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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82)

110화

나는 다른 마법사들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엘레니와 칼릭스의 부상만이라도 치료해 줄 수 없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상위 마물에 당한 상처를 회복시키려면 그만큼 수준 높은 회복 마법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그런 회복 마법까진 구사할 수 없어서…….”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상급 이상의 포션을 사용하여 부상을 치료할 것을 권했다.

‘말이야 맞는 말인데.’

엘리야는 그렇다 치고, 엘레니와 칼릭스는 어떻게 한담?

“제가 엘레니를 안고 돌아가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칼릭스. 너 지금 다리 쪽 피부가 완전히 벗겨지려고 하고 있잖아.”

발뒤꿈치에 물집만 잡혀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게 사람인데, 칼릭스가 저 상태로 엘레니를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릭스는 조금 더 고집을 부리려는 눈치였지만, 엘레니가 먼저 입을 여는 게 빨랐다.

“저, 대공 전하…….”

“…….”

엘레니가 몹시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를 집으로 데려다주실 수 없으실까요……?”

갑자기 지목당한 카미엘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엘레니가 눈물을 떨구며 가련한 모습으로 거듭 부탁했다.

“보시다시피 제 꼴이 이렇고, 저희 오라버니도 부상을 입으셔서…….”

“아, 난 싫은데.”

명쾌할 정도로 분명한 자기 의사 표현이었다.

“네……?”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엘레니의 표정이 굳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말은 안 해도 얼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사 된 도리가 있지, 레이디를 부축하는 걸 거절할 줄이야?’

하지만 카미엘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이래 봬도 꽤 지쳤거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쌩쌩해 보였다.

칼릭스는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분간이 안 가는 눈치였다.

엘리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한.”

“아, 네!”

“방법이 없군요. 당신이 공중 부양 마법으로 엘레니 공녀를 부축하도록 하세요.”

“네! ……네?”

공중 부양 마법으로 공녀를 부축하라고?

해괴한 명령에 마법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나 엘리야는 요지부동이었다.

“난 지쳤고, 로엔 대공도 지쳤다지 않습니까.”

카미엘의 말을 믿는다기보다 일단 그런 걸로 치자는 투였다.

“작위도 없는 당신들이 공녀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없고, 남은 건 마법뿐일 수밖에요.”

“하지만 마탑주님…….”

“설마 그 간단한 마법조차도 못 한다는 건 아니죠?”

엘리야의 기세에 몰린 마법사들이 “그, 그건 아닙니다만…….” 하고 쭈그러들었다.

“아니, 저는……”

황당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엘레니가 뭐라 항의하려 했지만, 엘리야는 귀찮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뭡니까? 생각해 보니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당연히 아니었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엘레니는 차마 거절도 하지 못하고 공중 부양 마법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 영애가 공중에 둥둥 떠서 이동하는 모습은 상당히 기괴해 보였다. 당사자인 엘레니조차도 황당함과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치맛자락을 단단히 틀어쥐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희대의 볼거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엘레니, 괜찮니?”

칼릭스만이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엘레니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럼 됐군요.”

엘리야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갑시다.”

공중에 붕붕 떠오른 엘레니를 앞세운, 상당히 기묘한 모양새의 일행이 출발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걸었을까?

“누님, 이걸 걸치시는 게 좋겠습니다.”

뒤늦게 쫄딱 젖은 내 옷을 발견한 칼릭스가 자기 웃옷을 벗어 건네주려고 했다.

“아, 고마……”

그 옷을 고맙게 받아 들려던 순간.

화르륵!

“!”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옷 주변에 뜨겁지 않은 불길이 일면서 젖은 옷을 완전히 말려 버렸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마법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엘리야였다.

“지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 정도 간단한 마법도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 네.”

깊게 파고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대공 전하, 대공 전하의 옷은 제가 말려 드리겠습니다.”

뒤쪽에서 눈치를 보던 마법사 중 하나가 똑같이 쫄딱 젖어 있던 카미엘의 옷을 말려 주었다. 물론 엘리야는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카미엘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인기척이 느껴지는군.”

“확실히……!”

“갑자기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야.”

그가 그렇게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헛! 로엔 대공 전하. 그리고 마탑주께서도 계시는군요.”

제일 앞에 선 기사단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둘을 알아보았다.

“방위 기사단인가?”

“예, 그렇습니다. 레비아탄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듣고…….”

“안타깝지만 늦었어.”

“서, 설마 이 인원으로 레비아탄을 상대하신 겁니까?”

기사단장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카미엘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런 셈이겠지?”

“하…….”

기사단 사람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특히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엘레니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했다.

“이…… 레이디께서는……?”

총대를 멘 기사가 물었다. 엘리야가 간단히 대답했다.

“부상자 호송 중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기사의 눈빛으로 보건대 부상자를 호송하는 다른 더 좋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야는 뭐가 문제냐는 듯, 아니, 아예 무슨 문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그, 그럼.”

기사단장은 아예 말을 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레비아탄의 사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태웠습니다.”

“예?”

기사단장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에 태웠다니요?”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카미엘이 어쩐지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토벌이 끝난 마물의 사체를 혹시 모를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전소시키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 않나.”

“그건…… 마물의 사체가 가치가 없을 때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기사단장이 항변했다.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도시 하나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면 태워야 옳은 거지.”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대공 전하가 아니십니다!”

기사단장이 예상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코랄 제도는 황제 폐하의 직할령이고, 따라서 코랄 제도 안에서 발생한 마물 사체의 소유권 역시 폐하께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럼 네놈의 말은, 황제 폐하께서 도시 하나와 바꿔서라도 레비아탄이란 마물의 사체를 원하신다는 건가?”

“그건…….”

“내가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코랄 제도가 궤멸되도록 내버려 두었어야 하냐는 말이야.”

“…….”

기사단장이 그제야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카미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마무리했다.

“때론 이치에 안 맞는 말은 아니 지껄이느니만 못한 법이지.”

그들의 공방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마물 사체의 소유권에 대해 약간 민감하게 구시는 편인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외치던 기사단장의 태도는 황제에 대한 과잉 충성에서 비롯했다기보다, 무언가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뭐, 확신할 순 없는 거니까.’

나는 어쩐지 석연찮은 느낌을 가슴 한쪽에 묻어 두기로 했다.

* * *

기사단장은 이 일로 황제가 관련자를 불러 문책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간신히 남기고 떠났다.

그에 대한 세 남자의 반응은…….

“그러든지 말든지.”

“폐하께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넣어 보는 것도 가주 후계자로서 경험해 봐야 할 일이죠.”

“귀찮게 굴면 때려치우면 그만입니다.”

……다음에 다시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는 일단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내가 엘레니에게 ‘어떻게 마물과 싸우고 있는 곳에 찾아온 거냐’고 물었지만, 엘레니는 그저 산책길에 우연히 발을 디뎠다는 대답만을 반복해서 내놓을 뿐이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본인이 워낙 그렇게 극구 주장하는 터라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추궁하기에도 뭔가 애매한 사안이고.’

어쨌든 집에 돌아오자마자 칼릭스는 의사를 불러 자기와 엘레니의 부상을 치료하게 했다.

“어…….”

그러는 동안 나는 제각기 소파에 앉아 있는 엘리야와 카미엘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집에 돌려보내기는 좀 그런데.’

“그…… 어떻게 식사라도 하고 가실래요?”

어색하게 꺼낸 말에 엘리야가 쓱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미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그래.’

이쪽은 일단 먹는다고 치고. 나는 카미엘 쪽을 바라보았다.

카미엘은 나른한 자세로 소파에 길게 기대앉은 채 대답했다.

“나는 고기 굽기에 민감하니까, 그 점을 잘 숙지해 줬으면 좋겠군.”

이쪽은 숫제 무슨 맡겨 둔 저녁 식사라도 찾아가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갑자기 잘 치료를 받던 엘레니가 쿡쿡 웃으며 끼어들었다.

“잘 숙지하도록 주방에 이를게요.”

마치 이제까지 대화를 나누던 게 내가 아니라 엘레니 자신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날치기를 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큰일을 당했을 거예요.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

엘리야가 가느스름한 눈초리로 엘레니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곱지는 않았다. 마치 ‘이건 뭐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카미엘은 한술 더 떴다.

“공녀, 잘 듣고 있어?”

엘레니의 대답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내 대답을 재촉한 것이다.

“어, 네…… 잘 들었어요. 주의하도록 주방에 이를게요.”

엘레니를 따라 대충 대답했을 뿐인데, 카미엘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꼭 주인의 손이 가야 만족하는 까탈스러운 고양이 같았다.

그런 무엄한 생각을 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엘레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엘레니는,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언니는 어느 자리에서나 관심을 독차지하시네요.”

그다지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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