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카미엘이 양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져서 “예?” 하고 되물었다.
“배포가 왜 여기서 나와요?”
“이안을 안아 주려고 했잖아.”
“……어…….”
“괜찮아. 공녀에게 화가 난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어쨌든 화가 나기는 했다는 뜻이잖아……?
“별수 없지. 내가 더 전력으로 임하는 수밖에.”
“거기서 더 전력을 다하면 대체 뭐가 되는데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묻자, 카미엘의 눈빛이 샐쭉하니 가늘어졌다.
“알고 싶어?”
“아뇨.”
나는 1초도 여유를 두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공녀가 알고 싶어 하기만 한다면 즉각 알려 줄 용의가 있는데.”
“필요 없다니까요.”
“정말?”
나른하게 되물어보는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등이 턱 하고 책장에 가로막혔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정말 필요 없어?”
“진짜 필요 없……”
……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내 정화 페널티!’
그러고 보니 또 정화력을 소모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카미엘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없을까? 응?”
……이 사람 혹시 내 페널티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카미엘이 잘 생각해 보란 투로 나를 타일렀다.
“이 얼굴을 좀 봐. 이대로 가면 아쉽지 않겠어?”
뭔 얘길 하나 했더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지만 그런 대단한 자신감이 용납될 만큼 잘생긴 얼굴이기는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흘긋 카미엘을 올려다보자, 내 기색이 바뀐 걸 귀신같이 눈치챈 남자가 능글맞게 물었다.
“어때, 생각이 바뀌었나?”
“무, 무슨 생각이요?”
“전처럼 내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고 싶은 생각?”
“…….”
아니거든요!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정화력을 소모할 만한 다른 곳이 없어…….’
내가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카미엘은 반대로 몹시 즐거운 듯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이해해, 공녀. 내가 좀 예쁘긴 하잖아.”
“그런 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이 정도 되는 얼굴에도 안 홀리면 그건 공녀의 눈에 문제가 있는 거거든.”
점입가경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홀렸거든요!”
“쉿.”
카미엘이 검지를 내 입술 앞에 올리며 말했다.
“여기 도서관이야. 조용히 해야지.”
“……~~!”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카미엘의 다리를 퍽 걷어차고 말았다.
카미엘이 성의 없이 “아야.” 소리를 냈다. 요만큼도 타격을 입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 보세요, 전하.”
“응. 듣고 있어.”
“제가 전하의 얼굴에 홀렸다 쳐요.”
“응, 응.”
“그건 사실 좋아할 일이 아니거든요!”
“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듯, 진심으로 의아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사람 진짜…….’
생각보다 허들이 낮은 사람인 거 아냐?
엘레니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했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이제 슬슬 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전하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얼굴만 좋다는 건데, 그게 좋으세요?”
“나쁠 건 또 뭐야?”
카미엘이 눈썹을 으쓱했다.
“어쨌든 공녀가 조금쯤은 나한테 넘어와 준다는 거잖아.”
그거면 다 됐고, 충분하다는 투였다.
‘아니…….’
말문이 막힌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카미엘이 말했다.
“그거면 난 만족해.”
“…….”
“일단은?”
얼굴만 마음에 들어 해 줘도 무조건 좋다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조그만 가시 같은 죄책감이 일어나 마음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카미엘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내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한 건 얼굴에 홀려서조차 아니었다.
‘물론 좋아, 잘생긴 거 좋기는 한데…….’
근본적으로 내가 저번에 그의 손을 잡으려 한 이유는, 정화력 페널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카미엘은 내가 손을 잡자고 하면 좋아하며 손을 잡아 줄 것이다.
정화를 해 주면 그것도 좋다고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말 안 하고 손만 잡자고 하면 이 남자, 계속 착각할 것 같은데…….’
그게 꼭 내 좋을 대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어쩌지?’
차라리 정화 페널티에 대해서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사람이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덜컥 나를 두렵게 했다.
하지만 나긋하고 부드러운 — 어딘지 황홀하게까지 보이는 —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게 맞지 싶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 어처구니없어서 내게 실망할 거야.’
그래도 저대로 착각하게 두는 건 옳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저 눈이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상상을 하니 어쩐지 가슴이 뜨끔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전하.”
“응, 공녀. 듣고 있어.”
“사실 제가 그날 전하의 손을 잡으려고 한 건요…….”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내게 걸려 있는 정화력 페널티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시스템 어쩌고 하는 소린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충격 고백을 다 들은 카미엘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전하? 제 말 이해하셨어요?”
“이해했어.”
“그럼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나는 살짝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카미엘이 “우선…….” 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 몰랐어.”
그 말에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은 내가 백번 잘못한 게 맞았으니까.
“당연히 그러셨겠죠.”
나는 침울하게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미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공녀가 내 손 한번 잡자고 그런 핑계까지 만들어 낼 줄은…….”
“……네?”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런 말이었다.
“전하, 저 지금 농담한 거 아닌데요.”
“그래, 공녀의 진심이 뭔지 잘 알 것 같아.”
“아니라니까?”
“설마 나에 대한 공녀의 마음이 그렇게 깊어져 있을 줄이야…….”
“아니라고!”
나는 결국 언성을 높이며 카미엘의 어깨를 찰싹 때리고 말았다.
“사람 말을 좀 똑바로 들어!”
이 답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아야, 때리지 마.”
전혀 아프지도 않으면서 카미엘이 엄살을 떨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 머리, 괜찮은 건가?’
내 표정을 보며 카미엘이 조금 웃었다.
“농담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마. 사실 이해했어.”
“아, 역시…….”
“공녀한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거잖아?”
나는 눈을 감았다. 단전 깊은 곳에서 한숨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이걸 또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지? 어떻게 해야 이해를 시켜 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
“아니야? 그럼 나 이만 집에 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냇물에 솜사탕을 씻어 버린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짓는 날 보고 카미엘이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격정을 이기지 못한 듯 나를 덥석 끌어안은 것이다.
“자, 잠깐, 전하!”
“어떡하지?”
카미엘이 날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기겁해서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렸다.
“가, 갑자기 왜 이래요!”
정화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Yes를 선택할 틈조차 없었다. 카미엘이 너무 흡족한 나머지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공녀가 날 필요로 하다니. 너무 좋아.”
“꺄, 꺄악!”
좋다는 말로만 끝이 아니었다. 카미엘은 그 자리에서 나를 안은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돌기까지 했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자기를 이용했다는 말에 실망하지 않은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이렇게 좋아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거듭 확인했다.
“진짜 제 말 똑바로 들으신 거 맞아요?”
“내가 어떻게 공녀 말을 똑바로 안 듣겠어?”
나는 어떻게든 카미엘을 밀어내려고 하면서 말해 봤지만, 카미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볼에 쪽 입을 맞추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해했어. 정말이야.”
“하아…….”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그런 내게 카미엘이 차근히 설명해 보였다.
“정화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공녀의 마나가 줄어드는데, 공녀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거잖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이해한 건 맞는 것 같은데…….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우리 반지부터 맞출까?”
……네?
“바, 반지요?”
“응, 반지.”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려 달라는 말도 잊고 되묻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그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데요?”
여기서 대체 반지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는 건데?
“전하, 이 상황은 전하께서 제게 실망을 하셔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내가? 왜?”
카미엘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내가 공녀한테 실망을 해야 하지?”
“그야…… 제가 목적을 위해 전하를 이용했으니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공녀에게 나 자신을 언제든 기꺼이 제공할 의사가 있으니까.”
“제공이라고요?”
난감한 단어 선택이었다.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카미엘이 “걱정 마. 정말 걱정하지 말라니까.” 하고 거듭해서 나를 달랬다.
“나도 그 과정에서 즐길 수 있는 건 충분히 다 즐길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아니…….”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입을 떡 벌린 채 버벅거리는 나를 보며, 카미엘이 느긋하게 눈매를 휘었다.
“어쩌면 공녀가 얻는 이득보다 내가 얻는 즐거움이 더 클 수도 있고.”
“그, 그그그, 그런 말을 그런 식으로……!”
“지금 당장 시험해 볼래?”
펑, 하고 얼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카미엘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기분 좋게 해 줄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