 거의 감추긴 했지만, 혼자서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에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응?’

저게 뭐지?

반대편 골목 바닥에서 흰 물체 같은 것이 널브러져 비죽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

사람의 손이었다.

‘……도망가야 하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저건…….’

소맷자락이 어딘가 익숙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 옷을 어디서 봤던가……?

‘……아아!’

어제, 그리고 아까 보았던 세드릭의 동생이 딱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떡하지?’

목구멍을 타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가까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일단 감각을 곤두세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골목길에서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차하면 정말 찢어 버릴 수 있게 스크롤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

세드릭의 동생, 테오도어 에스테반이 맞았다.

그는 어둡고 척척한 골목길에 버려진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 굳어 가는 그의 몸은 어디로 보나 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건가?’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이 썩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목에는 좀비처럼 핏줄이 푸르게 돋아 있기까지 했다.

죽기 직전에 뭔가 정체불명의 액체를 토해 내기까지 한 듯, 입 주변 바닥에 검은 액체가 흘러서 고여 있는 게 보였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그냥 예사롭게 죽은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시체의 등허리에서 뭔가 물결 같은 선을 그리며 길게 반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

나는 두려움도 잊고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관찰해 보았다.

……익숙한 백금빛을 띠고 있었다.

‘백금발이라면…….’

설마 엘레니가 여기 있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나는 테오도어 에스테반의 이름을 저주에 가깝게 중얼거리던 엘레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죽였을 수도 있었다.

엘레니가, 이 남자를.

‘……일단 이 현장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돼.’

신고를 하든, 세드릭에게 알리든.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

갑자기 시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시체는 마치 산성 용액을 끼얹은 것처럼 연기를 내며 검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시체의 검은 물이 옷에 닿자 옷까지도 녹아 버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전체가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보다 더 빠르게 녹아 버려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뼛조각은커녕 옷자락 한 올조차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엘레니의 머리카락 역시 당연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순식간에 세드릭의 남동생이 이 골목에서 죽어 버렸다는 사실의 유일한 증인이 되어 버린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이대로 여기 있어선 안 돼.’

어차피 증거조차 사라진 곳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골목의 주변 정경을 잘 기억해 둔 다음, 빠른 걸음으로 그 골목을 벗어났다.

어떻게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다시 유리 엘로즈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나는 집에 돌아왔는데, 엘레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일까?

칼릭스가 화가 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칼릭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실상 칼릭스보다도 더 엘레니의 행방이 궁금하고, 그 애가 지금 이 순간 뭘 하고 있을지 불안에 떨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바로 그때.

“소공작님, 공녀님!”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칼릭스가 대번 물었다.

“무슨 일이지?”

“엘레니 공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가 보지.”

아무것도 모르는 칼릭스가 표정을 굳히며 문밖으로 나섰다. 저대로 엘레니와 마주치면 필시 무슨 일이 나겠다 싶어, 나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칼릭스를 따라 나갔다.

메인 로비에서는 엘레니가 들고 간 양산을 하인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나갈 때처럼 옷은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했고,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엘레니 로잔헤이어.”

칼릭스가 화를 참으려 애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또 외출을 했고, 이 늦은 시각에 돌아오고 말았구나.”

“저 피곤해요, 오라버니.”

엘레니는 딱 잘라 그렇게 대답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착하디착한 아가씨의 변모에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그만 올라가 볼게요.”

“엘레니!”

“주무세요.”

엘레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정말로 우리를 지나쳐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칼릭스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엘레니를 따라가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그를 말렸다.

“칼릭스, 진정해.”

“누님……!”

“엘레니에게 급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지껄였다. 오늘 밤 최소한 한 명의 죽음에 연관되었을지도 모르는 엘레니를 칼릭스가 건드렸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오늘은 일단 넘어가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둘 다 침착할 수 있을 때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생각에는.”

“……하아.”

칼릭스가 끓어오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내가 잡고 있던 칼릭스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제야 안심해서 “잘 생각했다”며 칼릭스를 타일렀다.

“저희 일로 누님까지 신경을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있겠니? 둘 다 내 동생인데.”

“…….”

잠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동생…….”

아무렇게나 한 대답에 가까웠는데, 그 말이 칼릭스의 안에서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너도 그만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어.”

이 주제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어서, 나는 얼른 칼릭스를 달래 그의 방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집사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은 엘레니를 잘 지켜봐 줘.”

“예, 명심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