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82)

109화

엘리야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유리에게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잠시 후, 유리의 손에서 반짝이는 빛이 퍼져 나왔다.

“!”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던 상처의 고통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엘리야는 얼떨떨했다.

‘과연, 정화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안다 이건가……?’

분명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실력을 쌓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좀 어떠세요?”

조금씩 썩어 가던 상처 주변부의 부패가 멈추는 것을 확인하고, 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야는 그때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보면 모릅니까? 아픕니다.”

“아, 역시.”

유리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야는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제가 놀라 꿀꺽 침을 삼켰다.

‘아프다’니?

물론 상처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정도 되는 상처가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빌어먹게 아프긴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장담컨대 이보다 더 심각한 부상도 숱하게 당해 본 사람이었다. 비단 마물을 상대해서만은 아니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법이나 실험은 대개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게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험악한 꼴을 여러 번 당하면서, 엘리야는 타인에게 제 상태를 ‘아프다’고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유리의 걱정스런 눈동자 앞에서는, 마치 입술이 제멋대로 노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말이 튀어나왔다.

‘미친 거 아닌가……?’

엘리야는 아연해져서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리는 걱정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안색이 창백해요. 빨리 돌아가서 처치를 하는 게 좋겠어요.”

“처치를 해야 하는 건 저 마물입니다.”

레비아탄은 재생과 분열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마물이었다. 숨이 끊어졌다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 버리든지 해야 했다.

그렇게 설명하자 유리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런 처치는 꼭 엘리야 경만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저 사람들한테 맡기고 당장 돌아가서 상처를 좀 보자니까요.”

저 사람들, 이라고 하면서 유리가 가리킨 건 엘리야에게 균열의 발생을 알린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짓고 있는 황당한 표정을 보자, 엘리야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자각했다.

‘제기랄.’

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한참 모자란 제자에게 아픈 척을 하고 있다니.

석 달 전의 엘리야였더라면 가차 없이 미쳤다고 욕할 법한 그런 상황이었다. 물론 석 달 후인 지금의 엘리야도 자신이 단단히 돌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정도 상처조차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는 얼간이인 척하고 있단 말인가?

“엘리야 경?”

자문한 순간 유리가 그를 걱정스럽게 불렀고, 그때야 비로소 엘리야는 답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게 좋았던 거다.

유리 엘로즈, 상황이 부득이하게 돌아가 어쩔 수 없이 제자로 삼은 그녀가 이렇게 걱정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봐 주는 게 좋았던 거였다.

그래서 간단히 치유할 수 있는 이까짓 상처를 두고 아픈 척을 하고 만 거다.

스스로의 솔직한 속내를 발견하고 경악한 엘리야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막을 수 없이 얼굴 위로 화악 홍조가 번졌다.

‘미친, 미치지 않고서야……!’

“엘리야 경? 왜 이래요?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얼씨구. 엘리야는 환장할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유리 앞에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누군가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마탑의 주인께서 단순한 부상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맞습니까?”

유리의 동생인 칼릭스 로잔헤이어였다.

‘윽.’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엘리야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그 대신 유리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며 동생을 나무랐다.

“이건 마물에 당한 상처야. 쉽사리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아니었다.

마물의 마기에 당한 부분도 유리가 완벽하게 정화해 주었고, 그게 아니어도 시간을 좀 들이면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상처였다.

‘애초에 내가 잘린 팔도 붙일 수 있다고 했던 건 어디로 잊어버린 건지…….’

살짝 한심하면서도 그런 점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

‘……잠깐, 뭐?’

한심한 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엘리야는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카미엘도 엘리야를 조롱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고 있는 꼴이 적잖이 보기 안 좋은데, 해결 좀 하지 그래?”

“……참견하지 마십시오.”

심란한 상태로도 말대꾸를 잊지 않은 엘리야는, 이를 악물고 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서 흰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크게 찢어진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고,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료할 수 있는 거였어요?”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니, 뭐라고요?”

그렇게 궁색한 변명을 하는 저 자신이 너무 창피한 나머지 엘리야는 유리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은 유리가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언니! 칼릭스!”

그들이 레비아탄을 상대한 해변 절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쪽에서, 금발을 휘날리는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레니?”

엘레니였다.

* * *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엘레니를 바라보았다.

‘쟤가 어떻게 여길?’

산책로가 이어져 있긴 하지만, 이쪽은 별장 지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멀리서 봐도 마물과 싸우는 전투 장면이 보였을 텐데, 도망가기는커녕 이쪽으로 접근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엘레니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찰나였다.

“앗, 저기!”

“엘레니!”

새카맣게 탄 레비아탄의 시체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끈적한 검은 피로 이루어진 듯한 슬라임 같은 물체가 엘레니의 허리를 휙 낚아챘다.

“꺄아아악!”

엘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칼릭스가 희게 질려 검을 뽑았으나, 슬라임은 마치 보란 듯이 엘레니를 꽁꽁 제 몸으로 얽매었다.

“오, 오라버니!”

엘레니가 창백해진 채로 외쳤지만, 칼릭스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려다 주춤했다.

자칫 잘못하면 슬라임을 죽이려다 엘레니까지 베어 버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인 것 같았다.

엘리야가 말했다.

“재생형 슬라임은 빠른 시간 내에 사람을 소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네?”

“저대로 인간을 소화하게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일단 둘을 분리해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

시스템 메시지가 시기적절하게 떠올랐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Yes’를 선택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392

366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내 몸에서 피어오른 금빛 기운이 엘레니를 집어삼키려는 슬라임을 빠른 속도로 덮쳤다.

키에에에엑!

재생형 슬라임이 비명을 지르며 산화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지대를 잃은 엘레니가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

“엘레니!”

칼릭스가 빠르게 접근하려 했지만 슬라임의 마지막 저항 때문에 조금 늦고 말았다.

털썩!

“아아악!”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친 엘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왼쪽 발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오, 오라버니, 아, 아파요……!”

엘레니가 헐떡거리며 쓰러졌다. 칼릭스가 그런 엘레니를 부축했지만, 꺾인 발목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칼릭스가 얼른 엘레니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런 칼릭스의 발을 숨어 있던 다른 재생형 슬라임 개체가 잡아챘다.

“윽!”

칼릭스의 옷이 슬라임 속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칼릭스가 재빨리 검을 들어 슬라임을 베어 내자, 슬라임은 “키이이익!” 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쉽게 죽어 버렸다. 하지만 칼릭스의 발목은 이미 심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변해 버린 후였다.

“괜찮아, 칼릭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칼릭스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괜찮은 말투는 아니었다.

“오, 오라버니…….”

“둘 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그때, 엘리야가 냉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칼릭스가 이를 악물며 다친 발목을 한 채로 엘레니를 부축해 옆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옆으로 물러나자마자, 엘리야가 마법을 발동했다.

땅 위로 빛이 현란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마법진 안쪽으로부터 새카만 불길이 치솟아 레비아탄의 사체를 태웠다.

“지옥화(地獄火)…….”

마법사들 중 하나가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대규모 마법에 회복 마법까지 사용하시고도 이런 마법을 사용할 기력이 남아 있으시다니…….”

모르긴 몰라도 엘리야가 꽤나 괴물 같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에는 한 줌 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윽.”

“에, 엘리야 경!”

마물을 전소시킨 엘리야가 휘청이며 넘어지려고 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얼굴이 창백해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엘리야는 완강히 부정했지만, 그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아까보다도 지금이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이거 큰일 났군.”

카미엘이 남의 일 보듯 무심하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나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 난장판이야.’

엘레니와 칼릭스는 부상을 입었고, 엘리야는 마력이 고갈된 듯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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