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82)

131화

“에스테반 후작을 사칭하는 건 중죄야.”

“하하하! 과연 그까짓 일로 내가 벌을 받을 것 같나?”

테오도어 에스테반이 거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까부터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남자를 주의 깊게 주시했다.

“나는 폐하로부터 트란토 자작위를 수여받았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공녀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모르는 척하는 건가?”

테오도어가 가소롭다는 듯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트란토 자작위는 원래 오래전 우리 에스테반 후작가의 소유였다. 전통적으로 후계자가 미리 받는 작위였지.”

“!”

“황가에 반환된 그 작위를 폐하께서 굳이 내게 수여하신 게 무슨 뜻인지, 공녀가 정말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즉…….’

황제가 이 망나니를 에스테반 후작으로 세울 생각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이 작위가 이제야 내게 돌아온 게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며, 테오도어가 히죽 웃었다.

“뭐, 이 이야긴 이쯤 하면 될 것 같군. 공녀도 알아들은 것 같고 말이야.”

“…….”

“이제부터는 내가 공녀를 이리로 부른 목적에 대해 설명해 주도록 하지.”

큼, 하고 테오도어가 헛기침을 했다. 나는 일단 그가 무슨 개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 싶어 팔짱을 꼈다.

“내가 이렇게 공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공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두 번째 기회?”

“그래.”

테오도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나는 황제 폐하로부터 에스테반 후작이 될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남자다. 세드릭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내 생각은 많이 달랐지만, 일단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들어 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론을 참았다.

“그 말인즉, 세드릭 같은 썩은 동아줄 따위를 부여잡고 있어 봐야 공녀가 후작 부인이 될 일은 요원하다는 뜻이지.”

“…….”

인내심이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본론만 말해.”

“아직도 내 말뜻을 모르겠나?”

커험! 하며 테오도어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아주 듣기 싫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엔 왜인지 모르게 홍조까지 떠올라 있었다.

“내가 공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고 했잖나.”

“그랬지.”

“그건 즉, 공녀에게 썩은 동아줄이 아닌 제대로 된 동아줄을 잡게 해 주겠다는 뜻이다.”

“…….”

……뭐?

“공녀, 정식으로 청하지. 세드릭 따위가 아니라, 이 나의 약혼녀가 돼라.”

“……뭐?”

나는 깨달았다.

‘아.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잠깐 말이 안 나오기도 하는구나.’

이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 빤히 그를 쳐다보는데, 자신에게 취한 테오도어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도 놀랐겠지.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자비롭게 베풀어 주는 나에게 말이야.”

차라리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이것보단 생산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놀랍게도 진심이라고. 공녀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공녀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

나 정도 되는 사람이어야 그런 중대한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도 주는 거라고, 테오도어는 있는 대로 젠체했다.

그러더니 내게 이렇게 명령까지 하는 게 아닌가?

“세드릭을 버려. 그리고 내 약혼녀가 돼라.”

“잠깐, 당신…….”

나는 설마, 하며 되물었다.

“이미 결혼해서 아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테오도어가 크흠, 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쯤이야 이혼하면 그만이지!”

개소리의 절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들어 주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

테오도어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혹시 세드릭과는 일찌감치 갈라선 건가? 그렇다면 잘됐군. 곧바로 내 약혼녀가……”

“내가 너 같은 머저리랑 약혼을 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거야.”

“……뭐라고?”

“잘못 들었다면 다시 한번 말해 줄까?”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힘주어 말해 주었다.

“너 같은 썩은 쭉정이 따위랑 약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했어.”

“……공녀, 지금까지 내 얘기를 안 들은 건가?”

세드릭의 동생, 아니, 세드릭의 동생이라고 불러 주고 싶지도 않은 머저리는 내 말에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꼴을 보아하니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망상이 심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세드릭을 버리고 저 같은 노름꾼의 약혼녀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한담?

“난 에스테반 후작이……”

“넌 절대 에스테반 후작이 못 될 거야.”

나는 단언했다.

“그리고 영원히 세드릭을 넘어서지도 못할 거고.”

“이, 멍청한 계집이……!”

제 약혼녀 자리 따위로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건지, 테오도어의 얼굴에 뒤늦게 노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난 이미 세드릭 따위를 넘어섰어! 황제 폐하께서는……”

“세드릭이 정당하게 승계한 후작위를 유지하는 데 황제 폐하의 의견 따위가 대체 왜 필요하지?”

아무리 황제가 군주라고 해도 여기에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감히 황제 폐하에게 따위라고!”

테오도어는 말 그대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하고 사리 판단할 줄 모르는 계집에게 내가 과분한 제안을 했군!”

“틀려.”

나는 냉정하게 코웃음을 쳤다.“너같이 멍청하고 사리 판단할 줄 모르는 머저리가 하는 말을 들어 준 내게 감사 인사를 해야지.”

“이, 미친 여자 따위가……!”

화술이 30 오릅니다!

결국 말로 날 이길 재간이 없어졌는지, 테오도어가 나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치켜들었다.

여차하면 여자를 향해 손을 올릴 줄도 아는 쓰레기라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쓰레기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와 동시에…….

“……으아아악!”

테오도어 에스테반이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벽 쪽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나비 표본처럼 사지를 쫙 벌린 채 벽에 찰싹 고정되었으니까.

속박 마법에 성공합니다!

마나가 10, 지력이 10 오릅니다.

사지를 활짝 벌린 채로 테오도어가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마법이지.”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그가 달라붙어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기분이 어때? 이거 딱 너 같은 놈들한테 쓰라고 내 스승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마법이거든.”

“네 스승이라면……”

나는 봐주지 않고 남자의 정강이를 퍽! 소리 나게 걷어차 주었다.

“악!”

“따라 해. 공녀님의 스승님이시라면.”

“이 미친년이…… 아악!”

걷어찬 곳을 지그시 누르자, 남자가 체면도 차릴 줄 모르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지금은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심기가 뒤틀리면 어디를 또 걷어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할지도 모르잖아?”

“으, 으으윽…….”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공포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엘리야에게 이 마법을 배울 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과연, 이게 왜 호신 마법인지는 알겠어요.”

“음.”

“한데 이다음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신고?”

“신고라니.”

그때, 엘리야는 가차 없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십시오. 걷어차 주어야 할 곳이 하나 보일 겁니다.”

“……아하.”

……뭐, 사제 간에 나누기에 참 좋은 그런 대화였다.

‘공부도 됐고 말이지.’

나는 팔짱을 끼며 부러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주는데,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없어.”

“…….”

“자, 이제 말해 봐.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지?”

“그런다고 내가……”

내가 말 대신 무심하게 발을 치켜들자, 남자가 아직 걷어차이지도 않았으면서 “아아악!” 하고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어?”

“알, 알, 알겠다고요……!”

그제야 말투가 바뀌었다. 너무도 가소로워서 나는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크으으윽……!”

남자가 굴욕적인 표정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라?’

남자에게서 뭔가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나도 모르게 감각을 집중한 순간.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

비틀린 마류!

그것도 세실리아 때와 똑같이 정화할 수 없는 비틀린 마류였다.

‘역시 이 남자…….’

이로써 그릇이라는 것과 비틀린 마류가 관계가 있다는 건 분명해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남자는 분명 ‘황제 폐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그릇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황제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는 건가?’

내가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벌컥, 쾅!

“!”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방문이 열렸다.

아니, 열렸다기보다 걷어차여서 경첩이 부러졌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반파된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 집의 주인.

“유리 공녀!”

세드릭 에스테반이었다.

“세드릭 경.”

“무슨 일은,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세드릭이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멀쩡한 상태로 멋쩍게 웃으며 “그게요…….”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는데요.”

“예?”

“저기.”

나는 경황이 없어 보이는 세드릭에게 보란 듯이 벽 쪽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간 세드릭의 시선이…….

“……테오?”

마침내 제 남동생을 발견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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