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82)

119화

세드릭은 칼릭스처럼 호조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안처럼 난조를 보이지도 않았다.

“오라버니, 어쩜 좋아.”

과하게 걱정스러워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도 이안의 신경을 긁었다.

그때,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에스테반 후작 각하.”

나타난 사람은 세드릭의 수하였다.

큐를 내려놓고 다가가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아무래도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인즉, 요즘 들어 자주 출몰하는 마물 때문에 방위 기사단이 전군 소집되었는데, 그 와중에 황실 기사단장인 세드릭까지 차출되었다는 거였다.

“그럼.”

세드릭이 인사를 남기고 수하를 따라 나가 버렸다.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경쟁자가 줄었군요.”

그리고 곧바로 큐를 조준하고 공을 쳤다. 이번에도 역시나, 결과가 믿을 수 없으리만치 좋았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도 시합 중이신가요?”

유리가 등장했다.

“누님!”

곧바로 당연하다는 듯이, 칼릭스가 큐를 내팽개치고 유리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한참 밀리고 있는 참에 하필이면 유리가 나타난 게 신경이 쓰였다.

그 탓일까?

“……!”

이안의 공은 이번에도 한참 빗맞고 말았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칼릭스가 유리에게 물었다.

“조금 더 쉬셔도 좋을 텐데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쉴 만큼 쉬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어, 유리 엘로즈 공녀.”

세실리아가 수줍게 다가가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는 친절하게 “황녀 전하.” 하고 말을 받아 주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에 이안의 미간이 약간 풀어지려던 찰나, 이안의 눈에 칼릭스가 세실리아를 몹시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대체 뭐지?

세실리아를 바라보는 칼릭스의 눈빛에는 순수한 불쾌감만이 담겨 있었다.

사실 이건 칼릭스가 세실리아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칼릭스는 세실리아가 유리에게 둘만 있을 땐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던 시점부터 세실리아를 싫어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뿐이었다.

칼릭스에게 이안이나 세드릭을 비롯한 남자들은 누님을 빼앗아 가려는 불한당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칼릭스는 그런 그들보다도 세실리아가 더 싫었다.

왜냐하면 세실리아는 그의 자리를 위협하러 나타난 재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유리를 강아지처럼 따르기 시작한 세실리아. 그녀는 칼릭스가 피가 섞인 혈육인데도 차마 좁히지 못하는 유리와의 거리를 손쉽게 좁혔다. 그래서 칼릭스는 세실리아가 몹시 싫었다.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랬다.

그 한심한 사정을 모르는 이안에게는 칼릭스가 세실리아를 노려보는 방식이 무척 불손하게 보였다.

혹여나 연약한 여동생이 로잔헤이어 저택에서 소공작에게 무슨 무례라도 당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안이 저도 모르게 당구대를 붙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두둑.

“?”

갑자기 들려온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이안에게 쏠렸다.

“전하……?”

귀퉁이가 부서진 당구대와 손에서 나무 부스러기를 떨구고 있는 이안을 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런. 이안은 진심으로 난감해졌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얼굴 위로 나타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아니고, 유리 엘로즈 앞이 아닌가?

이안은 최대한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수였습니다.”

유리는 그의 변명을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현명하게 이렇게 화제를 돌렸다.

“손은 좀 괜찮으세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오라버니…….”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세실리아에게, 이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칼릭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덕분에 승부를 가릴 수 없게 되었군요.”

누님의 응원을 받으며 멋지게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게 된 칼릭스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이안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제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대로 경기를 진행하느니 들어가서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세실리아가 작게 유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

유리가 다정하게 세실리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칼릭스의 불쾌한 시선이 강해졌지만, 그를 눈치채지 못한 세실리아는 유리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무어라 속삭일 뿐이었다.

이윽고 세실리아의 말이 끝나자, 유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 황녀 전하의 말씀이,”

유리가 말했다.

“당구로 승패를 가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밖에 나가서 활쏘기로 우열을 가리면 어떻겠냐고 하시는데요.”

“활?”

세실리아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평소 취미로 활을 자주 잡는 이안을 위한 제안인 게 분명했다.

하나 달갑잖은 배려였다. 이안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님 앞에서 흑심 가진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짓눌러 주고 싶었던 칼릭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나서는 게 더 빨랐다.

“전 찬성합니다.”

그쯤 되니 별수 없었다.

이안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실리아를 향해 한 번 미소를 지어 준 다음,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일러 준비를 시키도록 하지.”

그렇게 활쏘기 시합으로 종목이 결정된 순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반듯한 얼굴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

“나도 끼어도 되나?”

……카미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갑자기 나타난 카미엘 때문일까?

왠지 이안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엷게 미소를 띤 표정은 평소와 거의 비슷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 같은 것이 평소보다 좀 날카롭게 느껴졌다.

‘……당구대를 부순 것부터가 좀 이상하긴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안을 빤히 쳐다보는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훔쳐보다 걸린 게 민망해 뻘쭘해하는 내게 그가 평소와 같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각이었나?’

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길었다. 저녁 6시인데도 사위는 거의 한낮처럼 밝았다.

“한 시간 내에 승부를 가려야겠군요.”

아무리 해가 길다 해도 7시 반이면 노을이 한창일 게 분명했다.

시합에 참가하는 남자들이 서둘러 보호 장구를 차고 손에 장갑을 꼈다.

시합용 활과 화살에는 각각 색이 칠해져 있었다. 맨 먼저 칼릭스가 잽싸게 파란색 활을 집어 들었다. 남은 두 활을 바라보던 카미엘이 중얼거렸다.

“정해졌군.”

그가 검은색 활을 집어 들었다. 자연히 남은 분홍색 활은 집주인인 이안의 차지가 되었다.

“…….”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제 것으로 결정된 활을 챙겨 들었지만, 빈말로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밝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다들 여기에 모여 계셨군요.”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레니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세실리아와 내가 자리 잡은 차양 쪽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언니.”

곱게 미소를 짓는 얼굴에, 아까 본 것을 문제 삼을 기세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엘레니는 아까 본 것을 단단히 모른 척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레니.” 하고 알은척을 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저를 불러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깜빡했네. 그래도 잘 찾아왔구나.”

“그럼요.”

우리는 잠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때, 세실리아 황녀가 내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보세요, 유리 공녀! 시합을 시작했어요. 이안 오라버니가 첫 차례예요!”

황녀가 기대감에 찬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와 같이 이안 오라버니를 응원하지 않으실래요?”

“네?”

세실리아 황녀의 눈빛이 유별나게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 공녀께서 응원해 주시면 우승은 틀림없이 오라버니의 차지일 거예요.”

그럴 리가 없을뿐더러, 네 사람 중에 굳이 이안을 콕 집어 응원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 황녀의 요청에 이어 엘레니까지 그에 가세했다.

“황녀 전하께서도 이렇게 원하시는데, 같이 황태자 전하를 응원해 드리세요, 언니.”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도 애매한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려는 찰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파란색 활을 잡은 칼릭스가 불쾌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소공작.”

세실리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물었다.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들으셨잖아요?”

이상하게 세실리아 황녀와 칼릭스는 서로를 적대시하는 편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내가 알기론 없는데.’

세실리아가 곱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유리 공녀에게 같이 오라버니를 응원하자고 권하고 있었어요.”

“세실리아 전하께서 오라버니 되시는 황태자 전하를 응원하시는 건 당연합니다만.”

“…….”

칼릭스가 냉엄한 눈빛으로 세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세실리아 황녀가 시선을 약간 피했다.

“그 논리에 따르자면 누님께서도 혈육인 저를 응원하시는 게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

칼릭스를 대할 때만 빼면 순한 데다가, 평소 이렇게까지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세실리아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분한 표정만 지었다.

칼릭스가 승자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누님.”

“어, 응?”

“응원 기대하겠습니다.”

“아, 그래…….”

딱히 심정적으로 칼릭스의 편인 건 아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을 응원하느니 칼릭스를 응원하는 게 훨씬 나았다.

‘어쩌면 칼릭스가…….’

나는 편치 않은 시선으로 검은 활을 멘 카미엘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 사람을 꺾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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