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82)

130화

“…….”

기분…… 기분이야 좋겠지. 카미엘처럼 잘생기고,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사람이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덥석덥석 안아 주는 것도, 귀엽다는 듯이 뽀뽀해 주는 것도 좋긴 했으니까…….

‘……진심인 건가, 나?’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날 보며 카미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 끝에 그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 우리 반지부터 맞추자.”

“아니, 진짜……”

“공녀는 뭐가 좋아? 다이아몬드? 나는 공녀가 좋다는 건 뭐든 좋지만 금은 싫어. 내 머리색하고 똑같으면 촌스러울 것 같거든.”

급발진도 이런 급발진이 없었다.

내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말거나, 카미엘은 혼자서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다.

“링은 공녀 머리 색에 맞춰 백금이면 좋겠지? 내 사이즈는 아마 헤일런이 알고 있을 거고, 공녀 것만 재면 되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카미엘이 나를 땅 위에 내려 주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360도 회전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다 땅 위에 내린 것처럼 눈앞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사이 카미엘이 내 손을 잡아 올렸다.

그러더니 내 손바닥을 지분거리다가, 손가락을 제 손가락 사이에서 둥글리며 중얼거렸다.

“가늘어.”

“그야 전하에 비하면 그렇겠죠…….”

탈력해서 내가 중얼거리자, 카미엘이 “그런가?” 하며 말을 받았다.

그는 그러고서도 한참을 내 손을 조몰락거렸다. 나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말할 수 없이 부끄럽기도 해서 손을 꼼질거렸다.

그런 내 손짓을 손을 빼려는 걸로 오해했는지, 카미엘이 “어딜.” 하며 내 허리를 낚아채듯 껴안는 게 더 빨랐다.

“아!”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을 헤매는 내 약지를 입술로 앙 무는 게 아닌가!

“자, 자자자잠깐, 카미엘!”

너무 놀라서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군.”

“으아……!”

그가 중얼거릴 때마다 습한 혀가 내 손가락을 어루만지듯이 핥았다.

등줄기에 간지러우면서 오싹한 기운이 쫙 퍼졌다. 무릎에 힘이 풀리려는 나를 카미엘이 안정적으로 받쳤다.

“그, 그만…… 아얏!”

손가락 깨물었어!

경악해서 입을 벌린 내게, 카미엘이 입을 쪽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반지 대신이야.”

“…….”

약지에 또렷하게 남은 잇자국을 보며, 나는 기절하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참아 냈다.

카미엘은 그런 날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자, 그럼.”

“뭐, 뭘 또요?”

“뭘 또라니?”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나 정화 안 해 줄 건가?”

“아.”

깜빡 잊고 있었다.

“어쩜 이럴 수가…… 공녀, 날 이용해 준다는 약속은 다 거짓말이었나?”

카미엘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자기를 이용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용하지 않는 게 문제라는 투였다.

‘이 남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누군가한테 이용당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당연히 아무한테나는 아니지.”

카미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 대로 이용당하는 건 질릴 만큼 당해 봤어. 다른 놈이 시도했다면 진작에 죽여 버렸겠지만…….”

“네에?”

“공녀는 괜찮아.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 그러니까 얼른. 응?”

“아니, 잠깐 진정 좀 해 봐요.”

일단 그보다 중요한 건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점이었다.

‘카미엘에게 휩쓸려 깜빡 잊고 있었어.’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하자, 눈치는 또 빠른 카미엘이 “사서들이 걱정돼?” 하고 물었다.

“당연하죠.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것도 잊고 그 난리를 쳤는데…….”

“걱정 안 해도 될걸.”

카미엘이 또 아주 자연스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가 이쪽에 오지 말라고 했어.”

“……오지 말라고 했다고요?”

“응.”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저쪽에서 무슨 엄한 오해를 했을지 — 사실 오해는 아닐 테지만 —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 잘했지?”

“네, 네…… 잘하셨어요.”

어쨌든 저쪽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이 꼴을 실제로 목도당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나는 순순히 카미엘을 칭찬해 주었다.

“자, 그럼…….”

유혹적인 미소와 함께, 카미엘의 얼굴이 다시금 가까워졌다.

“……이제 그만 이용해 줄래?”

* * *

기를 다 빨린 느낌이다.

‘절세미인을 첩으로 둔 사람의 심정 같은 거,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건, 어쨌든 카미엘의 전폭적인 협조 덕분에 알아낸 것도 있다는 점이었다.

‘접촉을 하지 않고도 정화는 가능하지만, 신체 일부를 접촉한 채 정화하면 보다 정교한 컨트롤과 효율적인 정화가 가능해져.’

접촉을 하지 않았을 때 정화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반반 확률로 떠오른다면, 접촉을 했을 땐 확실하게 떠오른다는 점에서 착안해 실험을 해 봤는데, 역시나였다.

‘어쩔 수 없을 때를 빼고, 웬만하면 접촉한 채 정화하는 게 좋다는 건데…….’

접촉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카미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접촉 없이 정화하자고 하면……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

그뿐만이 아니라 계약 사항 위반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게 뻔했다.

‘보인다, 보여.’

솔직히 말해 카미엘과의 접촉이 마냥 싫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좀…… 자극이 지나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약지에 흐릿하게 남은 잇자국을 보면서 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를 맞추자는 것부터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이걸로 반지를 대신하자고 할 때는 정말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관계창 한마디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카미엘: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용당할 수 있어.”

‘이런 남자로 괜찮은 걸까, 나……?’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때.

“공녀님, 안에 계십니까?”

“응?”

나는 에나에게 눈짓을 해 문을 열게 했다. 필립이 예의 익숙한 은쟁반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또 편지야?”

“에스테반 후작저에서 온 편지입니다.”

“세드릭이?”

무슨 일이지? 나는 얼른 필립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봉인을 뜯었다.

거기에는 휘갈겨 쓴 듯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유리 엘로즈 공녀에게.

‘세드릭의 필체가 원래 이랬나?’

행동하는 것처럼 글씨도 반듯반듯했는데, 오늘은 묘하게 날려 쓴 듯한 느낌이 있었다.

‘아니면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쓴 편지거나…….’

어쨌든 더 읽어 봐야 알 것 같았다.

날씨가 점점 무더워져 가고 있는데, 잘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제가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급하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부탁할 일?’

공녀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 동생의 일로 공녀와 상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편지로 내용을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번 일에도 공녀께서 도움이 되어 주시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이 편지가 도착하는 즉시, 일전에 제가 공녀께 드린 열쇠를 이용해 저희 집을 방문해 주십사 청하는 바입니다.

혹 불가능하시다면 답신을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세드릭 에스테반 드림.

수수께끼 같은 편지였다.

‘동생의 일로 나와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고?’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인가, 그게……?

‘아, 혹시 전에 내가.’

그러고 보니 전에 세드릭을 압박하던 가신들과 그의 동생 앞에서 세드릭과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 척했던 일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뭔가 부탁할 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편지에 자세한 내용을 적지 않은 걸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일전에 우리 집 담벼락 밑에서 세드릭에게 받은 열쇠를 꺼냈다.

그 이후에 한 번도 꺼내 보진 못했지만, 이 열쇠가 나한테 있다는 거랑, 무슨 기능을 하는지를 잊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엄청난 열쇠기도 하고, 이거…….’

에스테반 후작저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는 열쇠라니, 까딱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간 대참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새끼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한 조그만 열쇠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런 엄청난 걸 그냥 서랍 속에 놓고 돌아다녀도 되려나?’

또 이렇게 처박아만 두면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 역시 세드릭이 원하는 바는 아닐 듯했다.

‘차라리 경량화 마법 주머니에 넣어서 들고 다닐까?’

코랄 제도의 하이 마켓에서 마나석을 구매할 때 받은, 엘리야가 나만 쓸 수 있게 개인화 마법을 걸어 준 경량화 주머니에 생각이 미쳤다.

뿐만 아니라 나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오는 도난 방지 마법도 걸려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에는 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먼저 에스테반 후작저로 가 봐야지.”

나는 조그만 열쇠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

손안에서 열쇠가 크기를 키우더니, 그와 동시에 내 발밑에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역시, 그 열쇠는 당신에게 있었군.”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테오도어 에스테반?”

세드릭이 아니라, 그의 망나니 동생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대번에 경계 태세를 취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야, 당연히 이 집이 내 집이니까.”

잘 차려입었어도 아버지 말마따나 썩은 쭉정이, 도박꾼의 냄새를 감추지 못한 테오도어 에스테반이 나를 향해 양팔을 벌려 보이며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망나니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집은 에스테반 후작의 집이야.”

“그러니까 내 집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다, 공녀. 말이 안 통하는군.”

“…….”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치 제가 에스테반 후작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남자에게, 나는 확인차 물었다.

“그 편지, 설마?”

“그래, 내가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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