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82)

123화

“……그다지.”

이안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안도하는 나를 이안이 약간 묘하다 싶을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별 뜻 아닙니다.”

이안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내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이안은 둘만 있을 때는 모습을 가장하는 반지를 끼고 있는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만, 어쨌든 이런 경우에는 예민한 쪽에 맞춰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긴 했다.

과연, 내가 반지를 빼자 이안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어졌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 반갑군요. 오랜만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코랄 제도에 있는 내내 거의 황실 별장에서 지냈으니까요.”

이안이 워낙 바빠서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오며 가며 스치듯이 얼굴을 보고 인사는 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 만나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네요.”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말할 듯하던 이안이 대충 내 말에 동조하며 말을 끝냈다.

나는 캐묻는 대신 검토를 마친 서류를 내밀었다.

“로제타 의상실의 이번 달 발주서예요.”

코랄 제도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귀환하는 사건이 있고 나서, 사교계에는 생소한 유행이 번지는 중이었다.

바로 수도가 휴가지가 된 것처럼 꾸미고 사교 행사를 즐기는 거였다.

그걸 위해서 모 대귀족은 자기 집 정원을 파서 미니 바다까지 조성했다는 풍문이었다. 소문에 따르자면 마법사를 불러 인공적으로 파도가 치게 하느라 돈깨나 썼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호기심이 생기진 않았다. 왜냐면…….

‘그래 봤자 현대의 워터 파크 파도 풀은 못 쫓아올걸.’

어쨌든, 그 덕분에 로제타 의상실도 뒤늦게 휴가 특수를 맞는 중이었다.

“상기 이유로 이번 달 발주량이 좀 많아요. 대부분 모슬린, 시폰, 레이스예요.”

개중에서 얇은 면사를 촘촘하게 짠 모슬린은 표백을 하지 않는 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흰색을 내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했다. 대부분의 물건이 그렇듯이 질이 좋을수록 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코랄 베케이션이 예상치 못하게 당겨지면서 휴가 특수를 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예기치 않게 사람들이 수도로 돌아오면서 오히려 수요가 폭발하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어쨌든, 이번 시즌을 위해 모술에서 대량 주문한 모슬린 대부분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차 물량이 어제 도착했으니 로제타 의상실로 실어 가기만 하면 되겠군요.”

“2차 물량도 모술 항에서 선적을 완료했다고 하네요.”

“음.”

“그리고 다음 시즌을 위해 로제타 부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의상 콘셉트 말인데요. 일단 우단, 새틴, 태피터를 주문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가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음, 그런데…….’

나는 흘긋, 서류 너머로 이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상하게 좀 뺨의 선이 마른 듯도 하고.’

전체적으로 사람이 평소보다 좀 까칠하게 보였다.

“……특별히 할 말이라도 있나요?”

시선을 느꼈는지, 이안이 물었다. 나는 일단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무튼, 이번 달 정기 보고는 대략 이 정도로 끝이에요.”

“이번 달도 고생이 많았군요.”

“상단주님에 비한다면야.”

나는 부러 가볍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오늘의 용건은 이걸로 끝이었다.

‘보통은 이안하고 좀 더 이야기를 하다 가곤 하는데…….’

음…… 나는 이안의 까칠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까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

내 말에 이안이 갑자기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

뭐지? 내가 뭘 실수했나?

이안이 그런 나를 약간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차 한잔하고 갈 시간이 안 됩니까?”

“아, 그런 건 아니지만.”

상태 안 좋은 거 아니었나?

내 부정에 이안이 잽싸게 “그렇다면.” 하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거 원.’

매번 이렇게 대접받기는 하지만, 오늘은 왠지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부려 먹는 것 같아서 약간 신경이 쓰였다.

“여기.”

“감사해요.”

나는 이안이 내미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아 감싸 쥐었다. 맑은 붉은색 차가 베르가모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평소 이안은 쓰다 싶을 정도로 진하게 차를 우려 마시는 취향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둘이 차를 마실 때면 이안은 이렇게 주로 내 취향에 맞춰 주곤 했다.

“잘 마실게요.”

이안이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역시 상태가 별로인지, 먼저 같이 차를 마시자고 해 놓고서 이안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저…….” 하며 침묵을 깰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운을 떼기 시작했다.

“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말해요.”

오늘 이 질문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생각나는 다른 말이 없었다.

“이안은 왜 상단주가 되기로 결심한 거예요?”

“저 말입니까?”

“네.”

이안은 이 카시스 제국을 계승할 황태자였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따위를 느낄 리가 없는 위치였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그것도 이렇게 비밀스럽게 상단을 운영하고 있을까?

그 사실이 지금껏 못내 궁금하긴 했다.

“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그냥 넘어가셔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저 오늘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해서.”

“…….”

으음……. 나는 찻잔 너머로 살짝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은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점을 캐물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상단을 경영할 생각을 하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죠.”

“……자금력을 갖출 필요성을 느끼신 건가요?”

이안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거기서 긍정의 뜻을 읽어 냈다.

그 말은 대답이긴 했지만 내가 궁금한 사실에 대한 명확한 답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상단을 운영하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으니 말이다.

“뭐, 다른 사람에게라면 여기까지만 말해 두었겠지만…….”

이안이 눈썹을 으쓱하며 손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말과 달리 약간 방어적으로 보이는 자세였다.

“동업자니까 특별히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으음, 하고 이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눈가에 피곤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자금이 필요한 건 제가 황태자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어…… 그게 문제가 되나요?”

“네.”

이안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곤 말했다.

“자질을 갖춘 황태자는 때에 따라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도 하는 법인지라.”

“…….”

……지금 나,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어 버린 것 같은데?

‘황태자를 두고 쓸모가 있다 없다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황제밖에 더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말뜻을 알아들은 걸 눈치챘는지, 이안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묘했다.

웃고 있기는 한데, 뭐랄까? 약간 좀…… 이 상황을 예상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대답은 여기까지입니다.”

“…….”

“굳이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공녀는 알아들었겠죠. 똑똑하니까.”

“…….”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입술을 살짝 오므리는 나를 보며 이안이 하하, 웃었다. 그 웃음마저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데가 있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공녀. 더는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그…… 네.”

“우리가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차갑게 밀어내는 말을 하면서도 이안은 웃었다.

그 눈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 착각인 걸까?

“만약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더 궁금해한다면요?”

내 말에 이안이 부러 그러는 것처럼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자꾸 물어보면 선을 넘고 싶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겁니다.”

“!”

“어떻게 할 건가요?”

웃음기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마치 무언가를 시험해 보는 듯한 느낌…….’

만약 지금 이안이 언급한 선이라는 걸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에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

“그렇게까지 캐묻는 건 별로 예의도 아니고…….”

횡설수설하는 내 말에 이안은 특별히 지적을 하진 않았다. 그저 의도를 잘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으며 “그런가.” 하고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래요. 공녀라면 현명할 줄 알았습니다.”

“…….”

안 해도 될 질문을 해서 이런 얘기를 들어 버린 시점에서 그다지 현명함과는 거리가 가깝지 못한 것 같은데…….

“공녀가 질문을 했으니 나도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다행히 이안이 화제를 돌려 주었다.

나는 속으로만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 반지 말입니다.”

이안이 내가 빼서 무릎에 올려 둔 반지를 정확히 가리켰다.

“이거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반지가 바뀐 그때 미처 물어보질 못했는데…… 왜 갑자기 반지를 바꾼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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