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맨 처음에 눈에 들어온 건 마탑 소속임을 나타내는 문장과 무늬를 정교하게 수놓은 로브 자락.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빛 머리카락에, 싸늘하게 상인을 바라보고 있는 로제 와인빛 눈동자가 보였다.
“엘리야 경……?”
엘리야 마라케시였다.
“마, 마탑 소속의 엘리야라면…….”
상인이 말을 더듬으며 창백해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마, 마탑주님?”
엘리야는 긍정하는 대신 얕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부르셨습니까, 마탑주 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 둘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나왔다.
엘리야가 지시했다.
“하이 마켓 사무소에 이놈을 끌고 가서 가품을 팔려고 시도한 간 큰 놈이라고 알려 줘라.”
상인이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마, 마탑주님! 이건 그러니까, 저도 잘 모르고……!”
하지만 엘리야는 귓등으로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가품을 팔려고 시도한 상대가 마탑주의 제자이자 로잔헤이어의 공녀라는 걸 분명히 알려 두도록.”
“마, 마탑주의 제자?”
상인이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마법사들도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눈동자에 동정이 스쳐 지나간 것 같다고 느낀다면, 내 눈의 착각인 걸까?
“안 움직이나?”
“아, 네, 넵!”
두 마법사가 화들짝 대답하고 잽싸게 움직였다. 그들 중 하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밧줄이 나타나 상인을 포박했다.
“으, 으악……!”
상인이 비명을 지르자 엘리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곧 상인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처지가 되었다.
“처리를 확실히 했어야지.”
“면목이 없습니다.”
“쯧. 데려가라.”
“예!”
마법사들이 묵언 마법과 포박 마법에 사로잡힌 상인을 데리고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중얼거렸다.
“……사기일 거라고 생각은 못 했어요.”
“아무리 하이 마켓이 관리가 잘되는 편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놈들이 꼭 한둘씩 있게 마련입니다.”
엘리야가 툴툴거리는 것처럼 못마땅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아니 잠깐만.”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서 깨달음이 늦었다.
“경이 여길 대체 왜 와 계신 거예요?”
“그거야말로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엘리야가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수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긴 왜 와 있는 거죠?”
“그야…… 예년보다 좀 빠르게 코랄 베케이션을 온 거죠.”
그 말을 들은 엘리야가 또 혀를 찼다.
“어쩐지 귀찮은 인간들이 많이 보인다 싶더라니…….”
“거참 죄송하게 됐네요.”
“이것 봐라?”
엘리야가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불손한 태도는 대체 뭐죠? 내가 당신을 귀찮다고 한 것도 아닌데.”
“아니셨어요? 저는 또 꼭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내가 작게 어깨를 으쓱하자, 엘리야가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착각을 하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네?”
“대체 내가 내준 숙제는 어떻게 하고 여기 와 있는 겁니까?”
“앗.”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엘리야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분명히 건국제가 끝나면 밀린 수련을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 같은데 말이죠.”
“그, 그게요…….”
“대체 어느 입이 그런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했을까?”
“하,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엘리야가 내 말끝을 따라 하며 웃었다. 긍정적인 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인정하는 길을 택했다.
“잘못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이렇게 놀러 나와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제가 두 번 잘못했습니다.”
“놀러 나와서 사기꾼 같은 장사치한테 걸려 엉뚱한 물건이나 살 뻔하고!”
“그, 그건 제 책임이 아닌데요!”
“당신이 열심히 진도를 나갔으면 제가 저 같잖은 물건을 구별하는 법을 알려 줄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대체 그게 얼마나 진도를 나가야 가능한…… 아, 아니에요.”
말하다 보니 열이 받았는지, 엘리야의 눈초리가 매서워져 있었다. 나는 찔끔 입을 닥쳤다.
“수련이 부족하니까 당신 같은 어린 마법사를 등쳐 먹으려는 개자식에게나 걸리는 거 아닙니까!”
기적의 논리였다. 조금만 있으면 하늘이 파란 것도 내 탓이 될 것만 같았다.
“제, 제자가 스승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는 엘리야가 조금만 성을 내면 알아서 납작 길 준비를 하고 반론을 펼쳤다.
“예, 당연합니다.”
한데 엘리야가 냉큼 내 말을 받아 주는 게 아닌가?
“경?”
“제자가 스승 없이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건 다 스승의 탓이죠.”
“경, 이를 악무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렇게 만난 김에 우리, 특별 훈련이나 좀 해야겠습니다.”
“예에?”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없어서 멍청해지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최소한의 자기 보신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저를 걱정하시는 건지 무시하시는 건지 한 가지만 하시면 안 될까요……?”
“신성력까지 발현해서 더 희귀하고 값어치 있어진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기 보호 능력이 없다는 건, 오밤중에 문을 열어 놓고 자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항변해 봤지만 엘리야는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금의 당신을 구제할 길은 특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가시죠.”
“앗.”
그것만큼은 싫었다.
왜냐면 엘리야 마라케시가 말하는 특훈이라 함은, 내 마나가 바닥나고 내 체력도 바닥날 때까지 나를 쥐어짜서 반드시 성과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었다.
‘걸리면 최소한 3일은 꼼짝 못 하고 누워서 지내야 할지도 몰라.’
마법 관련 능력치를 올려야 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도움의 손길이 없나 싶어 주변을 얼른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이 근방에 얼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정말 끌려간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현, 현장 학습!”
“하?”
“오늘은 현장 학습으로 하면 안 될까요, 스승님?”
“대체 그게 웬 미친 소리……”
“경은 제가 멍청하게 속을 뻔한 게 마음에 안 드신 거잖아요. 그렇죠?”
엘리야가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주제를 잘 안다고 칭찬해야 할지, 수치도 모른다고 나무라야 할지…….”
“아무튼! 그러니까 오늘은 현장 학습을 하는 거예요. 여기를 돌아다니면서 제가 다시는 속지 않을 수 있도록 생생한 교육을 해 주시면 되잖아요?”
‘협상의 달인’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엘리야 마라케시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원래는 혼자 놀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생생한 현장 체험! 눈앞에 교재가 널려 있는 이 환경! 이용할 만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닌 것도 같은데…… 왜 이렇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죠?”
엘리야가 탐탁잖은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장화 신은 고양이를 생각하며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윽…….”
“스승님…….”
나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엘리야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 알았으니까 이 팔 당장 놓아요!”
“정말요?”
성공했다!
나는 기분 좋게 엘리야를 놓아주었다. 엘리야가 붙잡혔던 제 팔을 문지르며 “도대체…….” 하고 억울한 듯 중얼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약속하신 거예요. 무르기 없기고요.”
엘리야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안 무릅니다, 안 물러.”
“믿을게요, 스승님…….”
“그러니까 그 스승님 소리 좀 그만하시죠.”
“네, 엘리야 경.”
“…….”
말을 잘 들었는데도 엘리야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왜 그렇게 저를 보시는 거죠?”
낙장불입 모르시나?
일이 이렇게 결정된 이상 나는 절대 물러 줄 마음이 없었다. 오늘 나는 시장을 구경하고, 전망이 끝내준다는 맛집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고 말 것이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올려다보는데, 엘리야가 갑자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렇게 ……은 겁니까?”
“네?”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거의 안 들렸다.
“뭐라고 하시는지 안 들렸어요.”
엘리야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이 말을 꼭 해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나와 하는 수련이 하기 싫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예?”
자기가 한 질문이 민망했는지 엘리야가 내 눈을 슬쩍 피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특훈이 싫은 거냐고 물으면 그게 맞긴 한데.’
솔직하게 대답했다간 이 까칠한 남자가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 것 같은 이 분위기 뭐지?
“……에이, 제가 언제 수련이 싫다고 했나요?”
“이게 싫은 게 아니면 대체 뭡니까?”
엘리야는 본격적으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삐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아니라니깐요! 제가 경하고 하는 수련이 그렇게 싫었으면 오늘 이렇게 같이 놀자고도 안 했겠죠.”
“분명히 현장 학습이라고 했는데.”
“앗, 실수.”
내가 입을 막으며 민망한 척 웃자, 엘리야의 입술에서도 픽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샜다.
“뭐, 좋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영 거짓말 같긴 하지만, 그 말도 이 말도 한번 믿어 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