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 그게.”
암흑가의 경매에 참여했다가 꼬리를 밟히는 바람에 그만.
……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 그럴 만한 사정이 좀 있어서…….”
“흐음…….”
얼버무리는 내 말에 이안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불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는 거기까지 오픈했는데 나는 숨기려고 하면 당연히 기분이야 상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고. 어쩐다?
난감해하는 내게 이안이 “그래요.” 하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곤란하다면 내가 질문을 바꿀게요.”
“아, 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반지는 어디서 난 겁니까?”
“그러니까 그게…….”
“이것도 대답하기 힘든 겁니까?”
어떡하지?
평소 이안과 이 반지를 준 카미엘의 사이를 생각하면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게 현명한 행동일 것 같았으나, 두 번이나 대답을 피하는 건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나는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서 선물해 주셨어요.”
“…….”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이안이 약간 허를 찔린 얼굴로 말을 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변명 비슷한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게 좀, 우연한 해프닝이라고 해야 할지, 사고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게 있었거든요.”
“그랬군요.”
천천히 그렇게 대답하는 이안의 얼굴에는 웃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망했네.’
좀 찔리더라도 그냥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이안이 재차 물었다.
“그럼, 카미엘과는 대체 언제 아는 사이가 된 겁니까?”
“대공 전하하고요?”
“반지를 선물할 정도면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음…… 글쎄다. 카미엘과 내 사이를 친분이 있다는 말로 표현해도 될지 잘 모르겠다.
“저번에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카미엘의 활을 빌린 것도 그렇고.”
“아, 그건.”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이안이 뚫어 버릴 듯 나와 정확히 눈을 맞추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공녀의 결정이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모르는 친분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걸 그렇게 말해도 될지…….”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다.”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안은 기어코 대답을 듣겠다는 태세였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얕게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음, 사실 투와르 축제 기념 황실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올봄에?”
이안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렇다면 상당히 빠른 기간 내에 친밀해졌군요.”
“글쎄요, 그렇게 친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흠.”
당연히 이안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떡하지?’
나 오늘 사실 이안에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그걸 이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말해도 될까?
‘어쩐담……?’
이번엔 텄고, 다음 기회를 엿보도록 할까?
‘그러기엔 언제 이안을 또 만날 수 있을지 정확히 모르는데.’
기약이라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보고뿐인데, 다시 한 달을 기다리기엔 너무 좀…….
그런 내 난감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이안이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게요…….”
나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이것도 기회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 달을 더 기다리는 건 너무 길었다.
“이안, 사실 저 오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
“말해도 될까요?”
머쓱해하며 묻는 내게, 다행히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안의 입가에 다시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뭔데 이렇게 조심스러운 걸까요?”
“그게 저, 제가 요즘 흥미가 생긴 주제가 하나 있는데…… 로잔헤이어 도서관에서는 딱히 이렇다 할 자료를 찾지 못해서요.”
“황궁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뜻입니까?”
역시 이안은 엽렵했다.
“네, 혹시 동행해 주실 수 없을까 해서…….”
“애석하게도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아.”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즉시, 칼같이 거절이 돌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흠칫 쪼그라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이안이 관성적인 느낌으로 웃었다.
그가 변명하는 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출입증 정도는 써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하…….”
그, 그런 뜻이었어?
책상 쪽으로 다가간 이안이 서랍을 열어 펜과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재빨리 휘갈겨 써서 내 쪽으로 내밀었다.
-카시스 제국의 황태자, 에이드리언 카시스의 이름으로 유리 엘로즈 공녀의 황실 도서관 출입을 허가한다.
그 밑에 날짜와 시간까지 적혀 있었다.
“워낙 민감하게 다루는 곳이라…… 시간을 어기면 출입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까 늦지 않게 가도록 하세요.”
“네, 전하.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안이 산뜻하게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할까요?”
토를 달 수 없는 분명한 축객령이었다.
* * *
약간 뻘쭘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유리가 돌아간 뒤.
유리가 문을 닫고 나설 때까지 기계적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이안은…….
“……하아.”
눈앞에서 유리가 사라지자마자, 거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깊은 한숨으로도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고, 결국 그는 다시 한번 푸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입술 사이로 한탄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조금 유치하게 굴었나?”
아니, 사실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그랬던 것 같다.
이안은 눈을 감으며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창피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타이밍에 카미엘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그 얄미운 사촌의 이름은, 안 그래도 내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던 이안의 빈정을 제대로 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 됐다. 특히 저 자신이 유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참았어야 하는 거였다. 유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심하군.’
황궁 도서관에 같이 동행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사실 거짓말이었다. 물론 바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유리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미룬 일이야 그가 좀 늦게까지 고생을 하면 해결될 문제이니 말이다.
“기회를 내 손으로 날려 버린 셈이로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거절에 움찔하며 움츠러들었던 유리를 떠올리니 더욱 후회가 됐다. 자신을 향해 짜증스러운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 계속 시큰거리는 두통이 그를 자극하면서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자신을 제어하는 게 어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핑계지만.’
이안은 눈을 다시 한번 감았다.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럴수록 눈알 안쪽을 찌르는 듯한 두통이 더 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이안이 써 준 황실 도서관 출입증을 잘 챙기고, 황궁으로 향했다.
과연 이안이 일필휘지로 휘갈긴 이 단순한 출입증이 효과를 발휘할는지, 약간 미심쩍은 생각도 들긴 했지만…….
‘뭐, 설마 자기 컨디션이 좀 안 좋다고 나한테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이안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예민하게 구는 것도 그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뭔가 말하기 힘든 골치 아픈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계제는 아니긴 했다. 이안이 직접 무슨 일이 있다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잘 해결되길 바라야지.’
나는 그쯤에서 대충 생각을 정리했다. 마침 나를 데려다주던 기사가 도서관에 거의 다 왔다고 알렸다.
“이쪽으로 가셔서 입구 쪽에 있는 사서에게 출입증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안내해 주셔서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사는 정중하게 경례를 올리고는, 자신은 여기부터 출입이 불가능하다며 물러났다.
나는 품을 더듬어 출입증이 잘 있는 걸 확인하고, 도서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우와.’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별세계가 펼쳐졌다.
도서관 로비로 추정되는 공간은 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천장을 전부 유리로 만들어 대단히 개방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도서관이면 장서의 상태를 위해 햇빛을 차단하게 마련인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서적에 일일이 마법을 걸어 햇빛에 바래지 않도록 처치를 해 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돔 형태의 로비에서 통로가 쭉 뻗어 있었고, 로비 정중앙에 사서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현대식 안내 데스크처럼 둥글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책을 편하게 볼 수 있게 책상과 의자도 놓여 있었다.
나는 일단 중앙 안내대 쪽으로 다가가 한 사서에게 출입증을 보여 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출입증을 써 주셨군요.”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사서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떤 책을 찾고 계십니까? 특정 서적이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나마 안내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릇에 대한 책을 찾고 싶다고 하면, 아마 나는 도예 서적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될 것이다.
“저는 마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관련 서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 분야라면 11시 방향 서가로 가시면 됩니다. 3번 번호가 붙은 책장부터 17번 책장까지 관련 서적을 모아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챙겨 올 책이 많으시면, 이쪽 카트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나는 사서가 챙겨 준 카트를 끌고 11시 방향 서가로 향했다. 그런데…….
‘새, 생각보다 책장이 거대한데.’
내 키의 거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책장을 ‘마류’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을 단 책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걸…….”
나는 우선 제목에 ‘마물’, 혹은 ‘비틀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서가를 눈으로 훑던 내가 막 첫 번째 책, ‘마류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마물의 생애 주기: 출현과 소멸’이라는 책을 향해 손을 뻗으며 뒤꿈치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책이 좀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까?”
“!”
까, 깜짝이야!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니, 이안이 다정한 빛을 품은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