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82)

112화

“……그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미덕 중 하나인데.”

길게 침묵하던 카미엘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네?”

“애초에 그 망할 그릇이라는 게 우리가 유대감을 가져야 할 이유라고 말하는 거라면…….”

카미엘이 조금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긍정적인 뉘앙스를 주는 웃음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어.”

사그라들었던 살기가 다시금 공기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윽…… 어, 어째서……?”

엘레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의 울먹이는 어조로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 저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분명 후회하게 되실……”

“내가 할 말은 단 한 가지야.”

카미엘이 엘레니 쪽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다면…….”

힉 하고 엘레니가 얕게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카미엘이 명령했다.

“뛰어.”

“윽……!”

엘레니는 주춤거리며 버텨 보려던 눈치였으나, 결국 제게 쏟아지는 위압감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곧 덫에서 놓여난 사슴처럼 쏜살같이 자리를 벗어났다.

정적이 흘렀다. 엘레니가 너무 빠르게 도망치는 바람에 퇴장 타이밍을 놓친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잠깐. 이럴 게 아니라.’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들키기 전에 나도 얼른 도망치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도망가려 치켜든 발뒤꿈치를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어, 어떻게……?’

분명히 기척을 감추고 있었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공녀가 제 발로 나오기 싫으면 내가 갈까?”

한순간이지만 엘레니가 왜 도망갔는지 알 것 같았다.

‘무, 무서워…….’

하지만 가만히 있는데 카미엘이 찾아오는 것과 내가 스스로 그 앞에 나아가는 것,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그래도 후자가 나을 것 같았다.

‘전자라면 나도 모르게 도망쳐 버릴 것 같달까…….’

도망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성공할 리가 없다는 게 큰 문제였다.

‘괘씸죄만 적립하지 말고, 순순히 자진 납세하자…….’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미적거리며, 모습을 감춰 주던 후원의 장미 덤불을 돌아 카미엘의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

눈앞에 불쑥,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잘생긴 얼굴이 등장했다.

“못 기다리고 그냥 왔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쉿.”

잔뜩 억울한 눈빛을 보냈지만, 카미엘은 외려 이러다 들리겠다며 나를 진정시킬 뿐이었다.

‘진짜 억울하네, 이거!’

씩씩거리는 나를 달래는 카미엘이 어쩐지 즐거워 보여서 더 얄미웠다.

“눈빛이 불손해.”

“제 마음이 불손한 상태니까 당연하죠.”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카미엘의 얼굴에 실소가 번졌다.

그 미소 띤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조금 전 그렇게 살기를 뿜어내며 엘레니를 압박하던 사람이 맞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카미엘은 즐거워 보였고, 내가 돌연 손을 들어 그를 때린다 해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워 보이기도 했다.

손바닥을 뒤집는다는 말로도 모자란, 그런 극적인 변화였다.

그 변화의 격차가 문득 낯설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카미엘을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왜 그래, 공녀?”

나는 생각했다.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흔들다리 효과 때문인가?’

음.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미엘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던 나 아닌가? 지금 이렇게 심장이 주책맞게 나대는 이유는 설렘 때문이라기보다 공포심에서 기인했을 확률이 높았다.

“왠지 공녀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럴 리가요.”

나는 단칼에 부정했다. 지금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타당한 근거에 기인한 논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미엘은 그런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공녀.”

“네?”

“미안한데 좀 껴안아도 되나?”

“네…… 네?”

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은 또 뭐람?

내가 경악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카미엘이 자기는 무해하다는 듯 가증스럽게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해명을 시도했다.

“잠깐, 공녀. 내 말을 좀 들어 봐. 나는 지금 감정적으로 몹시 불안한 상태란 말이야. 공녀도 들었으니 알잖나?”

뭘 알아? 뭘!

“제 동생을 겁주시는 거라면 잘 들었는데요.”

“아, 이런. 역시 날 오해하는군.”

카미엘이 연극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고 나를 좀 이해해 줘. 공녀가 나를 부른 줄로만 알고 신나서 나왔는데, 난데없이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들은 내 기분이 어떻겠어?”

“그야 당연히…….”

좋지는 않겠지?

“그래, 맞아.”

카미엘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깜빡 공녀의 동생을 죽여 버릴 뻔했다니까.”

“죽여…… 네?”

누구를 뭐가 어쩌고 어쩔 뻔해?

농담이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아까 전 엘레니를 향한 살기를 간접적으로 겪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진담이다. 이건 100% 진담이야.’

머릿속에서 삐이이익! 경보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위험인물이라는 걸 깜빡 잊었어.’

근래 피치 못할 일로 좀 가까이 지냈기 때문일까? 나는 이 사람이 미래의 최종 보스이자 반역자라는 사실을 종종 깜빡하는 부주의한 습관이 들어 버렸다.

잊고 있었던 경계심을 되살린 내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카미엘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상하군. 왜 나를 피하는 거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요.”

두 공녀 중에서 한쪽을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건, 남은 한쪽 공녀도 상황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죽여 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

내가 그런 의사를 피력하자, 카미엘이 “뭐?” 하더니 갑자기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눈물까지 훔치며 말했다.

“오랜만에 크게 웃겼어, 공녀.”

“뭐, 뭐가 그렇게 웃긴데요?”

“가당치도 않아서 말이야.”

그때, 등 뒤에서 바람이 일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휘날렸다.

카미엘이 손을 뻗어 휘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워 주며 말했다.

“내가 공녀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가당치도 않아서 웃었어.”

“그게 왜……?”

카미엘이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한 가지만 명심해 둬.”

그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절대로 공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면…….”

“…….”

속삭이는 목소리가 낮았다.

“공녀는 날 골라야 해.”

터닝 포인트 발생!

이제까지 당신의 행동을 정산합니다.

루트가 수정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루트가…… 수정되었다고?’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게다가 카미엘이 한 말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나는 분명 원작에서 이 사람이 일으킨 반역에 휩쓸려서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람은 어째서 확신에 찬 어조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문득, 그런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살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거든. 너무 많이 보이지도, 너무 많이 들리지도 않고. 어디가 불편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살면서 불편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느낌이 처음이었다는 건, 평소에는 불편하고 아픈 게 기본 상태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정화력을 사용할 때면, 그런 상태가 나아진다고 카미엘은 말했었다.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건…….”

나는 입술을 축이며 묻고 말았다.

“제가 정화력을 발휘했기 때문인가요?”

말하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무른 건, 다 정화력 때문이다.

‘내가 뭔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화력을 발현했기 때문에 이러는 것뿐이야…….’

그렇게 추측해 내자 왜일까, 일순간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카미엘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야만 하는 거겠지.”

“…….”

“내가 이렇게 돌아 버린 건 다…… 공녀가 이상한 힘을 발현했기 때문이어야 하는 건데.”

카미엘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

“이 밤에 나는 크게 실망했고, 제법 지쳤어.”

카미엘이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적지 않게 화가 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러시겠죠?”

난데없이 사칭에 당하고 뜬금없이 ‘나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 같은 독선적인 말을 들어 버리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았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공녀가 날 달래 줘.”

……결론이 뭔가 이상했다.

“네?”

“공녀의 여동생이 날 모욕하고 상처 주었으니, 당연히 언니인 공녀가 책임지고 날 달래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걸 제가 왜……?”

“그럼 내가 이대로 가서 공녀의 동생을 죽여 버려도 괜찮다는 말이야?”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쉬잇. 들리겠어.”

“들리면 뭐가 어때서요! 밀회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난 지금부터 이게 밀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는데.”

“이, 이……!”

발칙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런 말을 저렇게 요망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하다니…….’

내 정화력만 골수까지 빼먹을 작정인 주제에!

나는 약간 방어적인 태도가 되어 대답했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오늘 전 전하를 정화해 드릴 수 없어요.”

카미엘이 멀뚱멀뚱 두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아까 결계를 치기도 했고…… 전하랑 엘리야 경을 정화하면서 정화력을 거의 다 소모해 버렸거든요.”

“아, 맞아.”

갑자기 카미엘이 약간 부루퉁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공녀가 다른 사람을 정화한 거. 그것도 제법 서운하긴 했는데, 일단 지금 말할 주제는 아니니까 잠깐 넘어가도록 하지.”

“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카미엘이 한 발짝, 내게 다가왔다.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공녀.”

“…….”

“나는 날 달래 달라고 말한 거지, 정화해 달라고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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