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흠칫 놀라 나는 재빨리 고개를 물렸다. 카미엘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떨어지는 젖은 소리가 욕탕 안을 적나라하게 울렸다.
엘레니가 경악한 눈빛으로 그런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내가 무어라고 말하려던 찰나, 엘레니가 휙 몸을 돌리더니 달아나는 사슴처럼 쏜살같이 목욕탕을 뛰쳐나갔다.
‘망했다.’
새파랗게 질린 나와 달리, 카미엘은 한가하게 이렇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카미엘이 샐쭉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
“좀! 진짜! 이만 내려 달라고요!”
그의 너른 어깨를 찰싹찰싹 내려치자 카미엘이 실실대며 건성으로 “아야, 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기분 좋은 티가 여실한 얼굴로 이렇게까지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이제 공녀가 날 책임져 주는 일만 남은 건가?”
“뭐라고요?”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도 기가 막혀 내려 달라고 하던 것도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미엘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공녀, 입까지 맞춰 놓고 책임도 안 지려고 했나?”
“예?”
대체 무슨 말이야, 이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아니, 무슨 입맞춤 한 번에 책임까지 져요……?”
게다가 그 책임 소재가 왜 나한테 있는 건데?
어안이 벙벙한 내게 카미엘이 여우같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첫 입맞춤을 가져갔으면 당연히 그에 맞는 책임도 져야지.”
“……네?”
뭐가 어쩌고 어째요?
생긴 건 세상에서 제일 문란한 것 같은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거짓말!”
카미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나 상처받을 거야, 공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계시잖아요!”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내 벗은 몸을 본 것도 공녀가 처음이야.”
카미엘의 입에서 나오는 ‘처음’의 향연에 머리가 다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카미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공녀의 동생까지 우리의 입맞춤을 본 마당에, 공녀가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날 대체 어떻게 보겠어?”
“아니, 그게…….”
“나한테 마음이 없더라도 내 명예는 생각을 해 줘야지. 안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도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통에 어디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만 뻐끔거리는 나를 보며 카미엘이 푹, 한숨을 쉬었다.
“좋아. 공녀가 정 그렇다면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뭐를요……?”
저 입에서 또 무슨 폭탄이 터질지 약간 겁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미엘은 대단히 선심을 쓴다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결혼까지 생각하긴 어렵다면, 일단 약혼으로 참아 주겠다는 뜻이야.”
“……대체 어디를 양보하신 건데요?”
결론이 변하지를 않았잖아?
“그렇군.”
카미엘이 쓸쓸한 척 중얼거렸다.
“공녀는 정말로 날 맛만 보고 버릴 생각이었던 거로군…….”
끝 간 데를 모르는 그의 입담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미있어하시는 건 알겠는데, 그만하시고 이만 내려 주세요.”
카미엘이 쳇 혀를 찼다.
“안 통하는군.”
이 사람이 진짜?
참지 못하고 도끼눈을 뜨자 카미엘이 “알았어, 알았어.” 하며 그제야 나를 내려 주었다.
한시름을 덜게 되자 그제야 엘레니에게 생각이 미쳤다.
카미엘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인지, 이렇게 말했다.
“공녀가 날 가지고 놀 생각뿐이었다 하더라도, 공녀의 동생이 조금 전 여기서 본 일에 대해 입이라도 뻥긋하는 순간 곧바로 날 책임질 수밖에 없게 될걸.”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꿈 깨세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그냥…….”
얼버무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엘레니는 이 사람에게 적어도 관심이 있어.’
그런 마당에 엘레니가 카미엘과 내가 공식적으로 맺어질 계기를 만들어 줄 리가 없다.
카미엘이 부루퉁해져서 투덜댔다.
“공녀는 정말 매정하군.”
“네에, 네에. 그렇게 생각하세요.”
* * *
엘레니는 욕탕 쪽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걸었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본 장면이 인이 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엘레니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유리 엘로즈에 대한 악감정이 마음을 휩쓸어 갈 듯 거세게 몰아쳤지만, 엘레니는 그래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 장면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애가 단 사람은 유리가 아니라 카미엘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같은 그릇인 나는 그토록 매몰차게 밀어냈으면서…….’
그 사실을 떠올리자 창피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 엘로즈 따위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대체 왜?’
그 순간, 엘레니의 머릿속에 문득 정원에서 들었던 유리와 카미엘의 대화가 떠올랐다.
카미엘은 그때 분명 유리의 정화력이 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엘레니는 추측했다.
‘그럼 혹시…… 대공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유리 엘로즈의 정화력 탓인 게 아닐까?’
대공이 짧은 시간에 유리 엘로즈를 불같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추측보다는 그게 더 현실성이 있는 듯했다.
엘레니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골칫거리야…….’
이제까지 엘레니는 유리를 중대한 골칫거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기에 유리는 너무 손쉬운 상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유리 엘로즈는 사사건건 엘레니의 앞길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마저도 유리 엘로즈에게 당해 모든 것을 놓아 버리지 않았는가?
맥없이 고꾸라져 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면, 엘레니는 아직도 기분이 이상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토록 크고 무서운 존재였던 어머니, 하나라도 유리 엘로즈를 이기지 못하는 날이면 그녀를 죽일 듯이 잡아 댔던 사람이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좀 믿기지가 않았다.
“한심하고 나약한 사람은 도태되어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할 뿐이야. 엘레니, 너도 그렇게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항상 그렇게 말했던 어머니는 자기 말대로 한심하고 나약한 사람이 되어 도태되고 말았다. 엘레니는 철저히 자신이 배운 대로 어머니를 취급했다. 외면했다는 뜻이다.
“네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어머니는 울부짖었지만, 패자의 울음소리 따위론 엘레니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어머니의 패퇴 이후로 그분은 어머니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두셨다. 다행인 것은 엘레니가 어머니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마음을 바꾸셨지.’
당분간 유리 엘로즈가 살아 있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분의 뜻이라면 엘레니는 결코 유리를 해쳐선 안 됐다.
‘하지만.’
그분께서 두고 보라고 하신 건 유리 엘로즈의 목숨뿐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카미엘을 유혹하고 있는 유리 엘로즈의 정화력만 어떻게 해 버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문제는 어떻게 해야 정화력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적어도 아무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 것보단, 방법이라도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엘레니는 그렇게 결심했다.
* * *
대목욕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위층에서는 당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처음에는 물론 가볍게 게임을 하며 후속 대처를 논의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이 딱히 없었고, 결국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황실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그렇게 결론이 난 뒤로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게임을 계속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게임에 진심이 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칼릭스가 친 공이었다.
공은 당구대 위에 정확한 경로를 그리며 다른 공을 맞혔다. 이윽고 당구대의 사면으로 튀어 간 공들이 쏙쏙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순식간에 점수를 싹쓸이한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큐를 거뒀다. 다음 타자는 이안이었다.
“오라버니, 힘내세요!”
세실리아가 제 오빠를 응원했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에 남아 있던 세실리아 역시 안전을 이유로 조금 전 황실 별장으로 옮겨 온 참이었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응원이 무색하게 이안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안 그래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룩한 사람들의 시합이었다. 평균적인 실력들이야 다들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났다. 이런 경우 승패를 가르는 건 대개 그날의 컨디션이나 사소한 실수 몇 가지이게 마련이었다.
오늘 이안의 상태가 바로 딱 그랬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최근 며칠 들어 머리가 묘하게 무거웠다. 게다가 오늘은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니고 두 눈 안쪽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기까지 했다.
컨디션의 난조는 바로 결과에 반영되었다.
딱!
이안의 큐는 칼릭스와 달리 공을 약간 빗맞았다.
시작이 어긋난 공은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고, 테이블 위에서 튕겨 나간 공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어지럽게 굴러갔다.
“…….”
평소대로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이까짓 작은 시합에서 지고 이기는 일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 탓인지, 공이 빗맞을 때마다 묘하게 짜증스러운 감정이 울컥 치받쳤다.
설상가상으로 표정을 정리하며 큐를 거두는 이안에게, 칼릭스가 물었다.
“집중이 안 되십니까?”
자칫 잘못 들으면 꽤 퉁명스럽게 들리는 말투였고, 지금 이안의 귀에는 딱 그렇게 들렸다.
“그런 것까지 내가 소공작에게 대답해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
“…….”
예상 외로 날카로운 대꾸에 칼릭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다행히 세드릭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 차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