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15. 터닝 포인트
건국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 계절은 완전히 무르익어, 여름의 초입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날씨가 되었다.
‘이제 앞으로 두 주 정도만 지나면 되려나?’
세 번째 우정 이벤트가 벌어질 때까지 시간을 얼추 계산해 보니, 대략 그 정도 남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좀 마음 편히 쉬어도 되겠지?’
적극적으로 내가 하던 일을 방해하던 새어머니도 조용해졌겠다, 나는 당분간 의상실과 이시스 상단과의 협업 건에만 신경을 쓰며 시간을 보내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수도 교외 리로 지역에서 재앙급 마물이 나타났다.”
“네?”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 귀가하신 아버지의 말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침에 나갈 땐 분명 멀쩡했던 옷에 거무스름한 액체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재앙급 마물이라면……?”
“일전에 솔레아 호수에서 출몰한 마물과 같은 급의 마물이다.”
“아.”
“출현한 것만으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거나, 지형지물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날 경우 ‘재앙급 마물’이라고 칭합니다.”
칼릭스가 뚱한 얼굴로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설마 마탑주께서는 이 기본적인 사실도 누님께 가르쳐 드리지 않은 겁니까?”
“배워야 할 다른 시급한 것들이 많아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내 마법 실력을 향상시켜 회로가 엉킨 걸 푸는 게 최우선이지, 내가 대(對)마물 전투 마법사로 성장하는 게 목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칼릭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쳇 소리를 냈지만, 비난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은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버지께서 무사히 집에 돌아오신 걸 보면, 마물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신 거죠?”
“그래.”
칼릭스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도 함께 갔으면 아버지를 도와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후방의 지원을 요청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와 에스테반 후작, 그리고 노이먼 변경백이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제국의 대표적인 오러 마스터가 셋이나 모여 있었다니, 빠른 시간 내에 무사히 진압이 끝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별일 없이 잘 끝난 건가요?”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균열이 열린 곳이 민가 쪽이었던 탓에 1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적지 않은 수지.”
“그런…….”
하긴, 그 수룡급 마물이 오러 마스터 셋이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줬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교외 지역이라서 그 정도로 끝났군요. 만약 수도 한복판에서 균열이 열렸다면…….”
“인명으로는 최소한 1000명 이상, 재산 피해도 극심했을 거다.”
“아버지, 저는 어쩐지 석연치가 않습니다.”
칼릭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용제를 봉인한 격전지인 이 땅은 본디 마물들이 꺼리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마물의 왕인 용제를 봉인한 수도 지역은 본래 마물들이 출현을 꺼리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수도 주변에서 균열이 벌어지는 사고가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으니…… 다들 불안해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 의혹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버지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들조차도 아직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니…… 일단은 지켜봐야 할 성싶구나.”
아버지는 일단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줄 만한 언행을 삼가도록 당부하셨다.
“수도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지는 일을 방지하려면, 우리부터가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네. 알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다음 날.
“급보입니다, 공작 각하.”
아침 식사 시간에 보좌관이 들어와 아버지께 무언가를 고하자, 아버지가 미간을 끙 찌푸리셨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엘레니가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간밤의 일이 퍼져 고위 귀족들을 중심으로 수도를 떠나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하는구나.”
예상했던 불상사의 발생이었다.
엘레니가 어머나, 하며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금족령을 명하실 순 없나요?”
순진하게까지 들리는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폭탄의 격발 장치를 누르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지금도 불안해하며 수도를 떠나는 귀족들의 발길을 붙잡았다간, 사람들이 아예 공황 상태에 빠져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흠. 나는 조용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코랄 베케이션이 가까워서, ‘한두 주 먼저 휴가를 떠나는 것뿐’이라는 변명이 통하기는 하겠네요.”
“지금 그들이 정확히 그런 핑계를 대고 있다고 하더구나.”
코랄 베케이션.
제국 사교계에는 여름이 가까워질 때, 남부의 산호섬 제도로 여행을 떠나곤 하는 관습이 있었다.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맞춰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제국 사교계 전체가 남부 제도로 옮겨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시기를 일컬어 ‘코랄 베케이션’이라고 부른다.
상황을 판단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지력이 10, 정신력이 10 오릅니다.
칼릭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알음알음 소식을 접한 고위 귀족들만 이동하고 있겠지만, 고위 귀족이 여행을 떠나면 나머지 사람들도 수도에 남아 있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뭐가 됐든 우리는 예정대로 수도를 지켜야 한다.”
아버지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다.
“휴가는 예정대로 다다음 주 초에 떠난다. 모두들 그리 알고 있도록 해라.”
“네.”
“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이러한 다짐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황명이오, 로잔헤이어 공작!”
그날 저녁, 황제가 보낸 사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황명의 내용인즉 다음과 같았다.
“세실리아 황녀 전하께서 코랄 베케이션을 떠나신다고요?”
“음.”
아버지가 편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런 비상시국에 황제가 제 혈육부터 빼돌리려고 하는 게 불편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세실리아 황녀 전하의 휴가에 유리, 그리고 엘레니, 너희 둘이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고, 황녀 전하 혼자만 보내기에는 걱정이 된다고 하시는구나.”
아하, 그래서…….
“……아무래도 저희가 가면 아마 칼릭스도 함께 동행할 걸 아시고 제안하신 거겠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상황을 판단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지력이 10, 정신력이 10 오릅니다.
연거푸 훌륭한 판단력을 보여줌으로써 칭호, ‘꿰뚫어 보는 눈’을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30, 정신력 +30.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저희가 수도를 떠나면……”
“황제 폐하께서 세실리아 황녀 전하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아요.”
엘레니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얼마나 그분을 지키고 싶으시면 이런 부탁을 하시겠어요? 아버지, 저는 저희가 제국의 귀족으로서 황명을 따르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황제 폐하의 결정에는 가타부타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해맑게 말하는 엘레니에게 짧게 주의를 준 후, 나와 칼릭스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그 눈빛에서 아버지의 뜻을 읽어 낸 칼릭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저희가 황녀 전하를 모시고 떠나는 게 맞을 듯하군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레니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짧게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나를 스쳤다.
나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도 따를게요.”
아버지께서 한숨을 내쉬셨다.
“너희들 모두, 오늘 내로 코랄 제도로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라.”
결정이었다.
* * *
다음 날.
우리는 하루 만에 코랄 제도로 떠나 약 2∼3주간의 휴가를 보낼 행장을 꾸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마자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코랄 제도까지는 황궁에서 편도로 이용 가능한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황궁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된 장소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자, 세실리아 황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세실리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 일어나세요.”
세실리아 황녀가 어쩔 줄 모르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려고 쩔쩔맸다.
엘레니가 제일 먼저 세실리아 황녀의 손을 잡으며 일어나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황녀 전하. 저는 로잔헤이어의 엘레니라 합니다.”
“아, 당신이 엘레니…….”
세실리아 황녀는 약간 실망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와 달리 왠지 활기 넘치는 눈빛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럼 당신이 유리 엘로즈 공녀겠군요?”
“네, 전하. 제가 유리 엘로즈가 맞습니다.”
“어쩜.”
세실리아 황녀가 엘레니의 손에서 빼낸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뭐, 뭐지?’
뭐 한 것도 없이 받는 격한 환영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오라버니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세실리아 황녀의 금빛 눈동자가 수줍게 반짝였다.
“이안 오라버니께서 유리 엘로즈 공녀는 굉장히 재치가 넘치고, 또 다정한 분이시라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아, 사실 건국제에서 소개를 받고 싶었어요! 오라버니께서 바쁘셔서 좀처럼 기회를 얻진 못했지만요…….”
“전하, 조금 숨을 천천히 쉬시는 게…….”
세실리아는 착하게도 내가 시키는 대로 후읍, 하고 숨을 들이쉰 다음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제가 좀 흥분했죠? 당황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전하께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서 제 마음이 놓였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그때, 생글생글 웃는 세실리아를 향해 칼릭스가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 누님에 대해 또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