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82)

114화

16. 비울수록 차오르는 것

다음날 아침.

“으우우웅.”

막 잠에서 깨어난 나는 거하게 하품을 하며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데구르르.

“응?”

뭐지?

이불 위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구르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띈, 제사상에 올리는 커다란 배만한 마나석이었다.

‘어제 엘리야가 사준 게 왜 여기……?’

자세히 보니 그 옆에 하얀 쪽지 한 장이 같이 구르고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쪽지를 살펴보았다.

내용을 살펴 본 결과…….

“……엘리야인가?”

아무래도 이 마석을 건드려놓고 간 사람은 엘리야인 것 같았다.

‘사람 참.’

왔다 갈 거면 말이나 하고 왔다 가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마나석을 건드린 순간이었다.

정화력이 5000이 넘습니다.

정화 특성이 발현합니다!

“……?”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비볐다.

정화 특성: 비울수록 채워지는 것

- 일주일에 한 번 정화력을 1000 이상 소모해야 합니다. (정화력의 사용처는 ‘정화’에 한합니다.)

- 정화력을 소모하지 않을 경우 페널티가 발동합니다.

- 페널티: 마력이 감소합니다.

“으어……?”

미처 눈곱도 다 떨어지지 않은 눈으로 정독한 메시지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화력을 1000 이상 소모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마력이 감소한다니, 이게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리야?

“농담이지, 이거?”

당황스러운 마음에 중얼거려 봐도 메시지의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잠이 확 깨 버린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상태창을 한번 열어 보았다.

<이름: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제자, 협상의 달인,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사교계의 신성, 황태자의 동업자, 신성력의 발현자, 구혼자를 거느린, 소공작의 피보호자, 꿰뚫어 보는 눈>

명성: 7805

마나: 418/1000

지력: 448/1000

화술: 435/1000

매력: 475/1000

기품: 410/1000

정신력: 360/1000

정화력: 5014/????

“진짜 정화력이 5000이 넘었네…….”

게다가 정화력 옆에 조그만 글씨로 이런 팝업이 떠 있었다.

남은 시간: 168시간

나는 잠시 망연자실했다.

‘아니, 내가 정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거나 막 정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염되거나 비틀린 마류가 감지될 때만 가능한 정화를 어떻게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카미엘…….’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갔다.

출처 불명의 뒤틀린 마류 그 자체나 다름없는 그라면 분명 일주일에 한 번뿐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정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 정화력이 그에게 끼치는 막대한 영향력과 그에 대한 카미엘의 반응이 문제였다.

그를 정화하려 할 때 높은 확률로 신체에 접촉하거나, 혹은 최소한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해야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젯밤 그의 행동을 보면 딱히 정화력이 아니라도 내게 반응하는 것 같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어젯밤 정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어후,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머릿속에 뜨겁게 달라붙는 기억을 떨쳐 냈다.

‘아무튼, 카미엘을 정화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 부담이 너무 높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히 어제 보았던 수상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터닝 포인트, 라면서…… 이제까지 내 행동에 의해 루트가 수정되었다고 했지.’

카미엘의 말도 그렇고, 더 이상 그의 손에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손에 죽지 않게 됐다고 해서 페르가나로 떠날 준비를 그만두어도 될 것 같진 않았다.

죽이지 않겠다는 말만 믿고 안심하기에는 카미엘에게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엘레니가 말한 ‘그릇’이라는 건 대체 뭘 뜻하는 걸까?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기도 했거니와, 그릇이라는 말에 카미엘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가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더라도 쉽사리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남은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뭐,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까.’

이 안에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를 정화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일단 생각하기를 미루기로 했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속절없이 엿새가 흘렀다.

‘시간 흐르는 속도 좀 보게.’

허허. 나는 정화력 옆에 뜬 ‘남은시간: 23시간’을 보며 헛웃음을 토했다.

엿새 전에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부득이하게 카미엘을 정화하게 되는 팔자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엿새 동안 나는 카미엘의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다.

어제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내 발로 로엔 대공의 별장을 찾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전달하러 갔던 사용인은 ‘로엔 대공의 별장에는 관리인 부부 외에 아무도 없었다’는 괴담 같은 이야기만 전달해 줄 뿐이었다.

속이 탔다.

‘그날 밤에 말하는 걸로만 봐서는 평생 나한테 붙어서 살 것처럼 그러더니만…….’

물론, 그러지 않아서 아쉽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 망할 정화 특성만 아니면, 카미엘이 없어도 내 일상은 잘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비록 레비아탄의 출현 덕분에 코랄 제도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지기는 했으나, 덕분에 쓸데없는 행사가 줄어 마음 편히 별장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비교적 평온하게 시간을 보낸 나와 달리 코랄 제도에 모인 다른 귀족들은 몸을 사리느라고 난리였다.

‘하기야, 수도에 나타난 재앙급 마물을 피해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또 다른 재앙급 마물이 나타났으니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수도에 다시 올라가도, 여기에서 머물러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재앙급 마물이 한번 나타나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토벌을 한 뒤에도 여진처럼 균열이 열려 다른 마물들이 출몰하곤 하기 때문에,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특히나 이번에 나타난 레비아탄은 똑같은 재앙급 중에서도 유난히 급이 높은 마물이었다.

때문에 이 일대가 안전해지려면 최소 일주일, 넉넉잡아 2주 정도는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엘리야가 말했다.

‘어쨌든, 오늘 안에 카미엘을 만나지 못하면 페널티로 마나가 줄어든다는 거지…….’

이번 일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카미엘 쪽에서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이 상황에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깨달음일 따름이었다.

“누님,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계십니까?”

“응? 칼릭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칼릭스가 외출을 하려는 듯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어디 다녀올 곳이라도 있는 거야?”

“이틀 전에 마물이 나타났던 발파론 마을 말입니다.”

“아, 응.”

칼릭스가 옅게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했다.

“방위 기사단의 토벌 작전이 늦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극심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구호 물품을 나눠 주려고 합니다.”

“그래?”

바로 그 순간,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나가기라도 하는 게 집에만 있는 것보다 카미엘을 마주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즉시 말했다.

“나도 갈까, 칼릭스?”

“예?”

아니나 다를까, 칼릭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누님? 마물이 나타나 폐허가 된 마을을 방문하시겠다니요!”

얘가 이렇게 나오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나름대로 대책이 있었다.

“틀려, 칼릭스. 나는 그 마을에 가겠다고 한 게 아니라, 너와 같이 움직이겠다고 한 거야.”

“그게 대체 뭐가 다릅니까?”

“그야 당연히 너 없이 이 집에 남는 것보다, 너랑 함께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는 뜻이지.”

“……!”

칼릭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 응?”

일부러 계산한 각도로 칼릭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하자, 칼릭스가 시선을 피하며 “그렇기는 합니다만…….”이라고 중얼거렸다.

‘협상의 달인’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칼릭스 로잔헤이어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기회는 이때다. 나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럼 함께 가는 걸로 결정한 거다?”

칼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겠군요.”

설득에 성공하여 지력이 10, 화술이 10 오릅니다.

* * *

잠시 후,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두 대의 마차가 출발했다.

짐마차에는 준비한 구호물자를 싣고, 그에 앞서는 마차에는 칼릭스와 나, 엘레니가 타고 있었다.

원래는 세실리아 황녀도 같이 오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유모가 그런 번잡한 곳에 가셨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어떻게 하냐며 결사의 각오로 말려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발파론 마을은 별장 지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별장 지대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로잔헤이어 공작가와는 약간 거리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와 함께 구호 활동에 나설 수 있다니. 아버지께서도 소식을 들으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 것 같네요.”

글쎄.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칭찬은커녕 위험한 곳에 직접 발걸음을 했다고 꾸지람을 듣는 건 아닐까 몰라.

그때, 우리 옆에서 말을 타고 호위를 하던 기사가 조용히 마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칼릭스가 창문을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제 곧 발파론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런가.”

“여기서부터는 길이 제법 험한 편입니다.”

“음.”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덜컹거리는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님, 잠시 여기에 계십시오. 엘레니, 너도.”

아무래도 칼릭스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그래.”

칼릭스가 곧이어 마차 밖으로 나갔다. 궁금해져서 슬쩍 창문 너머를 내다보니, 마을의 대표로 추정되는 이가 나와서 칼릭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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