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 *
저녁 만찬 자리에는 카미엘의 요구 사항대로 굽기를 세심하게 조절한 스테이크가 메인으로 올랐다.
휴식을 취하는 중인 세실리아 황녀를 제외한 모두가 저녁 만찬에 참석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러 응접실에 모였다.
“저는 오늘 겪은 일이 많아서…… 이만 실례하도록 할게요.”
의외인 것은 엘레니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는 점이었다.
칼릭스와 나, 카미엘과 엘리야는 응접실 소파에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앞에는 각자 취향에 맞춘 차가 한 잔씩 놓였는데, 카미엘이 주문한 것은 진한 핫 초콜릿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초콜릿을, 무슨 물 마시듯이 잘도 넘기는 남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의외로 단걸 즐기시네요…….”
“의외라는 건 무슨 뜻인데?”
“젊은 남성분들은 단맛을 그리 즐기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대다수의 사내놈들에게 초콜릿의 완벽한 풍미를 이해할 혀가 없다는 건 개탄할 만한 일이지.”
카미엘이 초콜릿을 한 번 더 홀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나까지 그렇게 섬세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야, 공녀.”
“아, 네…… 그러시겠죠.”
그냥 단걸 좋아하는 것에 말이 많기도 하지.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조금 웃었다.
“입맛 얘기는 그쯤 하면 될 것 같군요.”
그때, 엘리야가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화제가 있나?”
“……황제 폐하께서 이번 건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을 부르고 싶어 할 거라든지.”
“그거야 마탑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귀찮게 굴면 때려치우면 그만 아닌가?”
카미엘이 은제 티스푼을 입에 문 채로 빙글빙글 웃었다.
“왜 갑자기 아까 끝난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각자야 무시한다 쳐도, ‘내 제자’가 그 부름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 건에 대해서는 마탑주님께서 염려하실 바가 전혀 없습니다.”
냉정한 목소리로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로잔헤이어는 그런 합당치 못한 명령에 혈족을 내주지 않을 테니까요.”
“어린 소공작께선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시로군.”
“…….”
‘어린’이라는 말에 심기를 자극당한 칼릭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자신감이 아니라 그게 사실인 겁니다.”
“뭐, 그래. 어찌 됐든 공녀를 지킬 수 있다면 좋은 거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칼릭스가 코웃음을 쳤다.
“로잔헤이어의 공녀이기 이전에 제 누님이십니다. 저는 소공작으로서 혈족을 보호하는 의무에 소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
카미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때, 조용히 있던 엘리야가 끼어들었다.
“행여나 로잔헤이어의 보호가 황제 앞에 효력을 다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내 제자니까요.”
칼릭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마탑이 당신의 누님을 보호할 거란 말입니다, 소공작. 그런 간단한 말도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얼레? 분위기 이거 왜 이래?
셋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상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쌈판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당황한 나를 내버려 두고, 세 사람은 본격적인 쌈질의 세계로 떠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나, 마라케시 경? 나라도 기분이 상하겠어.”
개중 카미엘은 진지하게 싸울 생각이라기보다 싸움을 붙이는 걸 즐기고 있는 듯했다.
엘리야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남한테 한 말에 일일이 기분이 상하시다니, 그릇이 좁으시군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마탑주께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편이시군요.”
“공격적인 게 아니라…….”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나는 눈알을 한 번 크게 굴렸다.
하지만 엘리야와 칼릭스는 말싸움에 진심이 된 모양인 듯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고, 카미엘은 그 사이에서 한마디씩 말을 보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에리스의 황금 사과가 따로 없군.’
소모적인 말싸움이 한심해서일까, 보고 있자니 눈이 가물가물 감겨 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정화력을 많이 사용했지.’
다 쓰지는 않았지만 거의 한계까지 정화력을 긁어 쓴 셈이었다. 기절까지는 아니어도 몹시 피곤하긴 했다.
“저는 이만 올라가 볼게요.”
“그러니까 소공작의 그런 태도가 문제를 비화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태도라면 마탑주님께서도 지지는 않고 계십니다만.”
글렀다. 뭐라고 말해도 귀에 들어갈 태세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한심한 사람들이야 아주 밤이 새도록 여기서 싸우거나 말거나.’
나는 올라가서 좀 쉬어야겠다.
“…….”
카미엘이 그런 내게 즐거운 눈빛으로 눈짓하며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하나도 고맙지는 않았다.
‘저 사람도 참 성격 만만치는 않구나.’
참 여러모로 글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 *
방으로 올라왔지만, 너무 피곤한 탓인지 오히려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실내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일어나 앉았다. 그런 나를 위해 에나가 숙면에 좋은 허브티를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
그런데 방으로 돌아오는 에나의 두 손이 비어 있었다.
“어머?”
손이 비어 있을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공녀님, 왜 여기에 계세요……?”
“나?”
황당했다.
“나야 네가 숙면에 좋은 차를 가져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게 아니라…….”
에나의 말인즉 이랬다.
“내가 대공 전하께 개인적으로 정원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쪽지를 보냈다고?”
“네. 응접실을 지나는데 분명히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저는 그런 줄만 알고.”
“…….”
시킨 적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엘레니.’
그 애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
‘대체 대공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내 이름까지 판 거지?’
그렇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면 들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
“공녀님?”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런 쪽지를 보낸 것 같기도 하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 테니 에나, 돌아오면 마실 수 있게 차를 준비해 주지 않을래?”
“네? 네, 알겠습니다.”
에나가 어리둥절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느슨하게 걸친 가운을 추슬러 입고, 예전에 사냥제에서 사용했던 ‘정령의 친구’ 마나석을 챙긴 채 방을 나섰다.
‘정원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했지.’
코랄 제도의 부지는 좁은 편이라 대귀족의 별장이라 해도 넓은 정원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주택 밀집 지역이라 건물에 따라서는 정원이 아예 딸려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엘레니가 카미엘을 정원에서 만난다고 한다면, 그걸 염탐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아, 정원으로 가는 샛길을 알아내서 그리로 향했다.
1층에 작게 조성된 회랑을 통해 정원에 접근하자,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쎄. 나는 공녀에게 아무런 흥미가 없는데.”
카미엘의 목소리였다.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엘레니가 의연하고 빠르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제 얘기를 들으셔야 할 거예요.”
“그렇게 할 만한 최소한의 이유조차 없다는 게 내가 할 대답이고.”
“과연 그럴까요?”
“그런 식으로 흥미를 끌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진부해.”
카미엘이 자리를 뜨려는데, 엘레니가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전 알고 있어요! 당신도 그릇이라는 걸요.”
“…….”
카미엘이 걸음을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느끼기에도 아주 싸늘한 침묵이었다.
‘그릇……?’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더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지껄이는 용기 하나만큼은 칭찬해 줄 만하군.”
카미엘의 목소리에 언제나 배어 있던 웃음기 어린 여유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한데 배우지 못했나? 말을 뱉을 때는 그에 맞는 책임도 지게 된다는 걸 말이야.”
주변을 에워싸는 서늘한 위압감에 나까지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는……”
“나도 알아.”
잠잠히 미소를 짓는 카미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죽고 싶다는 말이었잖아, 그거.”
저벅, 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미엘이 엘레니에게 한 걸음 다가간 모양이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나서야 하나, 이거?
‘까딱 잘못해서 로잔헤이어의 공녀를 죽여 버린 로엔 대공이 이참에 좀 더 일찍 반역을 일으켜 버리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이거!
소름 끼치는 상상에 내가 침을 꿀꺽 삼킨 순간, 엘레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저도, 저는 단지 그게 무슨 기분인지, 안다는 말을 하려고……”
“알아?”
카미엘이 코웃음을 쳤다. 시퍼런 칼날이 목으로 쇄도하는 것 같은 살기가 주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카미엘이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감히?”
“제, 제게 이러시면 안 돼요.”
엘레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
침묵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카미엘은 아까까지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기를 짓누르던 살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왜지?’
내가 듣기에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데, 카미엘이 듣기에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엘레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급한 호소를 이어 나갔다.
“정말이에요. 저도 당신과 같은 ‘그릇’이에요.”
……저 ‘그릇’이라는 건 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걸까?
“언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오로지 저만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엘레니가 속삭이듯 빠르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언니에게는 황가의 피가 섞여 있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