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82)

108화

하하.

‘당연하지.’

괜히 고집을 부렸다가 여기서 더 그를 자극하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고집도 부릴 때 부려야 하고 자존심도 세울 때 세워야 했다.

나는 화제를 좀 돌릴 겸 물었다.

“정신이 드세요?”

“그럴 일은 없어.”

“하지만 말투가 평상시 말투로 되돌아오셨는데요.”

카미엘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말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릴 일은 없을 거야. 자제력이란 걸 발휘할 수 있나, 없나 그 차이인 거지.”

“앗, 네…….”

나는 약간 쭈그러들어서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지금은 자제력이라는 게 작동을 하는 상태인 건가요?”

“글쎄. 어떨 것 같은데?”

카미엘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한쪽 팔로 추어 안고 내려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 다행이다.’

확실히 정신이 드셨군요, 하는 소리를 해 봤자 카미엘의 억하심정만 자극할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미엘이 속삭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잠시 후, 카미엘은 젖은 땅 위에 나를 사뿐히 내려 주었다.

“내 상태와 별개로, 결계를 친다는 건 굉장한 발상이었어, 공녀.”

“그렇다고 하시면 다행이고요…….”

나무 위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내가 친 결계가 워낙 조그마한 탓에 우리는 여전히 한 우산을 쓴 사람들처럼 바싹 붙어 서 있어야만 했다.

카미엘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다시 한번 가 볼까?”

“그래야죠.”

시간 낭비를 꽤 했으니, 이제는 정말 움직여야 했다. 인명 피해를 막으려면 지체 없이 행동할 때였다.

우리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거세게 내렸다. 검은 빗줄기가 너무 많이 내리는 탓에 나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는데, 카미엘은 재주 좋게 길을 분간해 내며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걸음을 옮겼을까?

갑자기 빗줄기가 급속도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죠?”

갑자기 트이는 시야에 내가 물은 순간.

쿠웅!

“!”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힘이 충돌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운석이 지면에 충돌한 것만 같았다. 충돌이 남긴 파동이 마치 여진처럼 공기 중을 울렸다.

우오오오오!

파공성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지축을 뒤흔들었다.

“이건…….”

“저쪽에서 레비아탄을 먼저 발견한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빨리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공녀?”

카미엘이 나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망설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

얕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카미엘이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카미엘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숲속을 주파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롤러코스터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산행이 얼마간 이어진 후.

“저거……!”

멀리서 허공에 떠오른 마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솔레아 호수에서 보았던 물뱀과 거의 비슷했지만, 굵직한 다리와 날카로운 갈고리 발톱이 달린 앞발이 있다는 점이 그때와 달랐다. 그리고 느껴지는 위압감도 그때보다 더했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는 아냐.’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몸통의 절반가량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 있었다.

“완전히 현신하기 전에 균열이 닫힌 거야.”

“피 냄새가 엄청나요…….”

쿠오오오오!

절반 남은 몸으로 몸부림을 치는 레비아탄의 머리 근처 허공에 빛나는 마법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곧이어 그 마법진에서 거대한 얼음 화살들이 쏘아져 나와 레비아탄의 외피를 때렸다.

어마어마한 마나의 파동이 뒤늦게 느껴졌다. 나는 몸을 떨며 생각했다.

‘엘리야……!’

레비아탄이 허공에서 8자를 그리듯 몸을 뒤틀며 포효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카미엘이 속삭였다.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거야. 꽉 잡아.”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잡은 팔에 힘을 꾹 주었다. 카미엘의 몸이 튕기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손에 든 그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허공으로 솟구친 카미엘의 오러 블레이드가 레비아탄의 왼쪽 눈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후두둑 튀는 피가 온몸을 덮쳐 올 것만 같아,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피가 비산하는 것보다 카미엘이 쇄도하는 레비아탄의 앞발을 발판으로 이용해 몸을 피하는 게 좀 더 빨랐다.

쿵!

마침내 카미엘의 발이 땅을 디뎠다. 그가 땅이 울릴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레비아탄을 올려다보며, 나를 내려 주었다.

“공녀는 여기 잠깐 있어.”

“괘, 괜찮으시겠어요?”

허공에서 어마어마한 파동을 일으키는 괴물을 질린 듯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카미엘이 이것 봐라? 하며 웃었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그게…….”

“농담이라면 제법 웃겼어.”

그렇게 말하며, 카미엘이 여유롭게 검을 고쳐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르릉, 콰광!

버러지 같은 인간들……!

벼락과 함께 천둥이 울렸다. 먹구름이 어디선가 쏜살같이 몰려와 다시 한번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바로 그때였다.

“로엔 대공!”

엘리야가 외쳤다.

그답지 않은 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엘리야 경!”

엘리야의 왼팔 옷자락이 길게 찢어진 채 피에 젖어 나부끼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내 부름은커녕 자신의 부상에도 신경 쓸 틈이 없어 보였다.

“마침 잘 왔습니다. 레비아탄이 재생하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시간을 벌어 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좋아. 소공작?”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몸부림치던 레비아탄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거대한 앞발이 다시 한번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카미엘의 검에서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캬아아악!

카미엘의 검이 재주 좋게 레비아탄의 발바닥을 베고 지나갔다. 레비아탄은 카미엘을 놓치지 않으려 다른 쪽 앞발로 그를 짓누르려고 했지만 칼릭스가 검을 휘둘러 진로를 방해했다.

짜증이 극에 달했는지, 레비아탄이 크르르릉, 하고 먹구름 낀 하늘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때, 엘리야가 외쳤다.

“둘 다 비켜요!”

거센 마류가 휘몰아쳤다. 허공에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수십 개는 돼 보였다.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에서 벼락이 쏟아졌다.

키에에에엑!

흰 벼락에 휩싸인 레비아탄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끄어어어…….

마법진이 사라지고 벼락이 그치자, 거의 새까맣게 타 버린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야가 외쳤다.

“지금입니다!”

“알고 있어.”

어느새 카미엘이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린 채 도움닫기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너, 너는……!

“입 닥쳐.”

레비아탄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외쳤지만, 도약한 카미엘이 타 버린 레비아탄의 정수리에 오러 블레이드를 꽂아 넣는 게 더 빨랐다.

컥, 커흑……!

머리부터 경추까지 일격에 관통당한 레비아탄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쿵! 쿠궁!

이윽고 레비아탄의 거대한 몸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누님!”

칼릭스가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다. 철벅거리며 진흙이 튀었지만, 나는 칼릭스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고, 고마워.”

숨이 끊어지고도 레비아탄의 몸뚱이는 몇 번인가를 꿈틀거렸다. 천천히 비가 그치자, 나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엘리야!’

재빨리 뒤쪽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엘리야가 왼팔을 붙잡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 * *

“경!”

분명히 들었다.

그건 자신을 부르는 유리의 목소리였다.

‘쯧.’

엘리야는 혀를 찼다. 하필이면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게 되다니.

레비아탄의 발톱에 좌반신을 내준 건 현격한 실력의 격차라기보다 순전히 단순한 방심의 결과였다. 교활한 마물은 엘리야가 칼릭스와 손발이 안 맞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팔이 잘리거나 옆구리가 더 베여 장기를 쏟아 낼 뻔했다.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유리와 카미엘이 나타난 거였다.

‘젠장.’

개의치 않으려고 해도 욕설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일 건 또 뭐란 말인가?

스승으로서 온갖 위엄 있는 체는 다 했는데,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게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그런데…….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눈이 아픈 것 같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정신없이 유리가 엘리야에게로 다가왔다.

푸른 두 눈에는 엘리야를 향한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상처가…….”

창백하게 얼어붙은 두 눈에 비친 제 꼴을 보고 엘리야는 속으로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는 평소에 자기 몸치장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본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지금 자신의 꼴은 가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시커멓게 튄 마물의 피가 풍기는 냄새, 형편없이 찢어져 덜렁거리는 옷소매와 왼팔, 그리고 옆구리에서 배어 나오는 피까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유리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팔만 다친 게 아니라 옆구리도 찢어졌어요.”

“이 정도는……”

“잠깐 여기 앉아 보세요, 경.”

이상했다.

분명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뒷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유리가 그의 팔을 이끌어 그나마 깨끗한 바위에 앉히는 동안, 엘리야는 마치 뻣뻣한 허수아비처럼 삐그덕거렸다. 유리는 그게 엘리야가 너무 아파서 그런 거라고 오해한 듯, 한층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지?’

엘리야는 등허리에서 다칠 때도 나지 않았던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상처를 좀 정화할게요.”

유리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근심으로 가득한 말투가 심장을 녹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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