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 아니, 전하.”
나는 사서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바꿨다.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음.”
이안이 약간 멋쩍게 웃었다.
“열심히 시간을 내서 와 봤습니다……?”
단칼에 못 온다고 해 놓고서 모습을 드러낸 게 스스로도 좀 민망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안의 민망함을 덜어 줄 겸, 나는 웃으며 물었다.
“저 도와주시려고요?”
“글쎄요.”
이안이 내가 힘겹게 꺼내려던 책을 간단히 꺼내 건네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보고 싶어서?”
“…….”
방심한 사이에 훅 치고 들어온 말에, 나는 책을 건네받는 것도 잊고 눈만 깜빡거렸다.
“안 받습니까?”
“아, 아뇨. 받을 거예요…….”
내가 허둥지둥하며 책을 받자, 이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마법을 열심히 배우고 계신 모양이네요.”
“그런 셈이라고 할까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숨기고, 나는 하하 웃었다. 다행히 이안은 내가 단순히 민망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마침 저도 도서관에서 볼 책이 있는데.”
“어, 그럼 같이 읽을까요?”
내가 마류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 건 어차피 기록이 될 테니 숨길 사항도 아니었다. 정확히 뭘 찾고 있는지 말하지만 않으면 될 문제였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책을 몇 권 더 찾을 생각인데. 전하도 책을 찾으셔야 하죠?”
“저쪽 자리에 함께 앉도록 하죠.”
“좋아요. 이따 그쪽으로 갈게요.”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반대편 서가로 향했다.
나는 끌고 온 카트에 책을 몇 권 더 골라 실었다.
‘일단 다섯 권 정도만 가져가야지…….’
한 번에 너무 많이 책을 가져가면 주목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카트를 끌고 이안과 약속한 책상으로 가서, 나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천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 때문에 책을 읽을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슨 처리를 한 건지 책을 읽기에 적당한 조도의 햇살만이 나른하게 비추는 게 아닌가?
‘역시 황궁 도서관…….’
사소한 데까지 배려한 설계에 감탄하며, 나는 팔랑팔랑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안이 말없이 내 앞에 다가와 앉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조용히 서로의 책을 읽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마류학보다는 마물의 생애 주기 쪽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책이군.’
원하는 내용을 찾기 힘들다고 판단한 책을 밀어 놓고, 다른 책을 펼치고.
다 본 책을 카트에 실어 사서들에게 돌려주고, 또 다른 책을 담아서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똑같이 자료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책을 사서에게 돌려준다.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똑똑.
“!”
이안이 가지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웃고 있는데도 여전히 피로하고 까칠해 보이기는 했다.
“무슨 일이라도……?”
“시간이 다 됐거든요.”
“아.”
나는 고개를 들어 얼른 시계를 살펴보았다. 과연, 출입증에 기재된 시간을 10분 정도 남겨 두고 있었다.
“계속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저도 슬슬 이만 돌아가 봐야 해서.”
“아니에요, 이 정도면 오늘은 충분해요.”
비록 원하는 내용을 찾진 못했지만, 서가를 반 이상 살펴보는 덴 성공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물었다.
“혹시 이안, 저 내일도 여기 출입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리가 없죠.”
이안이 어제와 달리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사용하고 있던 펜으로 즉석에서 출입증을 적어 주었다.
“내일 같은 시간에 여기에 오실 수 있게 적어 드렸습니다.”
나는 출입증을 소중히 받아 품속에 챙겼다.
“고마워요. 혹시 이안도 내일 같은 시간에 여기 오시나요?”
이안의 눈동자가 다소 짓궂게 반짝였다.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흠.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나도 부러 맞받아치듯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늘 하루 겪어 본 결과, 이안은 꽤 조용해서 같이 공부하기 좋은 파트너였거든요.”
게다가 그는 책을 읽으면서 필기하는 버릇이 있었다. 펜촉이 고급 종이를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는 무척 듣기 좋았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저야말로 황족 중에 친한 사람이 있어서 살았어요. 역시 연줄이 좋네요.”
“?”
이안이 약간 의아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제가 아니어도 도서관에 출입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네?”
이게 무슨 말이야?
“황제 폐하께 부탁을 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닙니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공녀의 동생들이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지 않았습니까?”
“그…… 아주 옅기는 한데요.”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폐하로부터 황가의 핏줄을 이었다는 공증을 받는 거니까요.”
이안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가를 받은 사람은 황실 도서관에 출입할 자격이 생깁니다. 직계인 저처럼 출입증을 써 줄 권한은 없지만, 같이 출입하는 건 가능합니다.”
“아…… 그런가요?”
“같은 맥락으로 에스테반 후작도 여기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예?”
나는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자제하고 있던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설마 그 뜻은?”
“에스테반 후작도 제 친척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시원하게 인정하면서, 이안이 “그쪽과도 좀 멀긴 하지만.” 하고 덧붙였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말했다.
“몰랐어요.”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앗, 그러고 보니 로잔헤이어의 공녀라면 제국 귀족들의 인척 관계를 꿰고 있어야 정상인데.
“잠깐 깜빡했어요.”
“저도 계보학 시간에 존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안은 너그럽게 내 변명을 이해해 주었다.
바로 그때.
“저, 전하.”
사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내게 퇴장 시간은 알려야겠는데, 황태자와 같이 있어서 곤란한 듯했다.
“미안해요. 곧 나갈 거예요. 신경 쓰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대화 중에 방해를 해서 송구합니다.”
“책은……”
“여기 두고 가시면 저희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도 늘어놓은 물건들을 챙기기 전에 일단 나를 배웅해 주려는 건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나오실 필요 없어요.”
피곤한 그에게 배웅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정리하고 나오세요.”
“하지만……”
“내일 또 볼 거잖아요.”
그 말에 이안이 “그렇긴 하군요.” 하고 힘없이 웃었다.
나는 ‘안녕히 계세요.’ 대신 ‘내일 봐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도서관을 나섰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 그런 내 등을 주시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 * *
……그렇게 유리가 도서관을 떠난 후.
옅게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안의 입술에서 미소가 자취를 감추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지운 그를 사서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 일은…… 대강 만회한 것 같지?’
기회주의자인 이안은 오늘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오늘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고, 그 덕분인지 신경은 여전히 예민했지만…… 어제와 달리 그 사실을 절대 유리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전략은 어느 정도 통했는지, 유리는 평소와 같이 자연스레 웃는 얼굴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유리의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성과이긴 했으나…….
‘어제 내 태도가 나빴는데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 혹시 내가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별수 없이 꼬인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그 순간.
“전하를 뵙습니다.”
“……?”
익숙한 목소리가 이안을 불렀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백금발 고수머리를 늘어뜨린 사랑스러운 소녀가 서 있었다.
“엘레니 공녀?”
엘레니 로잔헤이어였다.
“공녀도 여기에 있었습니까?”
“저쪽 서가에서 책에 열중해 있느라고, 두 분이 오신 건 몰랐어요.”
배시시 웃으며 엘레니가 대답했다. 순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녹색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유리 언니는 대공 전하와만 친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하와도 약간 친분이 있으셨네요.”
“…….”
이안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살짝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이안은 관성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 그대로의 뜻이에요, 전하.”
엘레니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전 전하와 유리 언니가 친분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이안은 약간 애를 써야 했다.
엘레니가 유리와 자신의 친분을 모르는 건 그럴 수도 있다. 이안이 이시스 상단을 경영한다는 건 황제에게도 비밀인 극비 중의 극비였고, 유리 또한 자신이 벌이는 사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류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그들의 비밀도 드러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유리는 그와의 친분을 숨겼을 것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다소 필사적으로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돼요, 태자 전하.”
그때, 엘레니가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입을 열었다.
“언니는 남성분들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니까요. 곧 전하께서도 대공 전하만큼 친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
그 말이 이안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이거 이제 보니…….’
이안은 헛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물었다.
“공녀는 원래 말을 이런 식으로 합니까?”
“네?”
엘레니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이안이 그런 식으로 직구를 던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하긴, 사실 그도 예상치 못했다. 이렇게 솔직해져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아 같잖은 꼴을 참아 줄 인내심이 반 토막이 난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이냐니, 사람 말뜻도 못 알아듣고 그럴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 저는……”
“사람을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도 아니면, 유리의 동생인 주제에 유리를 은근히 까 내리는 꼴이 배알이 뒤틀릴 만큼 마음에 안 들었거나.
“내가 공녀가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만만해 보였습니까?”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겠다.
습관적으로 웃고 있기는 하지만, 이안의 눈빛은 숨기지 못한 한기를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