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 *
무사히 의뢰를 맡긴 후, 로제타 의상실 쪽으로 돌아가는 길.
“……어라?”
열심히 걷고 있던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저건…….’
세드릭의 남동생이잖아?
나는 본능적으로 가로수 뒤에 살짝 몸을 숨긴 다음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제 입었던 옷을 계속 입고 있네?’
게다가 입은 옷이 흐트러져 있어서 꼴이 어제만도 못한 것 같았다.
“……, …….”
그는 정신없이 거리를 걸으면서 입속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반쯤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거리의 사람들도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를 피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안색도 어제보다 나빠 보여…….’
……따라가 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도박 중독자가 저런 꼴로 정신없이 갈 만한 곳이라면 십중팔구 도박장 외에 뭐가 더 있겠어?’
게다가 오늘은 미행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그런 위험한 짓을 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일단 집으로 가자.’
나는 일단 그의 행보에 대한 사소한 의문은 묻어 두고, 의상실을 경유해 다시 공녀가 되어 집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고, 공녀님, 오셨습니까.”
“……?”
집안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사용인들이 뭔가 주저하는 듯한 모습으로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혹시 새어머니가 칩거를 깨고 뭔가 이상한 행동이라도 시작하신 걸까?
“거기, 너.”
“아, 아 넵, 공녀님.”
나는 개중에서 제일 진땀을 흘리고 있는 하인 한 명을 골라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집안 분위기가 이런 거지?”
“그, 그게…….”
하인이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마치 자기가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러는 거지?’
내가 한 번 더 하인을 추궁하려는 찰나.
“저, 유리 공녀님.”
집사가 나를 불렀다.
“집사.”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흠, 좋아.”
나는 눈짓으로 주변 하인들에게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눈치 빠른 하인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혹시 어머니께서……”
“마님께서는 여전히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그게 아니라…….”
“?”
집사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내게 털어놓았다.
“소공작님과 엘레니 공녀님께서 지금 다투고 계십니다.”
“뭐?”
걔네 둘이 왜?
세상 사이좋은 남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다투기까지 한단 말인가?
‘하인들이 얼이 빠질 만도 하네…….’
“언제부터 싸우기 시작했는데?”
“조금 됐습니다. 한 10여 분 정도…….”
“그런데 아직도 싸우고 있단 말이야?”
“언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물리셔서 가 볼 수는 없었지만, 언뜻 들리는 소리로는 아직까지도…….”
“그렇구나. 내가 한번 올라가 볼까?”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둘이 싸우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지만, 호기심이 들기는 했다.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얼어붙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좀 그렇고 말이다.
나는 둘이 싸우고 있다는 2층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과연, 입구 근처에서부터 두 사람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고 있었다.
‘진짜 별일이네.’
일단 무작정 끼어들기보다는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상황인지 눈치를 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조용히 응접실 문 가까이 다가가,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러니까 나는! 네 행동이 요즘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
“제 행동이 뭐가 어때서요?”
듣자 하니 언성이 높아져 있는 쪽은 칼릭스였지만, 엘레니 역시 만만치 않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네 행동이 뭐가 어떠냐고?”
하!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최근에 어머니를 뵈러 간 적이 있기는 해?”
“그건……”
“변명하지 말고 언제 갔는지, 말할 수 있으면 해 봐.”
“…….”
칼릭스의 날카로운 추궁에 엘레니가 침묵했다.
“행선지도 밝히지 않는 외출이 늘어난 건 그렇다 쳐. 믿을 수 없을 만큼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것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네가 그렇게 어머니를 외면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외면한 게 아니라……”
“심지어 유리 누님께서도 쓰러진 어머니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돌보고 계시는데, 넌 대체 하는 일이 뭐야?”
“…….”
내 이름이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잘못은 해 놓고 싫은 소리는 듣기 싫다 이거야?”
“오라버니.”
엘레니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당신이 제 오라버니라고 해서 제게 아무 말이나 해도 좋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 내가 이런 소릴 하지 않도록 네가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거죠? 제가 외출을 했다가 늦게 돌아온다고 해서 오라버니에게 피해를 준 적이라도 있나요?”
“엘레니 로잔헤이어!”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오라버니의 일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칼릭스의 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엘레니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음, 확실히 내가 나설 타이밍은 아닌 것 같네.’
그나저나 엘레니는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길래, 칼릭스를 저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걸까?
‘그러고 보면…….’
세드릭의 동생, 테오도어가 수상쩍은 단서라면 엘레니는 내 모든 의문점의 시작이었다.
‘이 말다툼을 듣다 보면…… 뭔가 단서 같은 걸 얻게 될 수도.’
그렇게 판단한 나는 응접실에서 잘 보이지 않는 쪽에 몸을 감추고, 귀를 기울였다.
* * *
엘레니는 숨을 씨근거리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감히 나를.’
이제까지 칼릭스를 향해 느껴 본 적 없던 차원의 분노가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를 유리 엘로즈 따위와 비교해?’
그것도 자신과 더 짙게 피를 나눈 남매인 주제에?
엘레니는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어머니 말씀은 틀렸어.’
“그년이! 그 계집이 내 아들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거야!”
어머니는 모든 게 유리 엘로즈의 탓이라며, 그년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꼬여 낸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레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칼릭스와 정원에서 놀고 있을 때. 칼릭스가 예쁜 꽃다발을 만들길래 그게 자신의 몫이거나 아니면 어머니의 것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을 말이다.
그때 칼릭스는 엘레니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꽃다발은 그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되지 않았다.
“누나!”
칼릭스가 상기한 표정으로 부른 건 그들의 반쪽짜리 혈육이었다.
그 사실이 엘레니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던가?
어머니는 언제나 유리 엘로즈를 ‘그년의 딸’이라느니 ‘악귀 같은 계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엘레니에게 늘 그년의 딸을 이길 것을 종용하곤 했다.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날이면 엘레니는 밥을 굶거나,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기곤 해야 했다.
유리 엘로즈 따위가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엘레니는 늘 그런 식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한데 왜 오빠는 그런 유리 엘로즈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려 한 걸까?
심지어 유리 엘로즈는 그 꽃다발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엘레니는 고소하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유리 엘로즈가 꽃다발을 거절했을 때, 칼릭스의 마음 깊이 상처 입은 표정에 어처구니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칼릭스는 성장하면서 점점 더 유리 엘로즈를 싫어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긴 했다. 어머니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엘레니는 칼릭스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늘 마음속에 품고 지냈다.
‘그래,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칼릭스는 엘레니의 편이 아니었다. 절대로.
엘레니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척하지 말아요. 사실은 우리 편도 아닌 주제에.”
“뭐?”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니는 그 표정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노력하고, 그릇이 되기 위해 모든 일을 겪을 때 오라버니는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했잖아요!”
“엘레니 로잔헤이어,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시끄러워요!”
칼릭스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엘레니의 신경질이 칼릭스의 분노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너…… 아무래도 이상해.”
“나는 원래 이랬어요.”
그녀가 오라버니에게 이런 식으로 화를 낸 것을 알면, 어머니는 뒷목을 잡으며 기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어머니는 이미 패배자였다. 더 이상 엘레니를 두렵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정상으로 만들 거예요.”
“뭐?”
“오라버니가 우릴 배신하고, 무슨 멍청한 짓을 하더라도 날 막을 수는 없어요.”
“…….”
엘레니는 거기까지만 경고하고, 홱 뒤돌아서 응접실을 나왔다.
지금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칼릭스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
그 멍청한 남자가 중간에서 제멋대로 구는 바람에 엘레니의 계획은 또 뒤틀려 버렸다.
엘레니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테오도어 에스테반,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원래 엘레니가 테오도어에게 지시한 건,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유리와 소문이 날 만한 짓을 벌이라는 거였다. 다소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