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82)

102화

“네?”

난데없는 질문에 세실리아 황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칼릭스.”

나는 칼릭스가 무어라고 덧붙이기 전에 재빨리 제지에 나섰다.

다행히 세실리아 황녀는 눈치가 없는 편인지, 다시금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뭐라고 하셨는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유리 공녀님에 대해서는 칭찬만 많이 하셨어요.”

칼릭스의 표정이 더 딱딱해졌다.

“그렇습니까.”

“황녀 전하.”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저희 코랄 제도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네, 그렇게 해요.”

순한 세실리아 황녀가 좋다고 내 말에 따라 주면서, 상황은 다행히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번 휴가 기간 동안에는 우리 셋이 황실의 별장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 로잔헤이어의 별장에서 세실리아 황녀가 머물기로 결정되었다.

코랄 제도는 수도보다 부지가 좁은 곳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의 별장은 한곳에 밀집되어 있는 편이었다.

반면에 황실의 별장은 민가에서 약간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적하게 지내기에는 좋지만, 그만큼 보안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세실리아 황녀가 우리 로잔헤이어의 별장에 초대되었다.

“저, 다른 사람의 별장에 놀러 가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어쨌든 황녀는 그 사실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 없이 편하게 지내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엘레니가 세실리아 황녀의 손을 감싸 쥐며 상냥하게 말했다.

“제가 물심양면으로 도울게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세실리아 황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지켜보면 볼수록, 뭐라고 해야 할까?’

호흡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혹시나 피곤하시면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주무셔도 돼요.”

지금 우리는 이동진이 새겨져 있는 장소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로잔헤이어의 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사이에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세실리아 황녀가 내 말에 살짝 놀란 듯하면서도 겸연쩍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제가 원래는 이렇게까지 몸이 안 좋진 않은데…….”

황녀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엘레니가 갑자기 불쑥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뚜렷한 병이 있는 건 아니에요.”

언뜻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세실리아 황녀는 트집을 잡는 대신 선선히 대답을 해 주었다.

“그저 선천적으로 체력이 부족할 뿐이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세실리아 황녀는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미안한 듯 배시시 웃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유리 공녀. 괜찮다고 하셨으니 잠깐만 쉴게요…….”

그렇게 말하고 세실리아 황녀는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만 쉰다고 했던 세실리아 황녀는 별장에 도착해서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행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짧은 여정이었는데, 그마저도 연약한 황녀의 몸에는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무도회며 건국제 때도 참석해서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세실리아 황녀가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방으로 돌아가면서 세실리아 황녀는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나이 지긋한 유모가 하루 푹 쉬고 나면 즐겁게 노실 수 있을 거라고 달래자 납득하며 얌전히 방으로 돌아갔다.

“어휴, 우리 황녀님.”

유모가 흘긋 우리 눈치를 살피며 들으란 듯 말했다.

“어릴 때는 참 건강하셨는데. 그래도 어디 아프신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아마 우리가 세실리아 황녀의 건강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낼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세실리아 황녀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엘레니도 잽싸게 실례한다며 제 방으로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되자, 칼릭스가 물었다.

“누님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어떻게 할까?”

비록 코랄 제도에 실제로 와 본 건 처음이었지만, 게임 속에서 소개한 모습을 통해 대충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가 볼 만한 곳은…… 해변, 극장, 시장 정도인가?’

특히 코랄 제도는 제국의 무역 거점이기도 해서, 시장에서 여러 가지 진귀하고 희귀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고 했다.

구경하는 재미 정도는 있을지도 몰랐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되물었다.

“칼릭스, 너는?”

“저는…….”

칼릭스는 마뜩잖은 눈빛으로 부려지고 있는 제 짐들을 바라보았다.

“……수도에서 가져온 일거리가 있어 일단 그걸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생이네…….”

이럴 때면 생각한다. 목숨 걸고 배드 엔딩을 공략하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후계자가 되는 것보다는 내 처지가 나은 것 같다고.

칼릭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아하니 누님께서는 외출을 하실 요량인 듯하군요.”

“어쨌거나 휴가 아니니?”

비록 기분 좋게 가뿐히 떠나온 길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한숨을 쉬는 걸로 보아하니 기다렸다 저랑 같이 나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칼릭스는 시계를 보고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휴가를 오셨으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이해합니다.”

“어, 정말?”

내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칼릭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못을 박았다.

“다만, 늦지 않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잔소리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라고 생각한 대로 내뱉어서 겨우 얻은 자유의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일단 순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가면 몇 시에 들어오든지 그건 내 마음이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칼릭스가 어쩐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번 축제에서처럼 호위 기사들과 떨어지는 사태는 있어선 안 됩니다.”

“응, 응.”

“부디 조심하셔서 다녀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응, 그럴게.”

하나하나 순순하게 대답해 줬는데도 칼릭스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쉬며 나를 보내 주었다.

물론, 호위 기사들에게 나를 놓치면 경을 칠 거라고 몇 번이나 단단히 당부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자유였다.

* * *

호위 기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내가 목적지로 선택한 곳은 시장이었다.

제국의 해상 무역 거점답게 코랄 제도의 시장은 무척 번성하고 있었다.

‘특징이라면 하이 마켓과 로우 마켓, 두 곳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점인데.’

두 시장을 가르는 기준은 단 한 가지, 가격이었다.

당연히 로우 마켓은 치안이 조금 불안정했고, 하이 마켓은 그에 비해 보다 보안이 철저하고, 다니기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다.

‘시장 구경을 하다가, 게임에서도 나왔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기로 할까?’

하이 마켓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다음 사업 아이템이 될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세운 단출한 계획과 함께, 나는 하이 마켓 입구에서 마차를 세우고 내렸다.

하이 마켓은 입구에서부터 따로 경비를 세워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었지만,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를 타고 온 나는 따로 신분 증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두 명의 호위 기사를 거느린 채, 나는 막 시장으로 진입했다.

입구에서 시장 소속으로 보이는 안내원이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지도입니다.”

호위 기사가 내 대신 지도를 받았다. 그는 그 종이쪽이 안전한지 철저히 살펴본 후에야 내게 지도를 내밀었다.

‘칼릭스…….’

나는 마음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호위가 내미는 지도를 받아 들었다.

지도를 펼쳐 보니 하이 마켓의 구역은 종목별로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내가 있는 곳은 마침 마법과 관련한 온갖 물건을 파는 구역이었다.

‘마법이라.’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도를 들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붐비는 편이긴 했지만, 투와르 축제 때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각기 호객 행위를 하고 흥정을 하느라 내가 지나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은연중에 자리를 비켜 주고 있기는 한데…… 뭐, 이 정도야.’

편하니까 상관없는 걸로 하자. 일부러 잠행을 나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마법이라는 말에 혹하기는 했지만, 물건을 볼 정도의 지식은 없어서 나는 여기저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리고, 호객 행위에 귀를 기울이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던 중에, 한 매대 위의 물건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라?”

방부 처리를 해서 긴 병에 담아 놓은 거대한 눈동자였다.

노란색 눈동자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생생한 그 눈동자는, 내겐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손님, 물건을 보십니까요?”

눈치 좋은 상인이 손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눈동자인가?”

“아이고,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예, 이건 코모도 울프라고 하는 마물의 눈동자입니다요.”

코모도 울프라면 내가 사냥제 때 마주쳤던 마물의 이름이었다. 대공이 내게 머리를 잘라서 선물한 첫 번째 마물 말이다.

그 머리를 선물로 받은 엘리야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코모도 울프의 눈동자는 특히 마나 감응력을 높이는 시약의 촉매제로 효능이 좋은 편입니다.”

좋은 물건을 얻어 왔다며 미소를 짓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왕 발견한 김에 이것도 사다 주도록 할까?’

“얼마인가?”

“원래는 로뎀 금화로 다섯 닢은 주셔야 하는데, 손님께서 가져가시겠다면 특별히 네 닢에 드리도록 하지요.”

“……괜찮은 가격이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상인과 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단, 그게 정말 코모도 울프의 눈동자일 경우에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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