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82)

128화

도서관은 어제와 같이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제 내일 또 볼 거라고 했는데.’

오늘은 혹시 바쁜 건가?

어제 한 추측 때문에 이안을 보기 껄끄럽다고 생각한 게 조금 전인데, 또 막상 없으니까 아쉽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오늘은 혼자 조용히 자료를 찾아보도록 하자.

나는 사서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카트를 끌고 어제 못다 살핀 서가 쪽으로 향했다.

‘아하…… 오늘도 꽤 시간이 걸리겠군.’

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서가를 또다시 살필 생각을 하니 살짝 막막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질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단단히 결심하고, 마침 ‘비틀린’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책 한 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제처럼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어느새 서가의 거의 대부분을 탐색하는 데 성공했다.

아니 정정, 성공했다고 하면 어폐가 좀 있다.

‘탐색은 했지만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내용을 찾는 데는 실패했으니까…….’

마류가 아니라 카시스 황가와 관련한 내용을 살펴봐야 하는 걸까?

‘건국사 같은 거라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위 칸에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책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오늘도 높은 곳에 있는 책을 손에 넣으려고 하시는군요.”

턱, 하고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책장을 짚었다.

“!”

깜작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이안이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안.”

그가 대답 대신 반대쪽 팔을 내가 꺼내려고 한 책을 향해 뻗었다.

“…….”

자연히 나는 책장을 짚은 이안의 오른손과 가슴팍, 그리고 책을 향해 뻗은 이안의 왼손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책장에 앞이 막힌 채로 이안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뜻이다.

“저, 저기, 이안.”

혹시 사서들이 이 모습을 볼까 당황한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도, 이안은 그저 여유롭게 내가 원하는 책을 꺼내 줄 뿐이었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하지만 내가 책을 손에 넣었는데도, 이안은 물러서 줄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안?”

“…….”

대답이 없었다. 나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책장을 짚은 이안의 오른손만 뚫어질 듯 바라볼 뿐이었다.

‘뭐, 뭐지, 이거?’

비켜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기엔 이안의 분위기가 좀 묘한데.

입이 마르는 듯했다. 내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동안, 이안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차분히 닿고 있었다.

“저, 이안……”

“잠시만.”

이안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까?”

“네?”

이대로 왜?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만 껌뻑거렸다. 이안이 조금 힘없이 웃는 소리가 드러난 내 목덜미에 닿았다.

……간지러웠다. 약간 소름이 돋기도 했다.

나는 음…… 하고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

이안은 다시 또 대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조금 기다렸다.

여기서 이안을 냅다 뿌리치면 그가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고, 괜한 소란을 피워 사서들의 주목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공녀.”

마침내, 느른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네, 이안.”

“나,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이안이 내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품에 가둬 놓기까지 해 놓고 눈까지 마주치는 건 좀 그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뭐요?”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될까요?”

이안이 그제야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을 처연하게 내리깔고서 말이다.

하지만 처연한 건 처연한 거고, 이건 이거였다.

“안아 달라니, 무슨……?”

“내가, 오늘 좀 힘이 들어서.”

이안의 말투가 힘없이 늘어졌다.

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덥석 그를 껴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는 눈이 없기는 하지만, 여기는 공공장소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망설이는 걸 알면서도, 이안은 평소와 달리 이쯤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우린 최소한 친구이긴 하잖습니까, 공녀?”

“…….”

“친구 사이에 하는 우정을 담은 포옹도 안 되는 겁니까?”

“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꼭 안 된다고 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난감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저렇게까지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는데 외면하기가 좀 그랬다.

‘그래, 이안 말대로 포옹은 친구 사이에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단순히 한번 안아 주고 도닥여 주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본인이 절대 오해도 안 한다고 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을 천천히 이안을 향해 뻗는 순간이었다.

우당탕쿵탕!

“!”

“…….”

마치 누군가 책장을 뒤집어엎기라도 한 듯, 엄청난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

“뭐, 뭐죠?”

나는 깜짝 정신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안과 서가에 가로막힌 탓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볼 수는 없었다.

“……별일 아닐 겁니다.”

이안이 천천히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토다다닥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얼굴이 질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이 도서관의 사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가 빠르게 우리를 향해 사죄했다.

“제, 제가 실수를 해서 책장이 부서졌…… 아니 책들이 엎어졌는데, 그게…….”

너무 놀란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네. 가서 정리나 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사서가 후다닥 우리 앞을 떠났다. 이안이 습관적인 미소를 흐릿하게 머금은 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음…….

“……저기 이안, 괜찮은 거 맞죠?”

지금이라도 안아 줄까, 하기에는 타이밍도 그렇고 여러모로 다 글렀다.

이안이 그런 나를 보며 무어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태자 전하! 전하, 여기 계십니까?”

나는 흠칫 놀라 이안과 거리를 벌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안을 찾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런.”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대답하는 이안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한숨 같은 것이 섞여 있었지만, 그를 찾는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얼른 가 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전하를 찾고 계십니다.”

“…….”

폐하, 라는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이안을 탐색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말았다.

‘설마……?’

이안이 황제와 그릇에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갑작스럽게 불쑥 고개를 들었다.

“……유리? 왜 그런 눈으로……?”

내 눈초리에 그런 의심이 묻어난 탓일까, 이안이 약간 놀란 듯 중얼거렸다.

“아, 아니에요.”

나는 일단 손부터 내젓고 말았다.

“그, 잠깐 무슨 생각이 나서…….”

“…….”

이안은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군요.”

“저기, 이안. 방금 그건……”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이안은 내 설명을 들을 태세가 아니었고, 설상가상으로 엘런이란 사람은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예.”

이안은 평소처럼 가지런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치 가면을 쓴 연극배우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만.”

석연찮은 느낌만을 남긴 채, 그가 도서관을 떠났다.

“…….”

나는 순식간에 홀로 남고 말았다. 왠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나는 조심스럽게 관계창을 열어 보았다.

에이드리언: “당신을 위한 새장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미친 걸까?”

‘엥?’

무슨 뜻이지, 이거?

어쩐지 불길한 한마디를 확인하고 있는데…….

“……유리 엘로즈 공녀.”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너무 놀라 퍼뜩 어깨를 떨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

“대, 대공 전하?”

고개를 돌려 보니 카미엘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발소리도 안 내고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게 카시스 황실 핏줄 전통인가?

“대, 대체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조금 전에?”

조금 전이라면…… 엘런이라는 사람과 함께 도착한 건가?

나는 약간 경계심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미엘이 싱긋 웃었다.

“다 알아, 공녀. 공녀도 여기서 의도치 않게 나를 만나서 반가운 거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음, 내 마음도 정확히 공녀와 같아.”

이 사람이 진짜?

하도 어이가 없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는데도, 카미엘은 조금도 기가 죽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그나저나 공녀, 이렇게 만난 김에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 뭔데요?”

“나 말이야, 요즘 좀 힘이 드는데…….”

그가 나른하게 목소리를 깔며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휘어진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반짝였다.

“안아 주면 안 되나?”

그 말에 나는 멈칫,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설마 당신……?”

“응. 다 봤어.”

카미엘은 웃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저기, 그건 그러니까 그게…….”

나도 모르게 그의 웃는 얼굴의 압박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카미엘은 봐주지 않고 바로 나와의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혔다.

“왜 피하는 거야?”

“네, 네?”

“내가 다 봤다고 하니까 무서워?”

“그게 아니라…….”

“…….”

카미엘이 말없이 히쭉 웃었다. 그 웃음에서 나는 책이 엎어진 게 아니라 책장이 부서진 게 맞고,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게 눈앞의 이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고 말았다.

“……뭐, 어쩌겠어? 공녀의 배포가 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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