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뭐든 능수능란한 것 같은 카미엘의 콧대가 뭉개지는 상상을 하니, 조금쯤 고소했다.
“그래, 칼릭스. 응원할게. 꼭 이기렴!”
내 열렬한 응원에 칼릭스가 흠칫 놀랐다. 곧 그가 고개를 돌렸는데, 이상하게 귀가 붉어져 있었다.
“누,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당연히 저를 응원해야 한다고 뻔뻔히 주장한 주제에 매우 수줍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세실리아 황녀가 그런 칼릭스를 부루퉁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칼릭스는 이내 멀끔해진 얼굴로 “그럼.” 하고 시합 출발선 쪽으로 돌아갔다.
맨 처음 시작은 이안이었다.
세실리아가 두 손을 꼭 잡고 숨을 참은 채 이안이 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활과 화살이 우스울 법도 한데, 화사한 인상의 이안이 드니 우습다기보다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잠시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는 것 같던 이안이 마침내 시위를 놓았다. 쏜살같이 날아간 화살이 콱, 하고 박혀 들었다.
과녁을 확인한 시종이 붉은 기를 들었다. 10점이었다.
“휘우.”
카미엘이 감탄했다는 듯 박수를 쳤다. 축하한다기보다 놀리는 듯한 행동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이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활을 내릴 뿐이었다.
‘늘 생글생글 웃던 사람이라 표정이 안 바뀌는 게 오히려 낯설어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다음 차례는 칼릭스였다.
“…….”
칼릭스는 활을 든 채 자리를 비켜 주는 이안을 신경 쓰인다는 듯이 흘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을 다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파란 화살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잠시 후, 시종이 노란 기를 들었다. 9점이었다.
칼릭스의 뺨에 불편한 기색으로 힘이 들어갔다. 세실리아가 눈에 띄게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박수를 쳤다.
“오라버니가 선두네요!”
마지막 차례는 카미엘이었다.
“…….”
그가 보기만 해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활을 들고 출발선에 섰다.
자세에 각이 잡혀 있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카미엘은 아무렇게나 시위에 활을 걸었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충 활을 당겼다.
시위를 반이나 당겼을까, 화살은 다소 성급하게 쏘아져 나갔다.
저래서야 5점이나 맞힐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시종이 9점을 상징하는 노란 기를 들었다.
카미엘은 놀라지 않았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시 차례는 이안에게로 넘어갔다.
연이은 경기에서 이안은 세 번이나 10점을 맞혀 칼릭스와 2점 차이로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카미엘은 다소 변덕스러운 실력을 선보여 셋 중에서 가장 뒤처지고 있었다.
까악, 하는 소리를 내며 까마귀가 노을 지는 하늘을 날았다. 이안이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경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군요.”
“속행하시죠.”
칼릭스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출발선에 섰다. 그는 아까와 같이 반듯한 자세로 시위를 당겼다.
까악!
그러나 막 화살을 놓으려던 찰나에 나뭇가지 위에 앉은 까마귀가 우짖는 소리를 냈다.
“!”
그와 동시에 미끄러지듯 이안의 손을 떠난 화살이 손쓸 새도 없이 과녁에 박혀 들었다.
시종이 파란 기를 들었다. 처음으로 7점이 나왔다.
“아!”
세실리아가 안타까운 신음을 냈다. 칼릭스가 뒤에서 눈을 빛냈다.
칼릭스와 이안의 점수 차는 2점. 이번 판에서 10점을 맞히면 칼릭스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런 성급한 계산이 칼릭스를 재촉한 탓일까?
이를 악문 칼릭스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고, 시종이 든 기는 노란색이었다.
“동점이로군.”
카미엘이 흥미롭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린 칼릭스가 혀를 찼다. 그가 말했다.
“아직 해가 다 저물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시죠.”
“글쎄.”
이안이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얼굴과 달리 그의 태도에서는 전에 없던 단호함이 느껴졌다.
“레이디들을 너무 오래 한자리에 앉혀 두는 것도 못 할 짓이지 않나.”
“…….”
그건 생각지 못했는지, 칼릭스가 흠칫하며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잘했다는 의미로 웃어 주려 했지만…….
“유리 공녀.”
세실리아 황녀가 돌연 나와 팔짱을 꼈다.
“공녀는 활을 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아…… 글쎄요.”
기억에 없는 일을 묻는 세실리아에게 내가 애매히 대답하자, 엘레니가 웃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저나 언니나 그런 취미는 즐긴 적이 없어요.”
“저는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의사들이며 유모가 못 하게 말렸어요.”
“당시 넌 심하게 감기를 앓은 직후였고, 세실리아.”
“알아요.”
이안의 말에 세실리아가 작게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이번 경기의 결말은 꼭 보고 싶어요.”
“…….”
이안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자, 세실리아가 “네? 오라버니.” 하고 간절히 손을 모았다.
결국 이안이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와아!”
“단, 다음 판에도 결판이 나지 않으면 그대로 들어가는 거야.”
“약속할게요.”
세실리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카미엘이 활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 차례군.”
세실리아가 “그다음은 오라버니에요.” 하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부러 알려 주었다. 이안의 우승이 퍽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
기분 탓일까?
카미엘이 이쪽을 바라보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은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가 출발선에 이제까지와 다른 동작으로 발을 디뎠다.
건성으로 임하던 아까까지와 달리 반듯한 자세가 물 흐르듯 만들어졌다. 단단한 팔이 반도 채 당기지 않던 시위를 팽팽해질 때까지 늘여 잡는 게 보였다.
노을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가 빛났다.
쐐애애액!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검은색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찢었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화살이 과녁에 박혀 들어갔다.
“!”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화살이 콰지직 소리를 내며 과녁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을 쏜 사람만 빼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경악에 차서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카미엘이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된다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같은 방식으로 시합을 속행하는 건 무리겠군.”
“카미엘.”
이안이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불렀다. 카미엘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은 승부는 저 뒤편 나무에 열린 사과를 맞히는 걸로 하면 어떨까?”
이 계절에 무슨 사과?
모두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설마 저걸 말하는 거예요?”
엄지와 검지로 그린 원만큼 작은 미니 사과가 매달려 있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노려본 결과였다.
“사과는 사과지. 안 그런가?”
“카미엘…….”
이안이 재차 경고조로 그를 불렀지만, 카미엘은 무시하고 “저걸 맞히는 사람이 지금까지의 결과를 막론하고 승자가 되는 걸로 하면 어때?”라고 말할 뿐이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칼릭스가 난색을 표하려 했지만, 카미엘이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빨랐다.
“로잔헤이어의 소공작은 자신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지만, 칼릭스는 쉽게 말려들어 갔다.
“해 보도록 하지요.”
이안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 역시 그게 이 경기를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란 걸 부정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카미엘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노는 걸 보기만 하는 것도 지겨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레이디들도 함께 참여해 보는 게 어떨까?”
“예에?”
칼릭스가 당황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짝 쳤다.
“세실리아.”
이안이 그런 그녀를 엄히 호명했다. 세실리아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엘레니가 난처한 듯 고운 얼굴로 말했다.
“저는 시합에 끼고 싶지는 않아요. 응원을 하는 것도 재미가 있는걸요.”
“흠.”
카미엘이 시시하다는 듯 눈을 좁혔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하게 승부욕이 치밀었다.
‘섣부른 제안을 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나 할까…….’
그때, 타이밍 좋게 카미엘이 내게 물었다.
“공녀는?”
“저는…….”
하지만 저 사람의 뜻에 순순히 끌려가 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됐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세실리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유리 공녀, 한번 참가해 보시면 안 될까요?”
“네?”
“공녀가 활을 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으음. 어떻게 하지?
나라고 해서 활쏘기에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 승부욕을 자극당하기도 했고…….
고민은 짧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말인가요?”
“네. 한번 참여해 볼게요.”
세실리아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 모습이 꼭 막내둥이 여동생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좋아요, 그럼 전 이제부터 오라버니가 아니라 공녀를 응원할게요.”
“이런.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야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하지만 누님.”
칼릭스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누님은 한 번도 활을 다뤄 본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잠깐 배우면 되지.”
카미엘이 대답을 가로챘다. 그가 물었다.
“공녀가 참전하려면 활을 빌려야 할 텐데. 활을 빌려주는 사람이 공녀에게 자세도 가르쳐 주면 어떨까?”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아주 얄미웠다. 아까 욕탕에서의 일도 그렇고, 저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는 카미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대공 전하의 활을 빌리도록 할게요.”
“…….”
카미엘이 눈을 가늘게 하며 여우처럼 웃었다. 마치 저를 고를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좋아. 이쪽으로 와,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