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흐음.’
이왕 내친김에 슬쩍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마을의 모습이 제법 심각했다. 길이 울퉁불퉁 패어 있는 건 물론이요,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전체가 무너진 집도 꽤 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엄마! 저길 좀 봐!”
마을 대표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어떤 꼬마 하나가 이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신문에서 본 성녀님이랑 똑같이 생겼어!”
‘앗.’
그제야 나는 얼마 전에 신문에 내 초상화와 함께 ‘마물을 물리친 성녀’라는 제목으로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실렸던 걸 간신히 기억해 냈다.
‘이런, 어떡하지?’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꼬마의 목소리에 일제히 내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저, 정말로 성녀님께서 오셨군요……!”
‘아하하. 어쩌지?’
이제 와서 말없이 쏙 얼굴을 도로 숨기자니 그것도 어색해서, 나는 진정하라는 뜻을 담아서 사람들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아……!”
“성녀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한데 그러자마자 사람들이 진정하기는커녕, 더 감격에 찬 탄성을 토해 내는 게 아닌가?
개중에 몇몇은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공작 각하!”
“성녀님을 모시고 와 주시다니!”
“이젠 우린 살았어!”
“성녀님, 저희를 구해 주세요!”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난감하게 칼릭스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녀님.”
“성녀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주세요!”
“제 남편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성녀님!”
“마물이 또 나타날까 봐 두려워요!”
온갖 아우성과 함께 사람들이 내가 탄 마차 가까이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러서라!”
기사들이 사람들을 물리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성녀님! 성녀님!”
“제발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너무 무서워요, 성녀님! 마물을 물리쳐 주세요!”
그렇게 애원해 봤자 이미 토벌한 마물을 다시 토벌할 수도 없고.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눈 깜짝할 새 마차 턱밑까지 몰려든 사람들이 창문을 향해 손까지 뻗으며 각자 요구 사항을 외치기 시작했다.
“성녀님!”
“밀지 마! 나부터야!”
“성녀님, 이쪽을 봐 주세요!”
“발파론에 축복을! 발파론에 축복을!”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외침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발파론에 축복을! 발파론에 축복을!”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에 모두가 당황한 그때.
“……길을 비켜라!”
마을 정중앙에 난 길을 통해 일단의 사람들이 말을 달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속도가 워낙 빨라 곧이어 얼굴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화, 황태자 전하?”
내 외침에 축복을 내려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다!”
제일 선두에서 백마를 타고 금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이안은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황태자 전하 그 자체였다.
이안이 다시 한번 호령했다.
“마차에서 물러서라!”
황태자의 명령에 사람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성녀에 대한 열망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태자의 명령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하나둘씩 마차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컹, 하고 창문 반대편 마차 문이 열리더니…….
“창문을 닫고 덮개를 내리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드릭!”
“쉿.”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창문을 닫고 덮개를 내렸다. 세드릭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세드릭의 손을 잡았다. 세드릭이 재빠르게 나를 끌어당겨 자기가 타고 온 말 앞쪽에 태웠다.
“이대로 빠져나가겠습니다.”
“고, 고마워요.”
세드릭이 말을 달려 마차 앞을 살짝 비켜나면서, 뒤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엘레니 공녀를 수행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는 흘끔 뒤쪽을 바라보았다. 마차에 가로막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저 너머에서 이안이 시선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세드릭이 고삐를 움직이자, 말이 복잡한 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제 별장이 여기서 제일 가깝습니다. 그곳으로 이동할 겁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칼릭스와 이안은 어쩌려나 싶어 잠깐 뒤를 돌아보니, 세드릭이 용케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채고 대답해 주었다.
“소공작과 태자 전하께서도 상황을 수습하는 대로 곧장 제 별장으로 오실 겁니다.”
“그렇군요…….”
말은 숲길을 달려 곧바로 가도로 진입했다.
“바로 저기입니다.”
세드릭이 가리킨 곳에, 흰 벽돌로 지은 자그마한 별장이 하나 보였다.
에스테반 후작가의 별장은 전형적인 별장 지대에서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 별장만큼 높은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망이 좋을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편입니다.”
세드릭이 덤덤하게 인정했다.
“뒷문 쪽 샛길을 통해 곧장 해변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아하…….”
별장에 가까워질수록,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나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곳에서 제일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별장보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후작 각하!”
익숙한 얼굴의 집사가 우리를 반겼다.
먼저 말에서 내린 세드릭이 내 쪽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안기십시오.”
“네?”
“말에서 내리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네…….”
안기라는 첫말에 당황한 나머지 혼자서 말에서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깜빡해 버렸다. 세드릭의 팔에 의지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조심해서 발을 디디십시오.”
세드릭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는 데만 신경을 쓸 따름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엘레니가 기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드릭의 매너가 좀 극진한 데가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감사해요.”
세드릭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어쩐지 집사가 그런 우리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드시지요.”
세드릭의 집은 위치도 그렇고, 내부 장식도 소박하면서 호젓한 멋이 있었다.
엘레니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집이 정말 멋져요, 에스테반 경. 안목이 정말 훌륭하시군요.”
“선대께서 물려주신 대로 손을 대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선대께서 안목이 정말 훌륭한 분이셨군요. 그런 아버님을 두시다니 운이 좋으셨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니야 그저 칭찬을 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집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물론, 세드릭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집을 좀 구경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따로 안내를 해 주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엘레니가 내게 권유했다.
“언니, 함께 가실래요?”
“아니.”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까 일로 좀 놀라서 말이야. 나는 휴식을 좀 취하고 싶어. 너 혼자 다녀오도록 하렴.”
“……네, 알겠어요.”
엘레니가 집 구경을 한다는 명목으로 떠난 후, 세드릭이 내게 물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조금요.”
나는 약간 멋쩍게 웃었다. 뒤돌아서 생각해 보니 난데없이 성녀라고 추앙을 받던 모습을 보인 게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기사가 한 번 잘못 난 적이 있어서요. 저는 그저 레비아탄 토벌 현장에 같이 있었을 뿐인데, 마치 제가 마물을 없애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가 돼서…….”
“곤란하셨겠군요.”
“보셨다시피요.”
“따로 휴식을 취하시겠다면 방을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큼, 컴!”
그때, 갑자기 세드릭의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각하, 혹시 이 사람에게 의견을 낼 기회를 잠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지?”
“제 생각에는 로잔헤이어의 공녀님께서 아주 많이 놀라지 않으셨다면, 해변가를 천천히 거닐며 마음을 진정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여기 와서 단 한 번도 느긋하게 해변을 산책해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별장 아래 해변은 에스테반 후작저를 통하지 않고는 접근이 어려워, 거의 사유지나 다름없이 조용한 곳입니다. 틀림없이 공녀님의 마음에도 드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세드릭이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의견을 구하는 것 같았는데, 나야 당연히 찬성이었다.
“여기 와서 한 번도 해변 산책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저런!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각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드릭이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팔을 붙잡자, 집사가 잽싸게 세드릭의 손에 양산을 하나 쥐여 주었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낮은 담벼락을 따라 활짝 꽃을 피운 이름 모를 덩굴이 우거져 있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이 드리운 길을 따라 내려가자…….
“와.”
철썩, 파도가 치는 작은 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장의 내 방 창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바다였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레비아탄을 물리칠 때도 바닷가이긴 했지만, 그때는 당연히 레비아탄에 정신이 팔려 주변 풍경을 둘러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가까이서 맡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바다 내음이 바람과 함께 밀려들었다. 나는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무척이요.”
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바닷가로 접근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