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멍하던 정신이 조금씩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대체 지금 몇 시길래 이렇게 어두운 거야……?’
나는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분명해진 시야에 가느다랗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튼?’
무심결에 침대 커튼을 잡고 확 젖혀 버렸는데, 그런 내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엥?’
여긴 대체 어디야?
당연히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내 침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낯선 침실의 풍경이 까꿍 나를 반겼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내가 또 다른 작품에 빙의를 했나?’
‘낯선 천장이다’로 시작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일어났나, 공녀?”
“흐억!”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대, 대공 전하?”
노을을 받은 것처럼 붉게 반짝이는 금발에 시큰둥한 기색을 되찾은 붉은 눈동자. 대공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내 집.”
“네에?”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
기절하기 전 보았던 형형하게 번뜩이던 눈빛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대공이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왜 제가 대공 전하 댁에 와 있는 건데요? 그것도 기절한 사이에!”
“일단 카미엘이라고 불러. 그리고 그 이유는, 정말 모르겠나?”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
벽에 기대서 있던 대공이 한 발짝,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말았다.
“그럼,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곱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네에?”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짓이라뇨, 제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내가.”
대공이 한 걸음 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니 그 눈빛에 심상찮은 열기가 일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네게 애원하게 만들었잖아.”
“……네?”
내가 뭘 어째요?
‘애원? 아.’
그제야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제발, 해 줘. 그걸…….”
“내가, 너한테 애원하잖아…….”
“참고로 나는 일곱 살 이후로 뭔가를 애원해 본 적이 없어.”
날 애원하게 만든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레퍼토리다 이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게 대공을 바라보는데, 그가 팔짱을 낀 채로 화사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 번은 봐줬지만, 두 번은 안 돼.”
“…….”
오싹, 소름이 돋았다. 대공이 여유롭게 “자, 그럼.” 하고 말했다.
“어떻게 책임질 건가?”
“채, 책임이요?”
세상에. ‘책임’이라는 멀쩡한 단어가 이렇게까지 불순하게도 들릴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제, 제가 도대체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데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잖아!’
내가 애원을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매달려서 애원을 해 놓고 왜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거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미니 이벤트: 카미엘과의 언쟁’에 진입합니다!
카미엘과의 언쟁에서 승리하며 사과를 들을 시, 보상을 얻습니다.
보상: 카미엘의 호감도(大), 화술 +30.
실패할 시, 카미엘의 호감도(小)를 얻습니다.
당신의 화술 수치가 50 하락합니다.
‘협상의 달인’ 칭호가 ‘베테랑 협상가’로 강등됩니다.
엑, 뭐?
‘이 시점에서 미니 이벤트라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실패 시 페널티가 엄청났다.
‘화술 수치 하락에 칭호 강등…… 절대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과를 받아 내야 해!’
나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전하. 제가 전하께 애원하라고 시킨 적은 없거든요!”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카미엘은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내게 무슨 짓을 한 건 맞잖아.”
“그건.”
윽. 나는 찔끔해서 입을 닥쳤다.
“그날 물가에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넌 분명히 내게 뭔가를 했어. 그리고 그게…….”
“…….”
“……날 조금쯤 돌아 버리게 만든 것 같거든.”
빙그레 웃는 얼굴이 심상찮았다. 조금 솔직하게 말해 미친놈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이며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그건…….”
뭐라고 해야 하지? 나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대공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보주 건도 그래.”
“보, 보주요?”
“그래. 그게 내 몸에 흡수됐잖아.”
“그, 그랬죠.”
“그것도 네가 한 짓인 거 아냐?”
“네에?”
이거야말로 정말 억울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요, 그건!”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아니…….”
저런 식으로 자기가 피해자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 봤자 소용이 없을 터였다.
‘일단 보주 건은 제쳐 놓고, 앞에 말한 것부터 해명해야겠어.’
“처음부터 설명할게요.”
“…….”
“우선, 우리 자리부터 좀 이동하기로 해요.”
침대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는 자세는 아무래도 여러모로 불리한 감이 있었다.
“……좋아.”
대공의 동의하에, 우리는 방 한쪽에 마주 보고 놓인 소파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럼, 설명해.”
“우선, 제가 전하한테 했다는 ‘무슨 짓’말인데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정화 계열 신성력을 발현한 건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지금 그대의 말은,”
눈치 빠른 대공이 내 말을 받았다.
“나한테 사용한 힘이 ‘정화력’이라는 말인가?”
“정확해요.”
“그럼 예전에 공녀가 내게 ‘뭔가 오염된 것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 정화력과 관련한 질문이었던 건가?”
귀신같은 놈. 그걸 다 기억하고 앉았네.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믿을 만한 증거는?”
“안 믿으셔도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어요.”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봐 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
“게다가 전하께서 왜 애원을 하셨는지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애초에 저는 정화를 했을 뿐인데 이상해진 건 전하시잖아요.”
“계속해 봐.”
“아니, 생각해 보면 전하께서 먼저 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말하다 보니 억울해졌다.
“처음에는 전하께서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중독 증세를 보이길래 정화를 한 거고, 오늘은 전하께서 애원하시길래 해 드린 것뿐이라고요, 전!”
싫었거나 어디가 아팠으면 애원은 안 했겠지!
“그리고 자꾸 이렇게 절 추궁하시면 다시는 안 해 드릴 거예요!”
“기가 막히는군, 공녀.”
대공이 헛웃음을 토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네.”
나는 일부러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는 나쁜 짓 한 게 없는데, 이렇게 추궁하시면 다시는 안 해 드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요.”
“…….”
“애초에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 전하를 왜 정화할 수 있는 건지,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요.”
“……날카로운 데가 있어, 공녀.”
대공이 나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얘기를 하자고 저를 납치하실 필요까지는 없었잖아요?”
“그건…….”
대공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뭐라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부루퉁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이었다.
‘왜 저래?’
지금 부루퉁해야 할 사람은 난데, 자기가 왜 저런담?
“그건 뭐요? 무슨 이유라도 있으세요?”
“공녀가…….”
대공이 처음으로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날카로운 태도로 계속해서 그를 닦달했다.
“제가 뭘요?”
“……나를 자꾸 피했잖아.”
앗.
‘그, 그건 그랬지.’
대공이 한숨을 푹 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이상해졌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대답해 줄 만한 사람인 공녀는 자꾸 나를 피하고 있고…… 그러니 내가 오해를 안 할 수가 있나?”
“그, 그건…….”
“공녀는 자신의 힘이 정화력이라는 거라도 알고 있었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대공이 약간 침울해진 어투로 말했다.
“공녀가 뭔지 모를 능력을 사용했는데, 그걸 당하자마자 처음에는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어.”
“왜, 왜요……?”
“뭐라고 해야 할까?”
대공이 혀로 슬쩍 제 입술을 적셨다. 깜빡이는 눈빛이 무언가를 회상하고 느른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거든.”
“…….”
“너무 많이 보이지도, 너무 많이 들리지도 않고. 어디가 불편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
무슨 이상한 말이지?
‘저 사람이 말하는 살면서 처음 겪는 느낌…… 그건 그냥 사람의 평상시 상태 아닌가?’
하지만 대공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평소에는……?”
“그건 비밀이야.”
대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녀가 추측해 보는 건 상관없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싫어.”
그렇게 말하는 그는 눈웃음을 머금으며 웃고 있었다. 나는 약간 이상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거 내가 엄청난 짓을 해 버린 것 같은데…….’
뇌관인 줄도 모르고 폭탄의 전선을 무심결에 뽑아 버린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래.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공녀를 내 집으로 데려온 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하도록 하지.”
‘미니 이벤트: 카미엘과의 언쟁’이 종료됩니다!
카미엘의 호감도(大)를 얻습니다.
화술이 30 오릅니다.