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82)

107화

반짝이는 결계를 뚫지 못한 레비아탄의 검은 비가 궤적을 그리며 무력하게 흘러내렸다.

대공이 결계를 뒤집어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그게…… 일단은 결계, 라는 건데요.”

결계 유지를 위해 초당 0.5정화력이 소모됩니다.

0.5정화력이라…… 나는 속으로 얼른 계산을 해 보았다. 얼추 한 시간 이상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小’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결계가 작다는 점이었다.

얼추 둘러보니 장우산을 높게 펼쳤을 때 보호하는 범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기만 하는 대공에게 말했다.

“어…… 전하, 이쪽으로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약간 머쓱하게 말했다. 결계라기엔 너무 비좁아서 초대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나더러 공녀 곁에 가라고?”

“네, 그렇긴 한데요…….”

대공은 아무래도 이 작은 결계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그, 보기엔 좀 그래도 비는 확실히 막아 주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대공이 헛웃음을 토했다. 나는 그럼 뭐가 문제인가 싶어 눈을 껌뻑였다.

“뭐, 공녀가 스스로 초대한 거니 괜찮으려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나중에 내 탓은 하지 마.”

“네?”

어쩐지 불길한 충고에 잠깐만요, 하고 저지하려는 순간, 대공이 불쑥 거리를 좁혀 왔다.

“!”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에서야, 나는 아차 하고 내 실수를 깨달았다.

“그, 전하…….”

이 작은 결계를 함께 이용하려면 서로 간에 밀착이 필수였고…….

‘그리고 이 사람은…….’

내 정화력에 특유의 이상 반응을 보이는 남자였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한 뼘 거리 안에 다가온 대공이 속삭였다.

“카미엘이라고 불러 줘.”

설상가상으로 대공의 말끝이 벌써부터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전하……?”

작게 항변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공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여유를 잃은 듯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크게 호흡한 그에게서 신음 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군…….”

“저, 전하, 진정하시고.”

“진정하고 있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살짝 거리를 좀 벌려 볼까, 하고 생각한 순간.

대공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노력하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마. 그편이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아, 네엡.”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나는 슬쩍 눈치를 보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이 열에 들뜬 것처럼 약간 붉어진 뺨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윽.’

……어쩐지 마주치기가 대단히 난감한……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그의 어깨 너머로 눈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비, 비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데요.”

“알아.”

“그…… 지금이라도 빨리 이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공녀.”

대공이 나를 불렀다. 어느새 아까 전보다 느슨하게 풀린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희번덕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미안한데 나,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 것 같아.”

“네에?”

깜짝 놀란 순간, 대공의 팔이 내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더니…….

“자, 잠깐만요, 전하!”

그가 나를 간단한 짐짝처럼 들어 올려 어깨 위로 둘러메듯이 안았다.

“무, 무슨!”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꺄악!”

시스템 메시지에 반응할 새도 없이, 나는 비명을 질렀다. 대공이 나를 둘러멘 채로 옆의 굵다란 나무 위를 오르기 시작해서였다.

“떠, 떨어져요!”

“안 그래.”

장담한 대로 대공은 나를 둘러멘 채로도 간단하게 나무 위에 올라, 굵은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대, 대체 이게 뭐 하는 짓……”

“으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대답과 함께, 대공이 나를 휘릭 자기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윽.’

온몸이 고스란히 밀착했다. 대공의 체온은 평균보다 좀 높은 편인 듯, 젖은 옷의 한기를 뚫고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 어쩌지?’

팔이 허리를 억죄고, 뜨끈하고 단단한 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나를 압박하며 끌어안는 느낌이 선명했다.

만족할 만큼 나를 끌어안은 건지, 대공은 느른한 숨을 내 어깨 위에 쏟아 놓았다.

나야 뭐, 어쩔 도리 없이 그의 너른 어깨 위에 얼굴을 올려놓은 채로, 또록또록 눈만 굴릴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내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곳에 마치 애교라도 부리듯 얼굴을 부비자, 어쩐지 입이 마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 마치…….’

그의 행동은 고양잇과 맹수가 먹이를 사냥한 후에 마음껏 즐기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냥감이라 이 말이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가 얼굴을 묻고 있는 목 줄기를 물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 안 되겠어.’

나는 먹이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조금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팔을 빼서 대공의 어깨를 밀었다.

“전하. 전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안고 있는 것까진 양보하겠는데, 이건 좀 아니에요. 네?”

“……엘.”

“?”

“……왜 카미엘이라고 불러 주지 않는 거지?”

마침내 고개를 든 대공의 눈동자가 원망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러니까요……. 왜 그럴까요?”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대공의 눈초리가 가늘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까는 왜 마탑주와 같이 나타난 거야?”

“네?”

“휴가를 온 거잖아. 가족들하고 왔을 거 아냐?”

“그…… 그렇죠?”

“그런데 왜 번견이 아니라 마탑주와 함께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이걸 설명을 해야 하나? 설명을 하면 알아듣기는 하나?

그때, 대공이 대답을 재촉하듯 내 허리를 꽉 죄었다.

“아, 알았어요. 대답할게요!”

나는 찰싹찰싹 그의 두터운 팔을 내려치면서 말했다. 그러자 팔에서 힘이 약간 빠졌다.

“휴가를 온 건 맞는데, 놀러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래서?”

“그래서…… 같이 좀 다녔어요.”

“어디를?”

“하이 마켓을…… 아니, 잠깐만. 왜 이런 걸 일일이 물어보시는 거예요?”

대답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나는 쿡 찌르듯 물었다.

“혹시 질투하세요?”

그런 거 아니거든, 이라는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었다.

“질투?”

아니나 다를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는데.”

“질투하는 거 아니면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마세요.”

“어떤 걸 질투라고 하는 건가?”

대공이 돌연 이렇게 물었다.

“네?”

“공녀가 마탑주와 함께 등장했을 때 성질이 나긴 했는데.”

대공이 느른한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잠깐 마탑주를 찢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자, 자자자잠깐, 뭐라고요?”

“……하긴 했는데. 이런 감정을 질투라고 부르나?”

빤히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기이한 황금빛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질투 맞는 것 같은데.’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공은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런 감정이라면…… 질투가 맞는 것 같기도 해.”

묘하게 열띤 눈동자를 한 그가 나를 다시금 거세게 끌어안았다. 몸을 옹송그리듯이 하고 전력으로 나를 끌어안은 남자가 귓가에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를 안고 있으면 따뜻하고 포근해서 잠이 와…….”

“지금 잠들면 안 돼요!”

“안 자, 안 자.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

“그런 것치고는 말끝이 지나치게 늘어지고 있는데요!”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너른 등짝을 퍽퍽 두드렸지만, 대공은 외려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간지러워.”

온 힘을 다해 때리고 있는 입장에서는 환장할 말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이럴 거면 차라리 정화를 해 볼까?

‘뭘 하든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질 건 없잖아.’

정화를 하고 나면 대공은 당분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곤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나를 집으로 데려간 적도 있고 말이지.’

이대로 있는 것보단 뭐든 해 보는 게 낫겠지.

나는 정화를 할 요량으로 대공의 등을 때리던 손을 펴고 그 어깻죽지를 덮었다.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당연히 선택은 ‘Yes’였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2436

팀 버프를 받아서 정화력이 꽤 넉넉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기절하면 안 돼.’

딱, 결계 30분어치 정도만 투자하자!

1542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컨트롤이 미숙해서 생각보다 좀 더 많은 정화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내게서 피어오른 금빛 기운이 카미엘에게서 꾸물거리는 어두운 기운 속으로 천천히 흡수되었다.

1542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성공했다!

“윽.”

그와 동시에 카미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나를 안은 팔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전하? 전하?”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등을 팡팡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좀 드세요? 네?”

“내가…….”

대공이 내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카미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앗, 넵. 그랬죠. 카미엘.”

나는 줏대가 없다.

즉각 대답하는 나를 보며 카미엘이 조금 웃었다.

“반응 한번 빠르기도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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