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82)

100화

얼결에 미니 이벤트에 성공해 버렸다. 변명하는 투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과였다.

“…….”

대공은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신음하며 내게 매달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

하지만 이상하게 그 모습이 무섭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내게 애원하고 매달릴 뿐이어서 그런가?

그건, 뭐라고 해야 할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당시에는 나도 정말 놀라긴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은 내겐 그저 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붙잡는, 그런 절박한 움직임 말이다.

‘…….’

음, 일단 이 이상 생각하는 건 그만두자.

“절 여기로 데려오신 지 얼마나 되었어요?”

“얼마 안 됐어. 한 시간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면, 저랑 대공 전하께서 각자 황궁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는 변명이 통할 것도 같네요.”

“덮어 주겠다는 건가?”

“보주를 흡수한 건에 대해서는 저도 어떻게 해 드릴 순 없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원칙적으로 말해 완전히 내 소유도 아닌 물건이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시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절 여기 데려오신 건…… 피차간에 별일도 없었는데 알려지면 큰 소란이 날 테니까 덮고 가는 게 저한테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럴 뿐이에요.”

“……그래. 그렇겠군.”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꼭 집어 두자, 대공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내가 개인적으로 보상하도록 하지.”

“아, 그러신다면야 사양하지 않을게요.”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참고로 전 물질적인 보상을 참 좋아해요.”

대공이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확실하게 참고해 두도록 하지.”

* * *

우리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황궁 근처로 이동, 재빨리 황궁 안으로 잠입했다.

기척도 없이 날 데리고 나간 대공은 나갔던 것처럼 들어오는 것도 쉽게 해냈다. 어찌나 쉽사리 잠입을 해내던지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황궁 경비, 이걸로 괜찮은 건가?’

뭐, 내가 사는 집도 아니니 깊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는 각자 황궁을 헤매다가 발견된 척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성공해 냈고,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회장을 뛰쳐나갔던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서 설명이 됐다.

대공은 보주를 흡수한 충격 때문에, 나는 보주를 빼앗긴 데 너무 놀라서.

물론, 대공이 보주를 흡수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관련자들을 제외한 나머지에겐 극비에 부쳤다.

건국제 기념 연회가 시작되기 전, 황제는 발코니에 있었던 관련자들을 불러 단단히 입단속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 칼릭스 세 사람과 대공을 따로 불러 이 일에 대해서 논의했다.

누가 먼저 뭐랄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보주가 로엔 대공에게 흡수된 건 정말로 우연한 사고인 모양이로구나.”

“…….”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미문의 일이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네만, 일단 일차적으로 이 모든 일의 책임은 짐에게 있는 것 같군.”

그랬다. 애초에 할 필요도 없는 시연을 내게 명령한 건 황제였다. 그 시연 자리에서 사고가 일어났으니, 일차적인 책임은 황제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사실을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은 몰랐지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황제는 침중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번 건은 짐이 힘닿는 대로 책임지고 보상하도록 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황제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보상하겠다고 하니 우리 측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모든 합의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그리고 합의가 끝나자마자 조속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누님? 뭘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어, 응?”

대공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칼릭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칼릭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혹시 피곤하시면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보주에 관해 모르는 사람들 — 내실에 머물러 있었던 고위 귀족들 — 에게는 내가 갑자기 발코니를 뛰쳐나오더니 연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이 날 게 분명했다.

건국제 기념 연회는 전야 무도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있었다.

연회장에 내가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사이로 가벼운 술렁거림이 번졌다.

“저기 봐요.”

“어머나, 유리 엘로즈 공녀잖아요.”

“오늘 광장에서 보주를 시연한 모습은 정말로 굉장했죠.”

“그거 아세요? 평민들 사이에서는 벌써 유리 공녀가 ‘성녀’라는 소문도 퍼지고 있대요.”

“그건 좀 과한 소문 같은데…….”

“맞아요. 그저 신성력을 발현했을 뿐이잖아요?”

“로잔헤이어 공작가에 신성 마법사의 핏줄이 흐르는 거야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쯧쯧. 아직 어린 영애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게 아닌가 몰라요.”

다 들린다, 다 들려.

칼릭스가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누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경 안 써, 걱정하지 마.”

워낙 눈에 띄어 버렸으니 말이 도는 거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돌아다니는 시종에게서 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잔을 들고 있다는 건 암묵적으로 ‘저는 지금 춤을 추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뜻을 드러내는 거였다.

연회 내내 내게 붙어 있을 작정인지, 칼릭스도 똑같이 잔을 집으려는 찰나.

“오라버니, 여기 계셨네요.”

엘레니가 등장했다.

“엘레니.”

칼릭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엘레니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엘레니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랑 춤을 춰 주시는 거, 혹시 어려우실까요?”

저, 어제 그런 일이 있어서…… 라고 말끝을 흐리는 엘레니의 말에, 칼릭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나는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칼릭스가 내 옆에 없으면 안 되는데.’

칼릭스는 오늘 하루 피곤한 질문, 혹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내 방패막이가 되어 줄 예정이었다.

아버지께선 칼릭스에게 나를 맡기고 볼일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우신 참이었고 말이다.

“저, 누님.”

칼릭스가 곤란한 얼굴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릭스. 나는 괜찮아.”

“……금방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칼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엘레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레니는 그가 마지못해 내미는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혼자가 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붙잡히기 전에 테라스 쪽으로 가서 시간이나 때울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려는데.

“……여기 있었군, 공녀.”

“!”

익숙한 목소리가 날 발견해 냈다.

흠칫 고개를 들어 보니, 오늘 참 많이 보았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

아까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던 대공이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무슨 일로 저를 다시……?”

“무도회장에서 사람을 찾는 이유야 하나뿐이지 않나?”

“네?”

대공이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와 춤을 춰 줘, 공녀.”

황당한 제안이었다.

“……다섯 살 이후로 한 번도 춤을 춰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야 그렇긴 한데.”

그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엄청난 천재라서 다섯 살 무렵에 이미 완성된 춤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나는 어제 야멸치게 엘레니를 거절한 손이 내게 내밀어져 있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이 손을 잡고 춤을 추면, 엘레니는 칼릭스의 손을 잡고 어제 있었던 당황스러운 사건을 무마한 보람도 없이 꽤 곤란한 소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내 생각이 길어지자, 대공이 말했다.

“공녀가 싫다면야……”

“싫지 않아요.”

계산을 끝낸 나는 대공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춰요, 춤.”

“…….”

춤을 신청하면서도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지, 대공이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 추실 건가요?”

“내가…….”

대공이 약간 목쉰 소리로 내게 물었다.

“……무섭지는 않나?”

“…….”

참 일찍도 물어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안 무서워요.”

“…….”

“제게 애원하셨잖아요.”

발치에 엎드리다시피 내게 갈구했던 일을 꼬집자, 대공의 입가에 조금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그랬지.”

어째서 그를 정화할 수 있는지, 어째서 정화를 하면 대공의 상태가 편안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딱 하나 분명한 건 있었다.

이 관계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나였다.

“…….”

대공은 대답 대신 약간 웃음을 머금고 나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우리는 스텝을 밟으면서 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우리에게 쏠리는 게 보였다.

그중에서 엘레니의 녹색 시선을 언뜻 본 것도 같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대공은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꽤 편안하게 나를 리드했다. 어쨌든 세드릭이나 엘리야보다는 훨씬 실력이 좋았다.

“다섯 살 때 정말로 춤의 귀재이셨던 모양이네요.”

“좀 그런 편이었지.”

비꼬는 말이었는데 능숙하게 대답하는 대공을 보며, 나는 조금 키득거리고 웃었다.

“어떻게 저한테 춤 신청을 할 생각을 다 하셨어요?”

“글쎄. 왜일까?”

“이제 애원은 안 하시네요.”

대공이 웃었다. 의미심장하게.

“내가 참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그렇게 말씀하셔도, 여기서는 안 돼요.”

여기서 그를 정화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고 무슨 소문이 나려고?

대공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돌아 버린 것 같나?”

“아, 하긴 그렇……”

“그렇다면 정답이기는 해.”

“…….”

얼어붙은 나를 대공이 키득거리면서 부드럽게 리드했다. 웃고 있었지만 조금 전 드러난 진심이 선명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저 이만 놔주세요.”

“미안하지만 안 돼, 공녀. 이미 그대가 승낙했잖아.”

대공이 즐거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늦은 충고지만, 처음부터 조심했어야지.”

“…….”

“나 같은 놈에게 한번 허락하면, 그건 절대 무를 수가 없는 거거든.”

“졸속 계약이거든요, 이거.”

“서명한 건 그대지.”

대공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손에 의지해 빙글 돌면서 나는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대공이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좋아. 착각은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둬.”

그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듯,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애원한다는 건, 이런 의미야.”

멈출 수 없는 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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