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82)

17. 엘레니 로잔헤이어의 원념

코랄 베케이션은 어영부영 끝나고 말았다.

수도에 나타났던 마물보다 레비아탄이 좀 더 고위급 마물이었기 때문인지, 그 일대가 도무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집에서 숨어 지내던 귀족들은 결국 이어지는 마물의 출현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행을 택했다.

우리 역시 그만 돌아오는 게 좋겠다는 황제의 권유에 따라 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덕분에 코랄 제도의 민심이 제법 동요하고 있다는 풍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황제가 성녀를 수도로 불렀다는 소문이 퍼진 게 직격타였다.

코랄 제도의 사람들은 황제가 수도의 안전을 위해 성녀를 불러 올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황제가 수도를 지키기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난감한 소문이라니까…….’

그런 식으로 코랄 제도에서 발발한 내가 성녀라는 소문이 제도에도 조금씩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정리되지를 않았다. 고민거리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코랄 제도에 다녀온 뒤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때 엘레니가 말했던 ‘그릇’이라는 건 대체 뭘까?’

엘레니는 자신도, 카미엘도 ‘그릇’이라며 동질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에 대한 카미엘의 반응이 단순히 좋지 않았다를 넘어서 엘레니를 거의 죽일 뻔했다는 거지만 말이다.

대체 그릇이라는 게 뭐길래 엘레니는 자신에 대한 카미엘의 태도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고, 카미엘은 그토록 격한 반응을 내비쳤던 걸까?

‘혹시…… 카미엘에게서 느껴지는 비틀린 마류와 그릇이라는 게 관련이 있는 걸까?’

비틀린 마류라고 하니, 얼마 전 쓰러진 세실리아에게서도 같은 걸 감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미엘 때와는 달리 정화는 할 수 없었지만, 분명 그것도 비틀린 마류라고 했어.’

카미엘하고 세실리아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나……?

‘둘의 공통점이라면 황실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는 점밖에 없는데.’

왜 세실리아에게서도 비틀린 마류가 느껴졌으며, 그녀의 마류는 정화가 불가능한 걸까?

생각해 봤자 나오는 답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실 핏줄이란 점은 카미엘과 세실리아 사이에만 적용되는 공통점이 아니었다.

엘레니에게도 옅긴 하지만 분명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럼 그릇이라는 건 카시스 황가의 핏줄을 일컫는 말인 건가?’

그럼 혹시 이안이나 칼릭스도……?

“…….”

마지막까지는 단서가 없어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릇’이라는 게 카시스 황가와 관련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이안이나 칼릭스에게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릇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카미엘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둘에게라고 해도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어…….’

일단은 개인적으로 좀 알아보다가, 정 조사가 막히거든 그때 가서 물어보든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은 이것 말고도 생각해 봐야 할 다른 것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정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지.”

코랄 제도에서 휴가를 망친 덕분인지, 세 번째 우정 이벤트가 무산된 것이다.

짚이는 게 없지는 않았다.

엘레니가 카미엘에게 그릇 운운한 그날, 시스템 메시지는 분명 ‘루트가 수정되었다’고 말했다.

‘이때까지 내 행동을 정산했다는데…… 대체 내가 뭘 했다고 루트가 수정된다는 거야?’

설마 나, 페르가나에 못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여태까지 내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페르가나엘 못 가게 된단 말인가!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메시지도 카미엘과 있을 때 뜬 거니까…….’

앞으로의 스토리에 카미엘이 정식으로 포함된다, 뭐 그런 내용이지 않을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렸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내 생각이 그럴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어도 어쩌겠어?’

지금 당장은 결과를 알 수 없으니 하던 대로 노력을 할 수밖에.

나는 생각을 하면서 한 낙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릇 ↔ 비틀린 마류

어쩌면 서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이게 만약 사실이라고 친다면.’

지금은 아무래도 ‘그릇’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있는 힘, 정화력도 카미엘과 관련한 퀘스트를 깨고 나서 얻은 능력이지 않은가?

나는 일단 가장 가까운 로잔헤이어의 도서관에서 관련한 내용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흐른 뒤.

‘……지친다.’

나는 산더미 같은 책들에 둘러싸여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아아아아.”

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뾰로롱 짠, 하고 정답이 보란 듯이 등장해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마 이렇게까지 짚이는 내용이 요만큼도 안 보일 줄은 몰랐다.

하도 책을 훑어보느라 뻑뻑해진 눈을 비비면서,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이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찻잔에 반쯤 남은 다 식은 찻물을 벌컥 들이켜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과 같이 사업을 진행하기로 한 뒤로, 우리는 특별한 안건이 없어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진행하는 사업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빨리 가야겠다.’

이대로 로잔헤이어 도서관을 뒤져 봤자 별 성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약속 시간에 늦기만 할 것 같았다.

‘아. 여기에 단서가 없다면 혹시 황실 도서관에서는 뭔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릇이라는 게 정말 황가의 핏줄과 연관이 있다면, 그에 대한 단서 역시 황실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았다.

문제는 황실 도서관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아무리 공녀라도 허가가 필요할 텐데…….’

이런 일로 황제 폐하까지 찾아가기엔 좀 부담스럽고.

‘오늘 이안을 만나는 김에 부탁을 한번 해 볼까?’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카미엘이 준 반지를 챙기고, 로제타 의상실로 향했다.

최근 들어 로제타 의상실 출입이 빈번한 부분은 내가 로제타 부인의 뮤즈가 되었다는 변명으로 무마해 두었다.

시중드는 사람은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는 것과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도 로제타 부인의 예술가로서의 예민함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 두었다.

덕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평상시처럼 로제타 의상실을 경유해 이시스 상단으로 향했다.

“공녀.”

집무실에는 이안이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

나는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은 내가 상단에 도착해 사무엘 — 이시스 상단의 대외용 상단주 — 에게 이안을 불러 달라고 요청하면, 사무엘이 이안에게 연락을 하는 식인데…….’

나는 서둘러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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