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재앙처럼 발현한 정화 특성이 준 일주일의 시한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앞으로 한나절 정도?’
그 시간 내에 1000 이상의 정화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마나가 감소한다.
‘안 돼!’
피 같은 내 마나. 마나를 이만큼 모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걸 홀랑 날려 버린단 말인가?
내 두 눈이 전의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공녀? 갑자기 왜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전하.”
나는 결심했다. 이제 아무도 날 말릴 수는 없었다.
“손 좀 이리 줘 보세요.”
“손?”
카미엘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세상에, 공녀…….”
“미리말씀드리지만그런뜻이아니니까오해하지마시고.”
“헐벗은 날 맘껏 구경한 것도 모자라 이제 손까지 잡으려는 건가?”
카미엘이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한 동작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날 완전히 농락하려 하는군.”
“아니라니깐요!”
사사건건 사람 열 받게 하네, 진짜!
“고작해야 손 정도로 농락이라니, 말도 안 돼요.”
“장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지, 공녀.”
카미엘이 곧바로 대꾸했다.
“여기는 대목욕탕이고, 나는 목욕 중이었잖아. 이런 장소에서는 손만 잡는 것도 여러 가지 함의가 깃들 수 있다고.”
“윽……!”
얄미울 정도로 달변이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입을 다물자, 카미엘은 숫제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군. 공녀는 마음도 주지 않으면서 날 농락하려고 하지만…….”
“그러니까 아니라니까요.”
“공녀가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카미엘이 애달프게 한숨을 내쉬면서 내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자, 카미엘이 이것 봐라? 하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손을 잡겠다면서 도망은 왜 가는 건데?”
“그, 그러니까 그게…… 가까이 오시니까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이 넘어갔다. 지금까지는 당황이 앞섰고, 그다음에는 카미엘이 너무 얄미운 나머지 눈에 뵈는 게 없었지만…….
‘이 남자…….’
인정하기 싫지만, 맨눈으로 이 상황에서 마주하기에는 너무……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자극이 과해.’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잘생긴 얼굴에, 인간으로서 극한까지 단련한 상체엔 물방울이 맺혀 또르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시선을 피했다간 대번 놀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눈을 굴릴 수조차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카미엘이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손을 잡겠다며? 이 정도 거리에서는 불가능하단 말이야.”
“그으게…… 제가 그러기야 했는데…….”
“내가 가는 게 싫으면, 공녀가 나한테 오는 걸로 할까?”
“……제가요?”
“응.”
카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만히 공녀를 기다릴 테니까, 공녀가 내 손을 잡으러 오는 거야.”
그……게 좀 더 나으려나?
살짝 혹하려던 나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재 보았다.
하지만 내가 손을 잡으러 다가가려면 카미엘이 몸을 담그고 있는 욕탕에 함께 들어가야만 했다.
‘기각! 기각! 그것만은 안 돼!’
결국,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싸쥐고 말았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조금만 더 이쪽으로 와 주세요…….”
“그래.”
카미엘이 조금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그가 첨벙거리며 물을 가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살짝 얼굴을 가린 손의 손가락을 벌렸다. 손 틈새로 보이는 카미엘은 웃고 있었다.
아까처럼 놀린다기보다 나를 귀여워하는 것 같은 기색이 짙은 웃음이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이쪽이 좀 더 창피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소, 손을.”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이쪽으로 좀 내밀어 주세요.”
“자.”
카미엘이 선선히 손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 보겠다는 듯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후으으읍.’
언제까지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
카미엘의 손가락에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다행히 손가락이 맞닿았는데도 카미엘은 가만히 있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나는 아주 살짝 그의 손을 잡았다.
느리게 숨을 내쉬던 카미엘이 그제야 천천히 내 손을 감싸 쥐듯 마주 잡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시스템 메시지가 뜨길 기다리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
휙, 하고 몸이 끌어당겨졌다. 카미엘의 짓이었다!
“자, 잠깐……!”
첨벙!
물소리가 크게 일었다. 제지할 틈도 없이 나는 어느새 카미엘의 벗은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밀어내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단단히 나를 껴안은 채 올려다보는 카미엘의 눈빛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전하, 이건…….”
“이왕 가지고 놀 거라면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아 줘.”
“네에?”
뭘 가지고 노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카미엘의 촉촉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런 말이 쏙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래……. 이쪽은 속마음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내게 어필을 하고 있는데, 나는 질색하면서도 손이나 잡자고 하고 있으니…….’
저쪽 입장에서는 충분히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일인 게 아닐까?
……아니, 잠깐만.
다 넘어가려던 나는 살짝 정신을 차렸다.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아 달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이에요, 라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
삽시간에 카미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 위에 숨결이 내려앉는 거리에서, 카미엘이 살짝 고개를 비틀며 말했다.
“이런 뜻.”
곧바로 입술이 맞물렸다.
“흡……!”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을 가볍게 짓눌렀다. 그러더니 마치 허락을 구하듯 내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가 놓아주었다.
그 상태로 카미엘이 내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나를 가지고 놀 거라면 입술 정도는 허락해.”
“…….”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대로 카미엘을 밀어내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이대로 카미엘을 거절하지 않고 그를 정화하는 것.
그 두 가지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눈을 감는 거였다.
현재 정화력 총량: 5014
2006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카미엘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녀가 허락한 거야.”
내게서 금빛 기운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카미엘이 내 입술을 맞물리듯 덮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그의 어깨를 손으로 꾹 힘주어 잡자, 카미엘이 쿡쿡 웃는 소리가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귀여워…….”
나른하게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혀끝으로 내 입술 사이를 지분거리듯 적시며 가르고 들어왔다.
“으응…….”
간지러운 자극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카미엘은 봐주지 않고 고개를 좀 더 틀어 내 입술로 파고들었다.
촉촉하게 맞붙은 혀가 미끄러지듯 입안을 유영했다. 예민한 입천장을 핥듯이 문지르는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헐떡이는 소리가 새고 말았다. 카미엘이 약간 숨을 틔워 준 틈을 따라 젖은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으…….’
분명히 주고받고 있는 건 입술인데, 소리가 울리는 귓가에 더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나는 간지러운 느낌을 참지 못하고 목으로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미엘은 그런 내 아랫입술을 입술로 부드럽게 물었다가, 촉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오늘은 이쯤에서 봐주도록 하지.”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2006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정화 특성: 비울수록 채워지는 것’의 조건을 클리어합니다!
마력이 감소하지 않습니다.
제한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돼, 됐다.’
어질어질한 머릿속에는 겨우 그 정도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카미엘이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나를 으스러뜨릴 듯이 강하게 껴안았다.
“하…… 도저히 못 참겠어.”
“저, 전하?”
“딱 한 번만.”
그가 마른 입술을 핥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허락해 주면 안 돼?”
“그…… 네에?”
“응? 공녀는 이런 내가 가엾지도 않아?”
“가엾기는 뭐가 가여워요!”
“매정하기도 하지…… 공녀에게 기꺼이 농락당해 준 나를 이렇게 내쳐도 되는 거야?”
가증스러우리만치 처연하게 말하며, 카미엘이 “딱 한 번만 더…… 응?” 하고 졸랐다.
이런 유혹에 면역이 없는 나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
“놔, 놔주세요.”
오늘은 이쯤에서 봐 준다며!
“싫어…….”
카미엘이 응석을 부리듯 내 쇄골 근처 가슴팍으로 파고들 듯이 머리를 부볐다.
“아으으, 자, 잠깐.”
나도 모르게 간지러움 탓에 앓는 소리가 나왔다.
간신히 카미엘의 머리통을 내게서 떼어 내자, 아까보다 좀 더 풀려 버린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
“잠…… 으흡.”
말릴 새도 없이 다시 한번 입술이 겹쳐졌다.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입술을 빨아들이며 먹어 치울 듯 조급하게 구는 입맞춤이었다.
시작부터 기세에 밀린 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음에도, 카미엘은 이번엔 물러나 주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미엘의 어깻죽지만 꽉 그러쥐었다. 습기 어린 탄탄한 살갗에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지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대공 전하?”
“!”
익숙한 목소리.
엘레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