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고운 백모래 속에 드문드문 조개껍데기가 섞여 자박자박하게 밟혔다. 밀려드는 푸른 파도가 거품을 만들며 모래사장 가득히 밀려들었다.
파도가 물러나자, 나는 파도가 닿을락 말락 한 경계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가가면……”
그 순간.
“어?”
예상보다 커다란 파도가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왓!”
그때, 세드릭이 내 허리를 낚아채 나를 위로 들어 올렸다!
철썩, 하는 파도가 간발의 차로 내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를 구한 세드릭의 종아리는 파도에 완전히 잠겨 버렸다.
“경이 젖었잖아요!”
“공녀가 젖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세드릭이 그 상태로 성큼 걸어 파도로부터 안전한 곳에 도달해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경…….”
고맙다고 하기엔 좀 기가 막히고, 그렇다고 뭐라고 하기엔 고마워서 나무랄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세드릭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경.”
“예.”
“다리에 해조류가 걸렸어요…….”
“…….”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세드릭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가 굳어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푸, 푸흐흐흐.”
결국 내가 먼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드릭이 약간 부루퉁하게 — 놀랍게도 정말 그랬다! — 말했다.
“웃지 마십시오.”
“하지만 웃기잖아요!”
멋지게 날 건져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쩌다 저렇게 됐단 말인가?
“제가 떼 드릴게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이얍, 떨어져라.”
나는 무릎을 꿇고 세드릭의 다리에서 해조류를 떼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해조류가 파도에 휩쓸려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푸, 푸흐하하하.”
어쩐지 또 웃음이 나왔다.
“하아.”
세드릭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님!”
저쪽 해변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칼릭스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칼릭스!”
어쩐지 좀 무서운 얼굴을 한 칼릭스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칼릭스가 부루퉁한 어조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표정이 안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이 아니라는 데야 뭐,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엘레니는 후작님의 별장을 구경하고 있어. 우리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해변을 좀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아쉬움을 담아 묻자, 칼릭스가 “그게…….” 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 왜?”
“아까 발파론 마을의 사람들이 다들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누님을 찾고 있어서…… 한동안 소란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런.”
칼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누님이 에스테반 후작저 쪽으로 향하는 걸 목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곳도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 답은 제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안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등장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소공작의 말이 빨라서 좀 늦었습니다.”
“아깐 정말 감사했어요.”
“좀 더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이안이 마치 연극배우가 된 것처럼 과장스럽게 정중한 태도로 궁중식 인사를 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주신다는 답은 대체 뭔가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실 소유의 별장이 있습니다.”
이안이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들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잠시 그곳으로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그 일대 전체의 출입을 방위 기사단이 통제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마침 세실리아가 있으니, 세실리아의 초대를 받아 잠시 머무는 걸로 하면 귀찮은 소문도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섬세한 배려였다.
나는 살짝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칼릭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점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일 것 같습니다.”
칼릭스까지도 동의한 사실이라면, 망설일 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 * *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해변을 떠나 — 아쉬워하는 내게 세드릭이 얼마든지 놀러 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 황실 별장으로 향했다.
단시간 안에 여러 곳을 이동해 다니다 보니, 내 발로 걸어 다닌 건 아니라 해도 꽤 지치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곳으로 초대하는 거라 면목이 없습니다.”
이안은 그렇게 말했지만, 별장 내부는 관리인이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불편할 것은 없었다.
이안이 내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저녁 식사 전에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어요.”
“참, 만약에 원하신다면 대목욕탕을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대목욕탕이요?”
이안의 설명인즉, 이 널따란 황실 별장에는 특별한 시설, 대목욕탕이 지하에 준비되어 있다는 거였다.
“급수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나요?”
“선선대 황제 폐하께서 마법을 걸어 두셨습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남의 집에 와서 신세를 지는데 목욕탕까지 사용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그건 내 현대인으로서의 감각일 뿐인지 이안은 물론 칼릭스까지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그렇다면.’
“폐가 안 된다면 한번 이용해 보고 싶긴 하네요.”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해 두라고 이르겠습니다.”
* * *
나와 엘레니, 그리고 칼릭스는 곧바로 2층에 있는 손님방을 이용하게 되었다.
칼릭스는 대목욕탕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다 같이 모여 식사 전에 당구를 칠 계획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 아마 당구는 핑계이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우리 상황에 대해 의논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방에 들어가 준비되어 있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세실리아 황녀의 옷이라고 했는데, 대충 사이즈가 잘 맞았다.
“그럼, 공녀님. 대목욕탕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목욕탕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도록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대목욕탕으로 내려갔다.
“와아…….”
목욕탕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규모를 생각하긴 했지만, 상상 이상의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기 전 탈의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흰 대리석을 기조로 황금빛 테두리를 더해 만들어서 몹시 호사스러웠다.
“이곳에서 탈의를 하시고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목욕물은 장미수와 칼렌둘라를 넣어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어, 마음에 들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시녀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로군요. 그럼, 여기에 목욕 용품을 두고 가겠습니다. 목욕을 끝내시고 이곳으로 와서 저쪽에 있는 설렁줄을 당겨 주시면, 내려와서 마사지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사지까지 풀코스 서비스라니. 정말 굉장한 곳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는 “좋은 시간 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옷을 벗어 던지고 시녀가 준비해 준 가운을 입은 다음, 목욕탕으로 들어섰다.
“와…….”
탈의실과 똑같이 흰 대리석을 기조로 만든 목욕탕에 약간 분홍빛을 띠는 목욕물이 찰랑찰랑했다. 가운데 인어 조각상을 설치한 목욕탕은 거의 수영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황금으로 만든 파도 같은 테두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첨벙.
“……응?”
분명 내가 내지 않은 첨벙 소리가 인어 조각상 반대편에서 들렸다.
“누, 누구세요?”
대답 대신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이윽고 누군가가 물살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바로…….
“대, 대공 전하?”
상반신을 탈의한 카미엘이 욕탕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 여긴 어떻게……!”
“황궁 별장에 내가 있는 게 이상한가?”
그, 그러고 보니 대공이었지 저 사람!
“제, 제가 여기 오는 거 알고 계셨죠!”
“으음.”
대공이 대답 대신 나른하게 목소리를 울렸다.
“몰랐어, 정말. 공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일 줄은 말이야.”
“제가 뭘 적극적인데요……!”
“날 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아니야?”
“아니거든요!”
“뭐, 좋아. 공녀가 정 부끄럽다면 그런 걸로 해.”
“아니라니까요! 전혀! 부끄러운 건 맞지만 여기까지 온 건 완전히 사고였거든요!”
“그래, 그런 걸로 하자니까.”
말이 통하지를 않았다!
카미엘이 씩씩거리는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하며 눈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내 쪽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왜, 왜 이리 오시는 거죠?”
“음…… 서비스?”
“예에에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무슨 서비스는 서비스야, 대체!’
나는 마지막 남은 상식인의 절규를 담아 외쳤다.
“제, 제가 여기 오는 걸 알고 계셨으면 미리 도망이라도 가시든가!”
“내가 왜?”
“아니면 물속에 숨는 염치라도 좀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하지만 공녀가 말했다시피 여기 찾아온 건 공녀인데.”
그렇게 말하는 카미엘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보여 주는 게 뭐가 나빠?”
“안! 보고! 싶었다니까요!”
나는 거의 사자후를 질렀다.
“사람 말을 좀 들어!”
“아하하하하.”
카미엘은 정말 진심으로 신이 난 것 같았다. 아주 얄미워서 꿀밤을 빡 때려 주고 싶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 이제 그의 헐벗은 상체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시원하게 웃어 젖히는 카미엘을 노려보았다.
‘어, 잠깐.’
그런데 내게 갑자기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거 실은 절호의 기회인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