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카미엘이 나를 불렀다. 그쪽을 향해 다가가는 내게 칼릭스가 불안하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활 쏘는 법을 배울 뿐인걸.”
사실 나도 홧김에 지르긴 했는데, 저 사람이 활을 가르쳐 주면서 무슨 짓을 할지 좀 신경이 쓰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나는 카미엘이 가리키는 대로 그의 앞에 섰다.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
하지만 의외로 별말 없이 제 검은색 활을 내게 들려 준 카미엘은 가르침에 충실할 뿐이었다.
“과녁이 보이나?”
“네.”
“좋아. 시력엔 문제가 없고.”
카미엘이 시위에 화살을 거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내가 그대로 화살을 걸자, 그가 이어 설명했다.
“활은 수직으로. 어깨는 수평으로. 팔꿈치는 내리지 마.”
그가 이리저리 지시하면서 내 몸을 만져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당겨.”
“네.”
단조로운 지시에 나도 모르게 몸이 곧아졌다.
남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겨대서 쉽게 봤는데, 시위를 당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래도 어찌저찌 당기는 데 성공하긴 했다.
카미엘이 짧게 웃으면서 칭찬했다.
“힘이 좋군. 놀이에 쓰는 활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인데 말이야.”
“그런 편인 것 같아요.”
“놓을 수 있겠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숨을 참아.”
흡, 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카미엘이 이어 지시했다.
“놔.”
그와 동시에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곧이어 퍽,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쏴 놓고도 놀라서 한순간 판단을 할 수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화살이 사과나무 몸통 한 가운데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명중’ 효과로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카미엘이 짧게 웃었다.
“시작이 좋군.”
“…….”
중간에 끼어든 내 차례는 사실상 번외 경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순서상으로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었다.
“누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첫 발의 감촉을 잊지 못한 나는 응,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안이 출발선에 섰다.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모범적인 자세로 활을 당겼다. 눈 깜짝할 새 화살이 발사되었으나…….
“아!”
안타깝게도 화살은 열매 근처의 나뭇잎을 관통하고 저 멀리 날아가 박힐 뿐이었다.
나를 응원한다고 선언해 놓고도 막상 제 오라버니가 실패하자 세실리아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 차례군요.”
다음으로 나선 칼릭스 역시 사과를 맞히는 데 실패했다. 카미엘은…….
“……이런, 실패했네.”
어처구니가 없게도 목표물인 사과가 아니라 좀 더 위에 있는 사과를 정확히 맞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어쨌든 목표물을 맞히진 못했으므로 그도 실격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자, 공녀.”
나는 카미엘로부터 검은색 활을 넘겨받았다.
까악! 까아아악!
까마귀가 다시 한번 길게 불길한 울음을 토했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노을의 가장자리가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긴장돼?”
카미엘이 부드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저었다.
‘못 맞혀도 본전.’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막상 활을 잡으니 실패하고 싶지가 않았다.
“…….”
세실리아가 이안을 바라볼 때만큼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시위에 화살을 걸고, 카미엘이 가르쳐 준 자세를 잡으며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왜일까, 이러고 있자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느새 팽팽하게 당긴 활을 잡고 왼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참았다.
반짝이는 화살촉이 살짝 허공을 헤매다 목표물을 겨누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쇄도한 화살이…….
“!”
……사과를 꿰뚫는 데 성공했다!
‘명중’ 효과로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칭호 ‘운 좋은 사수’가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정신력 +30, 명중 확률이 아주 약간 상승함.
내가 쏴 놓고도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목표물이 아닌 다른 사과를 맞힌 걸까 싶었지만, 시종이 “성공입니다!”라고 외쳤다.
“누……”
칼릭스가 나를 부르려던 순간.
“꺄아아악! 유리 공녀!”
세실리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달려오는 게 더 빨랐다.
“어쩜 좋아! 성공하실 줄은 몰랐는데!”
“황녀 전하, 조금 진정을……”
“너무 멋있어요!”
세실리아가 내 손을 잡고 거의 팔짝팔짝 뛰다시피 했다.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에도 얼떨떨한 미소가 걸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
세실리아의 얼굴이 덜컥, 새파래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정화할 수 없습니다.
뭐?
나는 내 팔을 붙잡은 채로 쓰러지려고 하는 세실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틀린 마류라고……?’
“세실리아!”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빠르게 다가온 이안이 내 대신 세실리아를 부축했다.
“오, 라버니…….”
하지만 세실리아는 부축에도 불구하고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질 뿐이었다.
“세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감는 동생을 붙잡고, 이안이 외쳤다.
“맥컬린 경을 불러! 바로 세실리아를 데리고 들어간다!”
“아,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승패를 가릴 것도 없이, 시합은 거기서 파했다.
우리는 세실리아를 안고 정신없이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가는 이안을 따라 서둘러 들어왔다.
이안은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정신을 잃은 세실리아를 데려가 긴 소파에 눕혔다.
곧이어 맥컬린 경이라는 사람이 사색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등장했다. 그는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의사가 아니라 마법사?’
세실리아의 증세는 부상이 아니라 병인 것 같았는데 마법사를 부른 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게 당연한 일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맥컬린 경이 외쳤다.
“세실리아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이쪽에 있네. 서둘러!”
“예, 알겠습니다.”
급히 다가온 그가 의식을 잃고 늘어져 있는 세실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눈치챘다.
‘다른 사람에게 마력을 주입하는 자세잖아.’
대체 기력이 다해 혼절한 사람에게 마나가 왜 필요한 거지?
게다가 세실리아에게서는 비틀린 마류가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정화를 할 수 없는 거지……?’
내가 답이 없는 의문에 빠져 있는 동안, 마법사는 즉시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으음…….”
세실리아의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스르륵 풀렸다. 그와 동시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이안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곧이어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쓸며, 맥컬린 경이 말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닌 듯,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한 대화가 오갔다.
“저…… 대체 세실리아 전하께서 왜 쓰러지신 건가요?”
엘레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은 잠시 침묵했으나, 이미 모든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세실리아의 몸은 현재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나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마나가 부족한 탓에 세실리아는 건드리면 깨질 수도 있는 유리잔처럼 아주 연약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씩 이렇게 쓰러질 때마다 임시방편으로나마 타인의 마나를 주입받고 있습니다.”
“…….”
본능적으로 지금 이안이 말해 준 내용이 극비 사항임을 눈치챈 우리 모두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때, 엘레니가 다시 한번 침묵을 깼다.
“그렇다면 세실리아 전하는 타인의 마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세실리아의 모든 것을 목격한 엘레니에게 대답을 안 해 줄 수도 없었다. 이안이 맥컬린 경에게 눈짓을 했다.
“……타인의 고유한 마나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방법은 일시적으로나마 전하의 상태를 호전시킬 뿐입니다.”
“이만하면 궁금증이 충분히 해결되었으리라 봅니다.”
이안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잘랐다. 하지만 엘레니는 이상하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군요…… 불가능…….”이라고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마치 뭔가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데.’
뭐, 내가 엘레니에게 평판을 신경 쓰라고 충고할 처지는 아니었다.
결국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동생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전하. 많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됐네. 사과할 필요는 없어. 다만.”
이안이 엄격하게 선언했다.
“여기 모인 모두가 세실리아의 비밀을 지켜 주는 것에 합의한 것으로 보도록 하지.”
“…….”
아무도, 카미엘조차도 그에 별달리 토를 달지 않았다.
* * *
이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세실리아 황녀는 휴식을 위해 방으로 옮겨졌다.
자연히 정찬은 취소되었고, 다들 각자의 방에서 간소하게 식사를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유리도, 카미엘도 각자의 방으로 올라간 후.
“…….”
엘레니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세실리아 황녀가 누웠던 소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니, 대체 왜 그런 거지?”
칼릭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가볍게 책망했다. 엘레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헛나왔어요.”
칼릭스가 대신 해 준 변명을 그대로 읊조릴 뿐인 무성의한 해명이었다.
하지만 평소 안 그러던 사람을 크게 꾸짖기에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칼릭스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 알겠지?”
“네, 오라버니.”
엘레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