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82)

126화

그 눈빛을 마주하고도 엘레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며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제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어요.”

“하.”

흔치 않게, 이안의 얼굴이 먼저 일그러졌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뭐라고 할 의욕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가증스러운 꼴을 더 보기도 싫었고, 시간을 낭비하기도 싫었다. 이안은 아예 말하기를 포기하고 엘레니를 내버려 둔 채 도서관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나와서 생각할수록 더 열이 받는 느낌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그가 유리를 생각하는 마음을 저따위 몇 마디 말로 이간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자체가 모욕적이었다.

‘대체 한집에서 자란 언니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자매가 배다른 자매답지 않게 사이가 좋으며, 그중에서도 엘레니가 유리를 유독 따른다는 소문을 떠올리자 더 화가 났다.

유리는 저 순진한 얼굴 아래 숨겨진 속마음에 대해 알고 있을까?

여태까지 저런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유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유리의 평판을 떨어트려 온 걸까?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리며 지나가려던 사람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이안의 얼굴은 싸늘해져 있었다.

유리의 지근거리에 저렇게 등에 칼을 꽂아 넣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도저히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초조하고, 걱정스러웠다. 유리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멍청하다거나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엾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반대로 알고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안쓰럽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유리를 그의 품에 품어서 그가 보호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살게 하고 싶었다.

저런 헛수작 따위 통하지 않게 지켜 주고 싶었다. 유리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종자 따위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안온하게, 바람 한 점 닿지 않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

어느새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이를 악물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푸르게 핏줄이 돋은 제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면서, 이안은 생각했다.

‘내가 왜 참고 있는 거지?’

그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켜 주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은가?

비록 그 기저에 그 사람을 자기 영향권 아래 포함하고 싶은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한들…….

보호하는 행동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짧은 순간,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이듯 흔들렸다.

마음에 이는 바람이 방향을 바꿔 불기 시작했다.

* * *

이안이 매몰차게 떠나 버린 뒤.

도서관에 남겨진 엘레니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 할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백분을 바른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엘레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 내는 중이었다.

“공녀는 원래 말을 이런 식으로 합니까?”

“무슨 말씀이냐니, 사람 말뜻도 못 알아듣고 그럴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롱하는 듯한 어투, 기가 차다는 듯한 적나라한 눈빛, 매몰차게 사람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태도까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드리언 카시스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신사적으로 구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자신이 고작 그 한마디를 했다고 가면 벗어 던지듯이 태도를 바꾸다니.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너에게는 겉치레조차 차릴 필요가 없다고 깔아뭉개진 듯한 기분이었다.

‘유리 엘로즈에게는 그렇게 저자세로 나갔으면서…….’

눈치 빠른 엘레니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유리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가식이 아니었다. 특히 오늘 도서관에서 본 그는 정말 진심으로 유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결국 엘레니는 모양 좋은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고 말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가만두지 않겠어.’

자신에게 준 모욕을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고 말이다.

엘레니는 자신이 황태자와 유리의 친분을 얕보는 듯한 발언을 했을 때 이안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던 것, 그리고 아주 잠깐 대답이 늦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걸 보면 그녀의 이간질은 분명 통했다.

이안이 그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녀가 한 말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엘레니는 일단 그 사실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게다가…….’

오늘 그녀가 얻은 소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엘레니는 자신이 빠져나온 서가에 한 번 흘긋 시선을 주었다.

‘신성 마법도 마법의 일종이라고 했지.’

그리고 마법사의 공통적인 약점.

‘진명(眞名).’

유리에게서 정화력을 빼앗을 방법에 대해 확실하게 조사가 끝난 건 아니었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진명을 알아내야 해.’

그래야 최소한 유리의 마법을 끝장내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 *

황궁 도서관이 위치한 내궁에서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외궁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늦으면 또 칼릭스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까, 빨리 돌아가야지.’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라?’

세드릭 아니야, 저거?

때마침 같은 시점에 그쪽에서도 날 발견했는지, 세드릭이 멈칫했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경!”

반가운 마음에 그쪽을 향해 다가가던 나는, 세드릭의 표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이긴 한데…….’

안색이 안 좋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미묘한 부분에서 당황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경?”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이대로 ‘그렇군요.’ 하고 모른 척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다소 캐묻는 한이 있더라도 사정을 들어 주는 게 좋을까?

내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세드릭이 “사실,” 하고 입을 열었다.

“동생이 작위를 받게 되었다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경의 동생이요?”

세드릭의 동생이라면 테오도어 에스테반?

‘그 노름꾼인 데다가 주제도 모르고 에스테반 후작위를 탐냈던 남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물었다.

“경, 설마 다른 동생이 하나 더 있는 건……?”

“아닙니다.”

“아, 역시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난 당황한 기색을 영 감추지 못했다.

그 노름꾼이 대체 뭘 했다고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는단 말인가?

눈치를 보아하니 세드릭도 바로 그 점을 알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그가 무슨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어서는 답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얼른 세드릭에게 말했다.

“경, 일단 빨리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할 필요는 없어요. 얼른 가 봐요!”

“예.”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고서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게서 뒤돌아섰다. 나는 잠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럽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살짝 물어보거나 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좀 늦긴 했지만, 다행히 칼릭스뿐만 아니라 엘레니도 집에 없었다.

아버지 역시 황궁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듯했다.

‘좋아. 오늘 늦게 돌아온 건 숨길 수 있을 것 같군.’

“공녀님, 돌아오셨습니까?”

“아, 집사.”

갑작스러운 부름에 뒤를 돌아보니, 필립이 봉투가 수북이 쌓인 은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그건……?”

“아, 그게…….”

필립이 난처한 듯 대답했다.

“마님 앞으로 도착한 초대장입니다.”

“아.”

새어머니가 칩거를 선택한 뒤, 우리는 대외적으로 그녀가 몸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사교 활동을 폭넓게 하던 사람인지라, 사람들은 사교 행사를 열 때마다 공작 부인이 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예의상 보내는 초대장을 빼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긴 하겠지만.’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니께선 아직 답장을 쓰실 만한 상태가 아닐 텐데.”

“예, 그래서 일단 공작 각하의 집무실에 가져다 놓으려고 했습니다.”

새어머니가 앓아누운 뒤로 집안 대소사를 대부분 아버지가 처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초대장에 대한 답장까지 아버지께서 도맡아 하고 계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음, 집사.”

“예, 공녀님?”

“혹시 그 초대장들 말이야, 내가 답장을 하면 크게 문제가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집사는 대대로 로잔헤이어 가문을 모셔 온지라, 이런 문제에는 해박했다.

“공녀님께서는 이 로잔헤이어의 적장녀로서 유사시에 안주인을 대행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니까요. 마님 대신 초대장에 답장을 하신다고 해서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그 초대장들 내 방으로 가져다주겠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각하께서 한 시간 정도는 일찍 주무실 수 있겠군요.”

“아버지도 말이야, 이런 일 정도는 내게 맡겨 주셔도 좋을 텐데.”

나는 투덜거리듯 하면서 내 방으로 앞장섰다. 집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다 공녀님을 염려하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알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배려만 받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야…….”

“집사가 말했다시피 나는 로잔헤이어의 적장녀지.”

이런 식으로 배려 아닌 배려를 받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는 꼴밖에 안 된다.

‘아무래도 아버지께 말씀을 좀 드려 봐야겠어.’

일이 늘어나는 건 달갑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을 죄다 남에게 맡겨 놓고 속 편하게 사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 번도 이렇게 내가 해야 할 일을 누가 대신 해 준 적이 없어서 그런가, 어색하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나 능력치도 올려야 한단 말이야.’

공작 부인의 대행으로 인정받아 집안일을 한다는 건 지력, 화술, 기품, 그리고 정신력에 좋은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여러모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집사가 내 책상 위에 초대장이 수북한 은쟁반을 내려놓아 주었다.

“일에 집중하실 수 있게 차를 한 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어.”

나는 외출복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초대장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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