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렇게 몇 통이나 답장을 썼을까?
“……녀님, 공녀님?”
“어, 응?”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에나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에나?”
“각하께서 공녀님을 부르셨습니다.”
아, 그런가?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내가 일거리를 가로챈 걸 눈치채신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일단 쓰고 있던 마지막 답장을 마저 다 쓴 다음, 봉투에 넣고 봉인했다.
“에나, 이 편지들을 들고 나를 좀 따라와 줘.”
“네, 공녀님.”
나는 그대로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공녀님.”
문 앞에 서 있던 집사가 나를 보고 반가운 낯을 했다.
“필립, 설마 혼이 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 아직 그 정도는 아니십니다.”
필립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뼈 있는 소리를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조금 웃고 말았다.
“일단 들어가 보시지요.”
“음, 고마워.”
“공작 각하, 유리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집사가 집무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에나에게 건네받은 은쟁반을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아버지께서 그런 나를 보고 대뜸 미간부터 찌푸리셨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아버지.”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인봉까지 깔끔하게 끝마친 답장들을 아버지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조금 해 봤을 뿐이잖아요.”
“넌 아직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
나는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제 생각엔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
“죄송하지만 어머니께서 단기간 내에 회복하실 것 같지가 않아요.”
“…….”
아버지께서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으신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로잔헤이어의 적장녀예요. 그 말은 즉, 제가 유사시에는 안주인의 역할을 대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나는……”
“아버지께서 제게 그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으신 건 알아요.”
“…….”
“하지만 이건 제가 책임을 방기하는 꼴밖에 안 돼요.”
아버지는 내 말에 침묵을 지켰다.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전부는 저도 다 감당할 능력이 안 돼요. 그러니까 쉬운 일부터 반만이라도 맡겨 주세요. 아버지도 칼릭스도 요즘 꼴이 말이 아닌 거 아시죠?”
‘협상의 달인’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로잔헤이어 공작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거참.”
아버지가 혀를 찼다.
“언제 이렇게 큰 건지. 대견스럽구나.”
“……네?”
무슨 소리야, 이게? 나는 좀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제 할 일 찾아서 하겠다는 것뿐인데…….”
“그래, 그래. 아무래도 내가 너를 너무…… 연약하게만 본 모양이구나.”
“…….”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를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네 말이 옳다. 내일부터는 네게 일을 전해 주도록 할 테니, 한번 잘 배워 보도록 하거라.”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안주인 역할 대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칭호, ‘공작 부인의 권한 대행’이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30, 기품 +30, 정신력 +50.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가솔들이 당신의 위엄에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 봐, 이럴 줄 알았어!
여러 가지 능력치를 한 번에 올려 주는 칭호에, 나는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그렇게 좋으냐?”
아버지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얼굴을 엄하게 하며 이렇게 일렀다.
“모르는 것이 있거든 언제든 물어보고, 부담이 된다면 일의 양을 줄여 달라고 해도 된다.”
“처음부터 약한 소리는 하기 싫은걸요.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
아버지가 나를 보며 다시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녀석, 씩씩하기는…….” 하고 중얼거리셨다.
흐뭇한 표정이었는데도, 그 얼굴에 흐릿하게 남은 피곤함이 엿보였다.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아버지께선 황궁에 다녀오셨지.’
그렇다면 혹시 세드릭 동생의 작위 수여식도 참관하지 않으셨을까?
‘굳이 세드릭에게 물을 필요 없이, 아버지께 여쭤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아버지.”
“음?”
아버지께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셨다. 나는 물었다.
“혹시 오늘 황궁에서 작위 수여식이 있지 않았나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어, 그게요.”
나는 사실 오늘 황궁 도서관에 다녀왔으며, 오는 길에 세드릭을 만나서 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부를 하느라고 황궁 도서관까지 다녀왔단 말이냐?”
“그,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 부탁을 살짝.”
“그렇게까지 뭐든 열심히 할 필요는 없거늘…….”
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이미 합의한 일거리마저 빼앗길까,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작위 수여식 말인데요. 어떻게 된 건지 아버지는 혹시 아세요?”
“에스테반 후작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하면 바로 그런 동생이 있다는 점이지.”
아버지의 말투는 작위 수여식에 대해 설명한다기보다 세드릭을 사위로 생각하는 일을 좀 재고해 봐야겠다는 투로 들렸다.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 그런 사람에게 작위를 수여하신 걸까요?”
“이번 일에 대해 폐하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구나. 심지어 네 말을 들어 보면 에스테반 후작과도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내용인 듯하니…….”
아버지가 쯧, 하고 혀를 차셨다.
“어지간한 망나니여야 폐하의 결정에 수긍하는 척이라도 해 볼 텐데 말이다.”
“그 정도인가요?”
“노름꾼이 되기 전에도 썩은 쭉정이 같은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자작위는 과하지.”
“자작위씩이나.”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으셨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예전엔 분명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이것도 설마 그놈의 루트가 수정되었기 때문인 걸까?
“……아버지, 설마 폐하께서는 에스테반 후작가의 계보에 관여하실 생각인 걸까요?”
“설마,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한숨은 아까 것보다 조금 더 깊었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구나.”
“말도 안 돼요.”
오러 마스터인 데다가 성실함의 표본 같은 세드릭 대신 노름꾼인 남동생을 앉히다니!
“폐하께서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요?”
“수여식에서 테오도어, 그놈이 ‘폐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그릇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할 때 폐하께서 대단히 흐뭇해하셨다. 벌써부터 그렇게 신임을 몰아주는 걸 보면, 에스테반 후작도 긴장해야 할 거다.”
“…….”
“……유리? 표정이 왜 그런 거냐?”
“……아, 아니에요. 아버지. 그냥 큰일이 났다 싶어서…….”
“그래. 넌 에스테반 후작과 친분이 있으니 걱정이 될 테지.”
“아버지, 저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음?”
“이만 실례할게요.”
나는 의아해하는 아버지를 내버려 두다시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황제 폐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그릇이 되겠다고?’
그릇.
작위 수여식은 군주와 봉신 간에 계약을 맺는 일이다. 보통 군주는 봉토와 작위를 수여하고, 봉신은 그 대가로 군주에게 무력과 충성을 담보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하는 맹세는 ‘충성스러운 검이 되겠다’고 해야 맞았다.
‘한데 그릇이라니.’
그러고 보면…….
“같은 맥락으로 에스테반 후작도 여기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예? 설마 그 뜻은?”
“에스테반 후작도 제 친척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에스테반 후작, 세드릭이 이안의 친척이라면…….
‘세드릭의 동생, 테오도어도 황실의 혈통을 이었다는 뜻이 돼.’
머릿속에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황가의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카시스 황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유리.”
그때 아버지는 잘못 처신했다가는 황가와 로엔 대공의 다툼에 말려들 수도 있다는 이유를 대셨다.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게 전부일까?’
황가가 혹시 어떤 꺼림칙한 비밀을 숨기고 있고, 아버지께서 그 낌새를 채신 거라면?
그리고 그게 만약 ‘그릇’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다면……?
꿀꺽.
타는 듯한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렇다면 설마?’
……여기에 이안도 관련되어 있을까?
* * *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채로 무뎌질 줄을 몰랐다.
어쨌든 난 피곤한 몸을 위해 홍차를 쏟아붓고,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일거리들을 일단 처리했다.
어제까지 아버지께서 보시던 안건들인지라, 거의 정리가 되어 있어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이안이 잡아 준 황실 도서관 출입 시간이 거의 다가와 있었다.
“…….”
안 갈 수는 없지…….
‘오늘도 이안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릇이라는 게 꼭 꺼림칙한 비밀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느낌으로는…… 당연히 불길하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안이 그릇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정해진 건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이안을 피해서는 안 돼.’
오히려 접근해서 사실을 알아볼 생각을 하는 게 맞았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오늘도 황궁 도서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