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눈만 깜박거렸다.
‘그게…… 그 말이랑 이 말이 다른 건가……?’
새로운 말을 해석하느라 멍해진 내게, 카미엘이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건 내가 이 손을 공녀가 잡아 주기를 원한다는 뜻이야.”
“……단순히 그것만요?”
“음, 글쎄.”
카미엘이 싱긋 웃었다.
“사내의 속내의 깊이를 재려는 건 무의미한 시도일 뿐이다, 라고 말해 두도록 하지.”
“기가 막혀서…….”
나는 약간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오는 걸 참지는 못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쪽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손 정도라면…… 잡아 줘도 괜찮지 않을까?’
저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뭔가 가엾기도 하고…….
‘악수 한 번 해 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요사스러울 정도로 황홀한 미모 탓일까, 판단력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이 내 입술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악수 정도라면…….”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들었는데…….
“!”
카미엘이 뜨겁고 큰 손아귀로 내 손을 와락 낚아채 버렸다.
‘노, 놀랐다.’
“후우…….”
고작 손을 맞잡았을 뿐인데, 카미엘은 마치 크게 안도한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공녀.”
“아니, 고맙다고 할 것까지야……!”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잡은 내 손을 홀랑 뒤집은 카미엘이 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가락 틈새로 뜨거운 한숨이 고운 모래처럼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카미엘이 마치 몹시 경애하는 사람에게 하듯이,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자, 잠깐만요.”
악수를 하자는 거였지 이런 행동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당황한 내가 손을 빼며 만류하려 하자, 카미엘이 번뜩 눈을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사냥감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짐승처럼 경계심으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마, 공녀.”
카미엘이 목쉰 소리로 애원했다.
“내가 공녀의 동생을 이 밤에 죽여 버리는 건 싫잖아?”
“어…….”
싫다기보다 번거로울 뿐이지만…….
‘페르가나로 떠나기 전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골치가 아파지긴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그렇긴 한데요…….”라고 어물어물 대답하자, 카미엘이 말했다.
“그럼 여기 이렇게 있어.”
사라락, 금빛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치며 내려앉았다.
달빛이 부서지듯 내려앉은 그 모습이 이상하게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
‘정확히는 그런 척하고 있는 거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 시각적인 자극에 약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비어 있던 남은 한 손을 뻗어 카미엘의 얼굴선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건드리듯이 쓰다듬고 말았다.
그 순간 카미엘이 번뜩, 눈을 떴다.
“!”
정신을 차린 순간 나는 어느새 그의 품에 꽉 끌어안겨 있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랬다.
‘이 사람이랑 있으면 매번 젖거나 끌어안기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카미엘은 애처로울 정도로 끙 소리를 내며 내 귓가에 자기 뺨을 밀착할 뿐이었다.
체향이 많이 묻어나고 있을 목선을 따라 코가 숨을 들이마시며 미끄러지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울리는 커다랗고 뜨거운 품에 안겨, 나는 생각했다.
정화력 때문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순간 이 사람이 나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만큼은 진짜인 것 같다고.
일찍 혼자가 되어, 성인이 되어서는 이렇다 할 상대도 없이 거의 일만 하며 보냈던 내겐 몹시 생경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상하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미친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홀린 사람처럼 손을 들어, 카미엘의 너른 등을 마주 안아 주고 말았다.
카미엘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넘치도록 채워졌다는 듯, 그렇게 만족스러운 한숨이었다.
“공녀가…… 이렇게까지 동생을 사랑하는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카미엘은 내가 그가 엘레니를 해치는 걸 막기 위해 그를 안아 주기까지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며 부정하려는 순간, 카미엘이 나를 조금 제 품에서 떼어 놓으며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공녀의 동생은 이렇게까지 해 줄 가치가 없어.”
“…….”
“마음 주지 마.”
“지금…….”
말랑하게 풀린 분위기 탓일까, 필터링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들켰나?”
들켰다는 사람치고는 당당한 대답이었다. 물어본 내가 도리어 민망해질 정도였다.
카미엘이 느긋하게 내 이마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내게 안 준 거라면 누구에게도 주지 마.”
“…….”
그냥 해 본 말의 대답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진심 같은 말이었다.
* * *
바로 그때.
방으로 돌아온 엘레니는 흰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나를…… 무시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자신은 카미엘이 그릇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를 쫓기 시작했는데.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묶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어떻게 엘레니, 그녀보다 유리 엘로즈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저에게 향하는 것과 딴판일 정도로 다정하던 카미엘의 말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 여자를 앞에 두고 자신을 죽이느니 마느니,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은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대체 유리 엘로즈 따위가 무엇이기에……?’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엘레니의 머릿속을 이런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건…… 제가 정화력을 발휘했기 때문인가요?”
“그래야만 하는 거겠지.”
“내가 이렇게 돌아 버린 건 다…… 공녀가 이상한 힘을 발현했기 때문이어야 하는 건데.”
이상한 힘. 정화력 때문에…… 그는 그 힘 때문에 자신이 돌아 버렸다고 말했다.
‘혹시 그 힘 때문에 유리 엘로즈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건가?’
타당한 추론인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같은 그릇인 자신을 팽개치고 유리 엘로즈 따위에게 그렇게 절절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가해한 측면이 있었다. 엘레니, 그녀 자신은 유리의 정화력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분의 말씀대로 대공이 나보다 그릇으로서 우월하기 때문에 뭔가 다른 걸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
엘레니는 다시 한번 입술을 짓씹었다.
언제부터인가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를 않더니만, 유리 엘로즈는 이렇게 여기까지 그녀를 방해했다.
‘아무래도…….’
그분을 다시 한번 만나 뵈어야 할 때인 것 같다고, 엘레니는 판단했다.
엘레니는 큰 결심을 하고, 그분이 저번에 건네준 반영구적인 텔레포트 마법이 새겨진 마나석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그분께서 비상시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지금이 바로 그 비상시라고, 엘레니는 판단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엘레니는 코랄 제도의 별장에서 씻은 듯이 몸을 감추었다.
* * *
“……카미엘이 너를 거절했다고?”
“네.”
엘레니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다 듣고도, ‘그분’께서는 여유롭게 피우던 시가를 마저 피울 뿐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초를 크리스털 재떨이 위에 내려놓으며, 그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엘레니, 너 정도로는 카미엘에게 좀 모자랐던 모양이구나.”
“……!”
엘레니가 초록색 눈을 부릅떴다. 그녀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말이었다.
“그런…… 그럴 리가 없어요.”
엘레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없고 유리에게는 있는 정화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카미엘이 정화력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인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분의 수하로서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엘레니는 반드시 이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게다가 급하게 여기 온 목적 자체가 카미엘이 정화력에 과민 반응하는 이유를 함께 추론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는 건, 꼭 마치…… 자신이 유리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절대 그럴 순 없어.’
엘레니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뱃속 깊은 곳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나저나 유리 엘로즈가 참으로 골칫거리로구나. 정화력까지 각성해 버려서는…….”
마치 엘레니의 그런 속을 정확히 읽은 것처럼, 그분이 중얼거렸다.
엘레니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정화력이 신성 마법이라지만, 살아 있는 마물을 상대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위명에 비해 미약한 힘일 뿐이에요.”
“흠, 그런가?”
“제가 이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믿으셔도 좋아요.”
“그래, 엘레니.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그분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니가 조금 생각을 하다 이렇게 말했다.
“유리 엘로즈가 정화력을 지녔든 말든, 그녀를 없애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지 않나요?”
“그건 사실이지.”
그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미엘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흥미로운 각본을 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속내를 감추려고 했지만, 엘레니는 표정이 약간 딱딱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 엘레니에게, 그분이 마치 선고를 내리듯 말했다.
“당분간 유리 엘로즈를 없애는 계획은 중지해야겠다. 엘레니, 너도 명심하도록 해라.”
“……알겠어요.”
엘레니는 표정을 감추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엘레니의 속내는 전혀 모르고, 그분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알아들었다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